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7월 8일 목요일

비슷한 시기에 터진 러시안 스파이 사건과 '본드23' 제작취소 루머

지난 6월말 미국에서 터진 러시안 스파이 사건이 전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이야기가 더더욱 흥미롭게 된 것은, 뉴욕에서 러시아를 위한 스파이 활동을 하다 체포된 러시안 스파이 애나 챕맨(Anna Chapman)이 미모의 20대 여성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부터. '미녀 스파이'에 열광(?)한 타블로이드들은 "실제 본드걸이 나타났다"면서 하루가 멀다 하고 그녀에 대한 소식을 전했다.

그렇다. 러시안 스파이 사건 덕분에 얼떨결에 함께 주목을 받게 된 건 제임스 본드였다. 제임스 본드는 이번 사건과 아무런 연관이 없지만 냉전시절에나 있음 직한 대규모 러시안 스파이 소탕작전이 2010년 여름에 미국에서 벌어진 데다, 그 중 하나가 섹시한 20대 러시아 여성인 것으로 밝혀지자 미디어들은 바로 '제임스 본드', '본드걸'과 연결짓기 시작했다. 미국의 뉴욕 포스트(New York Post)는 자유의 여신상 앞에서 촬영한 애나 챕맨의 사진을 커버로 싣고 'The Spy Who Loved US'라는 타이틀을 붙였고, 영국의 일간지 데일리 텔레그래프(The Daily Telegraph)는 'The Spy Who Loved Me'라는 헤드라인과 함께 챕맨이 영국서 생활할 당시 찍은 결혼사진을 프론트에 실었다.

'The Spy Who Loved Me'는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탄생시킨 영국작가 이언 플레밍(Ian Fleming)이 1962년 발표한 소설의 제목이자 로저 무어(Roger Moore) 주연의 1977년 제임스 본드 영화 제목(나를 사랑한 스파이)이기도 하다.


▲데일리 텔레그래프(왼쪽), 뉴욕 포스트(오른쪽)

그렇다면 제임스 본드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돈이 없어서 '살인면허'가 정지된 상태다. 빚더미에 앉은 MGM 문제가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미모의 러시안 스파이 덕분에 함께 유명세를 탔으니 손해본 건 없는 듯 했다.

그런데...

영국의 타블로이드 데일리 미러(The Daily Mirror)가 엉뚱한 '익스클루시브 기사'를 띄우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본드23' 제작이 취소되었다고 전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러시안 스파이 사건으로 제임스 본드가 유명세를 타자 007 시리즈 관련 루머까지 등장한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중단(Suspended)'과 '취소(Canned)'의 차이다.

007 시리즈를 제작하는 EON 프로덕션은 지난 4월 '본드23' 제작을 잠정중단한다고 공식발표한 바 있다. 이는 EON 프로덕션이 프레스 릴리스를 통해 발표한 문자 그대로의 공식발표였으므로 의심할 여지가 없는 팩트다.

아래는 '본드23 제작 잠정중단' 프레스 릴리스 전문이다.

BOND 23 DELAYED INDEFINITELY

April 19, 2010 -- 007 producers, Michael G Wilson and Barbara Broccoliof EON Productions, today announced they have suspended development on the next James Bond film previously scheduled for release 2011/2012.

"Due to the continuing uncertainty surrounding the future of MGM and the failure to close a sale of the studio, we have suspended development on BOND 23 indefinitely. We do not know when development will resume and do not have a date for the release of BOND 23," stated Michael G Wilson and Barbara Broccoli jointly.

EON Productions have produced twenty two James Bond films since 1962. In 1995, Michael G Wilson and Barbara Broccoli took over the 007 franchise from Albert R 'Cubby' Broccoli and are responsible for producing some of the most successful James Bond films ever, including CASINO ROYALE and more recently QUANTUM OF SOLACE. The James Bond franchise is the longest running in film history. EON Productions and Danjaq LLC are affiliate companies and control all worldwide merchandising for James Bond.

SOURCE EON Productions

그러나 데일리 미러의 기사는 "본드23 제작이 완전히 취소되었다"고 되어있다. 중단된 것이 아니라 '본드23' 제작 자체가 취소되는 바람에 완전히 없었던 일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정보의 소스는 어디일까? MGM과 EON 프로덕션이 이러한 내용의 프레스 릴리스를 내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데일리 미러 기사에 의하면, 정체를 알 수 없는 '소식통(A glum insider)'으로부터 전해들은 것으로 되어있다.

"A glum insider said: “Members of the production crew have been told the Bond film has been canned." - The Daily Mirror

그렇다. 근거없는 루머의 전형이다.

이쯤 되었으면 영국 타블로이드가 러시안 스파이 사건에 맞춰 터뜨린 근거없는 소리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지난 4월 있었던 EON 프로덕션의 공식발표를 토대로 똑같은 내용을 재탕하면서 '중단'을 '취소'로 바꿔 시선을 끈 게 전부라는 게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중단', '취소' 같은 것은 둘 째 치더라도 미국에서 러시안 스파이 사건이 터지자 마자 바로 제임스 본드 시리즈 루머가 나왔다는 것만 봐도 상황파악을 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쇼비즈, 연예전문 사이트, 블로그들은 '본드23 제작 취소'라는 기사를 계속 올리고 있다. 기사를 쓴다는 사람들 중에도 사실확인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걸 보여준다고 해야 할 듯 하다. 뉴욕 타임스가 보도했다고 해도 그 소스를 찾아내 이중삼중 확인절차를 거치는 게 정상일 텐데 타블로이드, 연예/쇼비즈 전문 웹사이트나 블로그 등에 올라온 신빙성 떨어지는 쇼비즈 기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적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몇 명 보지도 않는 블로그에 끄적이면서도 프레스 릴리스까지 읽고 확인한 뒤 쓰는 판인데 아무 것이나 보고 덮어놓고 기사를 써도 되는 것이냐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문제의 루머를 만들어낸 주범(?)보다 이를 계속해서 재생산하는 나머지들이 더 이상하게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래서 버라이어티, 헐리우드 리포터 등 몇몇 극소수를 제외한 나머지 쇼비즈 미디어는 믿을 게 못 된다는 소리를 듣고있다. 지나친 흥미위주의 '믿거나 말거나' 식 기사들로 채우는 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헐리우드 리포터가 교통정리에 나섰다. 헐리우드 리포터는 지금 인터넷을 달구고 있는 '본드23 취소설'은 마치 새로운 소식처럼 인터넷을 통해 번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오래된 뉴스라면서, 지난 4월 있었던 EON 프로덕션의 발표내용을 재탕한 게 전부일 뿐 새로울 게 없다고 전했다.

또한, '본드23' 프로젝트는 지난 4월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고도 했다. '제작중단'에서 '취소'로 상황이 악화된 것도 아니고, 더 나아진 것도 없다는 것이다.

"The current wave of stories, including a report in London's Daily Mail and a Harry Knowles commentary on AintItCool.Com which were both published July 2, treated the halt on development as if it were breaking news, triggering a wave of new Bond “on ice” headlines that quickly multiplied across the web. But nothing has changed, according to insiders familiar with the situation." - Hollywood Reporter



잠깐!

헐리우드 리포터 기사에도 'According to insiders...'가 나오지 않냐고?

그렇다. 하지만 무책임한 타블로이드, 쇼비즈 전문 사이트들이 말하는 'Insiders'보다는 훨씬 믿을만 한 친구들일 것이다. 80년 전통의 헐리우드 리포터가 유령을 만들면서까지 자사의 공신력을 갉아먹을 리 없으니까.

이쯤 되었으면 내가 왜 이 이야기에 대한 포스트를 왜 이제서야 했는지, 현재 상황을 어떻게 보고있는 지 충분히 설명이 되었다고 본다.

혹시 '본드23 취소설' 배후에 러시안 에이전트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들지만, 에이...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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