2010년 1월 31일 일요일

'러블리 본스', 속았다는 생각만 들었다

1973년 12월6일, 14세 소녀 수지 새먼(시어샤 로난)이 시리얼 킬러에게 살해당한다. 평범한 이웃인 줄 알았던 남자가 알고봤더니 시리얼 킬러였던 것.

그러나 혈흔만 발견되었을 뿐 사체를 찾지 못한 경찰의 수사는 진전을 보이지 않는다. 만사를 제쳐두고 범인색출에 나선 수지의 아버지, 잭(마크 월버그)은 이웃에 사는 미스터 하비(스탠리 투치)를 의심하기 시작하지만 이를 증명할 뚜렷한 물증을 찾지 못한다.

한편, 죽은 사람들의 세계로 이동한 수지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가면서 그녀의 가족과 이웃, 친구들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수지의 관찰대상엔 그녀를 살해한 범인도 포함돼 있었다.

물론, 범인은 미스터 하비다.

스포일러 아니냐고?

절대 아니다. 범인이 누구라는 것을 이미 알려준 상태에서 스토리가 전개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계(異界)를 방황(?)하는 수지와 그녀의 친구, 가족, 경찰이 합동으로 범인을 잡게 된다는 스토리가 뻔해 보인다고?

딱 그렇게 보이는 게 사실이긴 하다. 그러나 그쪽으로 기대하면 크게 실망하게 될 것이다.

'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s)' 시리즈로 유명한 뉴질랜드 영화감독, 피터 잭슨(Peter Jackson)의 최신작 '러블리 본스(The Lovely Bones)'는 유령(?)과 인간이 합동작전을 벌여 살인범을 체포하는 수퍼내추럴 스릴러 영화가 아니다.

그래도 피터 잭슨이 연출을 맡았으니 판타지 영화 분위기는 제대로 날 것 같다고?

꿈 깨시구랴. 수지의 사후(死後) 세계가 CGI 특수효과 천지인 건 사실이지만 판타지 영화라는 생각이 들 정도는 아니다. '러블리 본스'는 다른 세계를 오가며 벌어지는 어드벤쳐 스토리가 아니라 생전에 알고지냈던 사람들을 이계에서 바라보는 수지의 이야기가 사실상 전부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미국의 소설가 앨리스 시볼드(Alice Sebold)가 쓴 원작소설부터 '판타지', '스릴러'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소설은 어땠냐고?

스타트는 좋았다. 살해당한 14세 소녀, 수지 새먼의 1인칭 시점으로 서술해가는 게 처음엔 제법 흥미진진했다. 그러나 "내가 죽기 며칠 전...", "내가 죽기 몇 주 전..."을 찾으며 지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하더니, 곧이어 학교 이야기, 여동생이 남자친구를 사귀는 이야기 등 살인사건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들이 계속 이어졌다. 그러더니 한 때는 단란했으나 살인사건으로 풍비박산난 새먼 가족의 이야기로 넘어갔다.

이 때까지만 해도 전개속도가 느릴 뿐이지 머지않아 살인사건 이야기로 다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국엔 새먼 가족과 수지의 친구 등이 미스터 하비가 범인이라는 것을 밝혀내는 줄거리가 될 것이란 기대를 접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러블리 본스'는 그런 소설이 아니었다. 살인범을 추적하는 수퍼내추럴 스릴러를 기대했었는데 알고보니 평범한 여성용 드라마가 전부였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한 가지 느낀 건, 영화보다는 TV 미니 시리즈로 제작하는 게 적합할 것 같다는 점이었다. 매 챕터가 마치 오후시간대 TV 드라마 에피소드처럼 보였을 뿐 아니라, 380여 페이지에 달하는 소설을 2시간짜리 영화로 압축하는 것도 쉽지않아 보였다.

그래도 굳이 영화로 각색하겠다면 학교얘기, 패밀리 얘기 등은 거의 모두 떼어내고 미스터 하비를 의심하는 새먼 가족의 이야기만으로 꾸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여기에 패트릭 스웨이지(Patrick Swayze) 주연의 90년대 영화 '고스트(Ghost)'를 연상케 하는 씬들까지 곁들이면 소녀 영화관객들을 찔끔거리게 만드는 것도 가능해 보였다.

그렇다. '러블리 본스'를 읽으면서 가장 먼저 생각났던 영화가 바로 '고스트'였다. 살해당해 유령이 된 사람이 주인공이라는 공통점 뿐만 아니라 '고스트'의 한 장면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장면들도 있었다.



물론이다. 영화 '러블리 본스'는 소녀 버전 '고스트'가 될 수 있었다. 아니, 그렇게 만들었어야 했다. 원작과 약간 차이가 나더라도 수지의 친구와 가족들이 살인범을 찾아내려는 것을 유령이 된 수지가 도와준다는 줄거리에 약간의 로맨스를 섞는 쪽으로 변화를 줬어야 했다.

영화 제작진은 예상했던 대로 살인범을 뒤쫓는 새먼 가족의 이야기에 촛점을 맞추고 나머지 부분들은 완전히 없애거나 축소시키긴 했다. 그러나 문제는 큰 변화를 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뺄 것 다 빼고, 우겨넣기식으로 압축한 게 전부였다.

물론 원작을 크게 훼손하지 않으려 한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소설의 2/3를 완전히 잘라내거나 매우 단순, 간단하게 압축시켰으니 이미 훼손이 가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조용하던 펜실배니아주의 한 마을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이 살몬 가족을 포함한 마을사람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나를 원작소설처럼 자세하게 보여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를 대신할 것을 마련했어야 했다. 2시간짜리 영화를 만들기에 나머지 1/3만으로는 부족했기 때문이다. 기왕 이렇게 된 김에 원작소설에서 한발짝 더 나아가 대놓고 '고스트'를 따라하는 것도 나쁜 아이디어는 아니었을 것이다. 만약 이러한 변화를 줬더라면 원작과는 차이가 나더라도 영화는 보다 재미있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제작진은 남은 1/3로 영화를 완성시켜버렸다. 이 바람에 '러블리 본스'는 얼핏보기엔 살인사건 미스테리를 다룬 영화처럼 보이면서도 살인사건은 흐지부지 넘어가고, 이 사건으로 영향을 받은 마을사람들의 이야기도 제대로 눈에 띄지않는, 한마디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영화가 됐다.

그렇다면 피터 잭슨은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이렇게 지루하고 엉성한 영화를 만들기로 한 것일까?

피터 잭슨 영화라는 데 넘어갈 영화관객들이 꽤 될 것으로 생각한 것 같다. 살해당한 여자아이가 저승과 이승을 오락가락한다는 스토리부터 피터 잭슨 영화에 딱 어울려 보였으니 말이다.

또한, 멋진 트레일러로 영화관객들을 낚을 자신도 있었던 것 같다. 트레일러 하나만큼은 제법 그럴싸했기 때문이다. 살인사건 미스테리를 다룬 수퍼내추럴 스릴러 영화로 착각하기 딱 알맞도록 아주 멋지게 만들었더라. 트레일러를 보고 이 영화를 보게 된 사람들은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을 지도 모르겠다.

'트와일라잇(Twilight)' 시리즈의 흥행성공 또한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피터 잭슨도 '트와일라잇'의 개봉과 함께 바람처럼 나타난 소녀 영화팬들을 한 번 상대해보고자 했던 것 같다. 이 친구들이 흥분하면 별 볼 일 없는 영화도 블록버스터로 만들어놓기 때문이다.



그런데 '트와일라잇'에 열광했던 소녀팬들이 '러블리 본스'에 만족했을려나 모르겠다. 이 영화에도 수지의 남자친구, 레이 역을 맡은 영국배우 리스 리치(Reece Ritchie)가 있긴 하지만 에드워드, 제이콥에 견줄 만한 미남 뱀파이어나 늑대인간이 없다는 데 실망했을 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소녀팬들이 '러블리 본스'에 덜 열광하는 게 다행스러운 일인 지도 모른다. 수지의 사후세계가 너무 아름답고 행복해 보인다며 다들 자살이라도 하겠다고 설치면 어쩌겠수?



어찌됐든 간에, '러블리 본스'는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흥행성공 덕에 탄생한 또하나의 괴물영화일 뿐이었다. 누구처럼 피터 잭슨의 영화라는 점, 트레일러가 매우 흥미롭게 보인다는 점에 낚여 소설까지 읽은 사람들은 아마도 속았다는 생각만 들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책도 영화도 안 읽고 안 봤을 텐데 말이다.

'어톤먼트(Atonement)'로 영화관객들에게 얼굴을 알린 틴에이저 배우 시어샤 로난(Saoirse Ronan)이 수지 역을 맡아 좋은 연기를 보여줬다는 것 하나는 건질 만 했다. 그러나 이것 하나를 제외하곤 기억할 만한 게 많지 않은 영화였다.

마지막으로, '러블리 본스'의 메인 타이틀곡이라 할 수 있는 Cocteau Twins의 'Alice'나 들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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