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0년대부터 007 제작진의 가장 큰 골칫거리 중 하나는 새로운 007의 적을 찾는 일이다.
60년대와 70년대엔 스펙터와 블로펠드가 있었다. 그러나 법적인 문제로 인해 더이상 스펙터를 영화에 사용할 수 없게 되자 80년대엔 냉전 쪽으로 눈길을 돌리면서 소련과 직/간접적으로 얽힌 악당들을 등장시켰다. 90년대엔 상황이 더욱 나빠졌다. 냉전마저 막을 내리면서 007 제작진은 스펙터와 소련 옵션 모두를 잃게 된 것이다. 기초로 삼을 이언 플레밍(Ian Fleming)의 원작소설이 더 남아있는 것도 아니었다.
유감스럽게도 007 제작진은 아직까지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007 제작진의 '악당 찾기' 골칫거리는 피어스 브로스난(Pierce Brosnan) 시대를 거쳐 다니엘 크레이그(Daniel Craig) 시대로 이어졌다.
007 제작진은 라이센싱 문제로 영화로 제작하지 못하고 남겨뒀던 플레밍의 첫 번째 소설 '카지노 로얄(Casino Royale)'을 2006년이 되어서야 오피셜 제임스 본드 영화로 제작할 수 있었다. 첫 번째 제임스 본드 소설을 영화화한 007 제작진은 과거의 스펙터처럼 오랫동안 울궈먹을 수 있는 새로운 범죄조직까지 함께 탄생시키려 했다. 바로 '콴텀(Quantum)'이다. 007 시리즈가 원래 줄거리가 서로 연결되지 않는 각각 독립된 영화 시리즈임에도 불구하고 007 제작진이 후속편 '콴텀 오브 솔래스(Quantum of Solace)'의 줄거리를 '카지노 로얄'과 바로 이어지도록 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 역시 '콴텀'이라는 범죄조직에 있었다. 007 제작진이 과거에 하지 않던 짓까지 하면서 줄거리가 연결되는 '속편'을 007 시리즈 최초로 내놓은 이유는 새로운 악당과 범죄조직을 매번 찾아야 하는 어려움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콴텀'이라는 범죄조직을 스펙터처럼 키워보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콴텀'이라는 조직은 '콴텀 오브 솔래스'를 마지막으로 007 시리즈에서 사라지고 후속작 '스카이폴(Skyfall)'에선 또다른 악당이 등장했다. '콴텀'을 스펙터처럼 키우려던 계획이 삐걱이자 007 제작진은 '스카이폴'을 전편과 줄거리가 이어지지 않고 '콴텀'이라는 범죄조직도 등장하지 않는 독립된 제임스 본드 영화로 제작했다. '콴텀 오브 솔래스' 때만 해도 트릴로지 바람이 들었는지 007 시리즈를 줄거리가 이어지는 시리즈로 바꾸려 했던 007 제작진이 '스카이폴'에선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려 한 것이다.
그렇다면 '스카이폴'의 악당은 어땠을까?
스페인 영화배우 하비에르 바뎀(Javier Bardem)이 007 시리즈 50주년 기념작 '스카이폴'에서 악당을 맡는다는 루머가 나왔을 때부터 기대와 우려가 교차되었던 기억이 있다. 왜냐, 하비에르 바뎀이 007 시리즈 악당 역에 아주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에 빛나는 유명 영화배우'라는 타이틀 하나가 전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바뎀이 그에 잘 어울리는 캐릭터를 맡는다면 성공적이겠지만 그렇지 않는다면 1985년작 제임스 본드 영화 '뷰튜어킬(A View to a Kill)'에서 악역을 맡았던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수상자 크리스토퍼 워큰(Christopher Walken)처럼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배우가 아무리 훌륭해도 캐릭터가 꽝이면 별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름 있는 배우', '연기상을 받은 배우'를 캐스팅하면 극중 캐릭터가 어떻든 간에 무조건 멋져 보인다고 떠드는 단순한 속물들을 상대하기엔 편할 것이다. 현재 007 시리즈의 제작 방향이 그 쪽인 것도 사실이다. 출연배우부터 시작해서 영화감독 등 제작진에 이르기까지 이름있는 '명품'으로 치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카이폴'이 개봉했을 때 "샘 멘데즈(Sam Mendes)" 하면 "오오오오~!", "하비에르 바뎀" 하면 또 "오오오오~!" 하는 반응을 이끌어낸 걸 보면 한심스럽긴 해도 '명품' 효과가 나름 있는 것만은 사실인 듯 하다. '이젠 남은 게 없으니까 명품 이름값으로 시리즈를 유지하려는 것인가' 하는 생각만 들 뿐이지만,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로 와서 폴 해기스(Paul Haggis), 마크 포스터(Marc Forster), 피터 모갠(Peter Morgan), 샘 멘데즈 등 아트하우스 드라마에 어울리는 이름들이 007 시리즈 주위에 부쩍 많이 모여든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명품'과 '메이커'만 밝히는 'SNOB'은 만족시킬 수 있을지 몰라도 '본드팬'들을 만족시키긴 어렵다. '본드팬'들은 007 시리즈를 잘 만들 '적임자'를 찾는 데 흥미가 있지 '명품'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스카이폴'의 '명품' 하비에르 바뎀 역시 만족할 만한 007 시리즈 악당을 탄생시키지 못했다. '스카이폴'의 실바는 코믹북 수퍼히어로 영화 '다크 나이트(The Dark Knight)'의 조커를 어설프게 흉내낸 코믹북 스타일 악당 캐릭터가 전부였다. '콴텀 오브 솔래스'까지는 제이슨 본(Jason Bourne) 시리즈를 모방하는 데 혈안이 되어 줄거리가 이어지는 시리즈물에까지 도전했던 007 제작진이 '스카이폴'에선 코믹북 수퍼히어로 바람이 든 듯 했다. 하비에르 바뎀이 맡은 실바는 전형적인 코믹북 수퍼히어로물 캐릭터였지 007 시리즈 악당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실바는 직접 총을 들고 현장을 뛰어다니는 범죄자였을 뿐 큰 조직을 쥐고 흔드는 보스급 악당 캐릭터가 아니었다.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해 '콴텀 오브 솔래스'에 적지 않은 실망을 했던 게 사실이지만, '스카이폴'을 본 이후엔 차라리 '콴텀 오브 솔래스'가 더 나았다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었으며 악당도 차라리 '콴텀'이 계속 등장했더라면 더 나을 뻔 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007 제작진이 무엇보다도 기억해야 할 점은 악당 보스(Villain)와 그의 부하들인 헨치맨(Henchman)을 분명하게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007 시리즈의 전통적인 스타일이다. 007 제작진은 며칠 전 유니버설 픽쳐스의 영화 '섹션-6(Section-6)'가 007 시리즈 저작권을 침해했다고 낸 고소장에서도 'Bond Villain'과 'Bond Villain's Henchman'을 007 시리즈의 전통적인 요소 중 하나로 꼽은 바 있다.
그러나 007 제작진은 '스카이폴'에서 'Villain'과 'Henchman'을 명확하게 구분짓지 않았다. '스카이폴'의 실바는 외모와 행동은 'Henchman'이지만 실제로는 'Villain'인 엉거주춤한 캐릭터였다. 전형적인 007 시리즈 악당(Villain)은 조직의 보스로써 직접 행동하기 보다 헨치맨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스타일이다. 현장을 직접 뛰어다니는 '필드형'이 아니라 뒤에서 조종하는 '데스크형'이라는 것이다. 007 시리즈의 'Villain', 즉 악당 보스는 마피아 보스처럼 거대 조직의 두목과 같은 면이 보여야 한다. 그래야 두목, 즉 'Villain'과 행동대원, 즉 'Henchman'이 좀 더 분명하게 구별될 수 있다.
007 제작진은 고소장에선 'Bond Villain'과 'Bond Villain's Henchman'을 저작권 보호를 받아야 하는 007 시리즈의 전통적 요소로 꼽으면서도 007 시리즈 23탄 '스카이폴'에선 코믹북 수퍼히어로 시리즈를 모방한 어중간한 악당 캐릭터를 선보였다. 유니버설이 'Bond Villain'과 'Bond Villain's Henchman'을 흉내내려는 것이 저작권 침해에 해당된다면 007 제작진이 '스카이폴'에서 '다크 나이트'의 조커를 흉내낸 코믹북 수퍼히어로 캐릭터(실바)를 등장시킨 것 또한 마찬가지로 봐야하지 않나 싶다.
'본드24'에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해선 안 된다. 007 제작진은 '본드24'에서 007 시리즈에 어울리는 악당을 보여줘야 한다. "이젠 외도를 그만 하고 정상 궤도로 돌아갈 때가 됐다"는 본드팬들의 의견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는 007 시리즈에 변화를 준답시며 육갑떠는 걸 쓴웃음 지으며 지켜봐줬지만 이젠 그만할 때가 된 것 같다"는 본드팬들의 목소리가 적지 않게 들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007 제작진이 스펙터 관련 라이센스를 케빈 맥클로리(Kevin McClory) 측으로부터 모두 넘겨받았다는 점이다. 케빈 맥클로리가 판권을 쥐고 있으면서 007 시리즈 사용을 불허했던 스펙터와 블로펠드가 1971년작 '다이아몬드는 영원히(Diamonds are Forever)' 이후 다시 007 시리즈에 등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본드팬 중에서 스펙터와 블로펠드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스타 워즈(Star Wars)' 팬 중에서 다스 베이더(Darth Vader)를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스펙터와 블로펠드는 이언 플레밍의 소설 시리즈에도 나올 뿐만 아니라 6070년대 영화 시리즈에 연달아 등장했으므로 소설팬, 영화팬 모두에게 친숙한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외도 중이던 007 시리즈가 다시 정상 궤도로 돌아가면서 스펙터와 블로펠드와 함께 한다'는 씨나리오는 나쁘지 않아 보인다. 다만 스펙터와 블로펠드가 등장했던 과거 007 시리즈가 비현실적인 플롯으로 악명이 높은 만큼 똑같은 방식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엔 반대할 수 밖에 없다. 터무니 없는 플롯을 반복 재생산하던 시절로 되돌아가는 건 늦었다. 하지만 스케일은 과거보다 작더라도 여전히 위협적인 범죄와 음모를 꾸미는 범죄조직으로 재단장하는 건 가능하다. 내친 김에 지난 '콴텀'과 스펙터를 연계시키는 것도 방법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다.
007 제작진이 21세기 스펙터를 얼마나 성공적으로 재탄생시키는가에 따라 과거 6070년대에 했던 것처럼 스펙터와 블로펠드를 단골 악당으로 계속해서 사용 가능하게 될 수도 있다. 이렇게 된다면 007 제작진이 80년대 말부터 앓아온 만성적인 악당 찾기 두통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 007 시리즈가 '007 vs 스펙터' 구도로 굳으면서 매 영화마다 악당을 스펙터로 정해 놓고 스토리를 짤 수 있게 되면 매번 새로운 악당을 만들어내야 하는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다. 스펙터가 매번 새로운 범죄와 음모를 들고 나오도록 하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굳이 줄거리를 연결시키고 자시고 할 필요도 없다. 바로 이것이 전통적인 007 시리즈 스타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당장 '본드24'부터 스펙터가 등장하는 것일까?
그것에 대해선 아직 알려진 바 없다.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로썬 아무 것도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스카이폴'의 유치한 아동용 코믹북 스타일 스토리텔링이 '본드24'로 계속 이어진다는 전제 하에 한 번 예상을 해보자면, '본드24' 마지막 파트에 스펙터 또는 블로펠드가 나타나거나 이들을 암시하는 무언가를 보여줄 수는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찌되든 간에 스펙터와 블로펠드는 80년대 이후부터 새로운 악당을 만들기 위해 골머리를 앓아 온 007 제작진의 부담을 크게 덜어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스펙터와 블로펠드가 당장 '본드24'부터 영화에 등장할 지는 알 수 없는 얘기지만 앞으로 '007 vs 스펙터' 구도의 007 시리즈가 많이 나올 가능성이 크다. 007 제작진이 이것을 노리고 스펙터와 블로펠드 라인센스를 거둬들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본드24' 악당은 누가 맡을까?
최근 나온 루머에 의하면, '투웰브 이어즈 어 슬레이브(Twelve Years a Slave)'로 아카데미 남우주연 후보에 올랐던 치웨텔 에지오퍼(Chiwetel Ejiofor)가 유력 후보 중 하나라고 한다.
그렇다. 아카데미 연기상 부문에 후보로 올랐던 배우가 또 제임스 본드 시리즈 악역 후보로 꼽히고 있다.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던 영화배우가 '본드24' 악당 후보 중 하나로 지목된 것이 이젠 더이상 우연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치웨텔 에지오퍼가 나쁜 초이스라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흑인 배우가 007 시리즈 악역을 맡은 것은 로저 무어(Roger Moore) 주연의 1973년 영화 '죽느냐 사느냐(Live and Let Die)' 한 번이 전부다. 흑인 배우들이 부하 헨치맨 역을 맡은 적은 있어도 악당 보스 역을 맡은 적은 '죽느냐 사느냐' 한 번밖에 없다. 그러므로 아주 오랜만에 흑인 배우에게 악당 보스 역을 맡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하다. 지금까지 안 해 봤거나 뜸했던 것들을 찾는 데 혈안이 되어있는 007 제작진이 40년이 넘도록 볼 수 없었던 흑인 악당 보스를 아주 오랜만에 다시 선보이는 카드를 충분히 사용할 수 있을 듯 하다.
하지만 역시 문제는 영화배우보다 캐릭터다. 치웨텔 에지오퍼가 아무리 훌륭한 영화배우라고 해도 캐릭터가 형편없으면 별 수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치웨텔 에지오퍼는 2007년 영화 '아메리칸 갱스터(American Gangster)'에 댄젤 워싱턴(Denzel Washington)과 함께 출연한 적이 있다. 만약 그가 '본드24'의 악당 역을 맡는다면 이번엔 그가 댄젤 워싱턴이 '아메리칸 갱스터'에서 프랭크 루카스(Frank Lucas)를 연기했던 것처럼 카리스마틱한 보스 연기를 보여줘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 공식 발표되지 않았으므로 누가 '본드24' 악역을 맡게되는지는 조금 더 두고봐야 알 수 있을 듯 하다.
60년대와 70년대엔 스펙터와 블로펠드가 있었다. 그러나 법적인 문제로 인해 더이상 스펙터를 영화에 사용할 수 없게 되자 80년대엔 냉전 쪽으로 눈길을 돌리면서 소련과 직/간접적으로 얽힌 악당들을 등장시켰다. 90년대엔 상황이 더욱 나빠졌다. 냉전마저 막을 내리면서 007 제작진은 스펙터와 소련 옵션 모두를 잃게 된 것이다. 기초로 삼을 이언 플레밍(Ian Fleming)의 원작소설이 더 남아있는 것도 아니었다.
유감스럽게도 007 제작진은 아직까지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007 제작진의 '악당 찾기' 골칫거리는 피어스 브로스난(Pierce Brosnan) 시대를 거쳐 다니엘 크레이그(Daniel Craig) 시대로 이어졌다.
007 제작진은 라이센싱 문제로 영화로 제작하지 못하고 남겨뒀던 플레밍의 첫 번째 소설 '카지노 로얄(Casino Royale)'을 2006년이 되어서야 오피셜 제임스 본드 영화로 제작할 수 있었다. 첫 번째 제임스 본드 소설을 영화화한 007 제작진은 과거의 스펙터처럼 오랫동안 울궈먹을 수 있는 새로운 범죄조직까지 함께 탄생시키려 했다. 바로 '콴텀(Quantum)'이다. 007 시리즈가 원래 줄거리가 서로 연결되지 않는 각각 독립된 영화 시리즈임에도 불구하고 007 제작진이 후속편 '콴텀 오브 솔래스(Quantum of Solace)'의 줄거리를 '카지노 로얄'과 바로 이어지도록 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 역시 '콴텀'이라는 범죄조직에 있었다. 007 제작진이 과거에 하지 않던 짓까지 하면서 줄거리가 연결되는 '속편'을 007 시리즈 최초로 내놓은 이유는 새로운 악당과 범죄조직을 매번 찾아야 하는 어려움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콴텀'이라는 범죄조직을 스펙터처럼 키워보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콴텀'이라는 조직은 '콴텀 오브 솔래스'를 마지막으로 007 시리즈에서 사라지고 후속작 '스카이폴(Skyfall)'에선 또다른 악당이 등장했다. '콴텀'을 스펙터처럼 키우려던 계획이 삐걱이자 007 제작진은 '스카이폴'을 전편과 줄거리가 이어지지 않고 '콴텀'이라는 범죄조직도 등장하지 않는 독립된 제임스 본드 영화로 제작했다. '콴텀 오브 솔래스' 때만 해도 트릴로지 바람이 들었는지 007 시리즈를 줄거리가 이어지는 시리즈로 바꾸려 했던 007 제작진이 '스카이폴'에선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려 한 것이다.
그렇다면 '스카이폴'의 악당은 어땠을까?
스페인 영화배우 하비에르 바뎀(Javier Bardem)이 007 시리즈 50주년 기념작 '스카이폴'에서 악당을 맡는다는 루머가 나왔을 때부터 기대와 우려가 교차되었던 기억이 있다. 왜냐, 하비에르 바뎀이 007 시리즈 악당 역에 아주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에 빛나는 유명 영화배우'라는 타이틀 하나가 전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바뎀이 그에 잘 어울리는 캐릭터를 맡는다면 성공적이겠지만 그렇지 않는다면 1985년작 제임스 본드 영화 '뷰튜어킬(A View to a Kill)'에서 악역을 맡았던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수상자 크리스토퍼 워큰(Christopher Walken)처럼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배우가 아무리 훌륭해도 캐릭터가 꽝이면 별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름 있는 배우', '연기상을 받은 배우'를 캐스팅하면 극중 캐릭터가 어떻든 간에 무조건 멋져 보인다고 떠드는 단순한 속물들을 상대하기엔 편할 것이다. 현재 007 시리즈의 제작 방향이 그 쪽인 것도 사실이다. 출연배우부터 시작해서 영화감독 등 제작진에 이르기까지 이름있는 '명품'으로 치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카이폴'이 개봉했을 때 "샘 멘데즈(Sam Mendes)" 하면 "오오오오~!", "하비에르 바뎀" 하면 또 "오오오오~!" 하는 반응을 이끌어낸 걸 보면 한심스럽긴 해도 '명품' 효과가 나름 있는 것만은 사실인 듯 하다. '이젠 남은 게 없으니까 명품 이름값으로 시리즈를 유지하려는 것인가' 하는 생각만 들 뿐이지만,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로 와서 폴 해기스(Paul Haggis), 마크 포스터(Marc Forster), 피터 모갠(Peter Morgan), 샘 멘데즈 등 아트하우스 드라마에 어울리는 이름들이 007 시리즈 주위에 부쩍 많이 모여든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명품'과 '메이커'만 밝히는 'SNOB'은 만족시킬 수 있을지 몰라도 '본드팬'들을 만족시키긴 어렵다. '본드팬'들은 007 시리즈를 잘 만들 '적임자'를 찾는 데 흥미가 있지 '명품'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스카이폴'의 '명품' 하비에르 바뎀 역시 만족할 만한 007 시리즈 악당을 탄생시키지 못했다. '스카이폴'의 실바는 코믹북 수퍼히어로 영화 '다크 나이트(The Dark Knight)'의 조커를 어설프게 흉내낸 코믹북 스타일 악당 캐릭터가 전부였다. '콴텀 오브 솔래스'까지는 제이슨 본(Jason Bourne) 시리즈를 모방하는 데 혈안이 되어 줄거리가 이어지는 시리즈물에까지 도전했던 007 제작진이 '스카이폴'에선 코믹북 수퍼히어로 바람이 든 듯 했다. 하비에르 바뎀이 맡은 실바는 전형적인 코믹북 수퍼히어로물 캐릭터였지 007 시리즈 악당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실바는 직접 총을 들고 현장을 뛰어다니는 범죄자였을 뿐 큰 조직을 쥐고 흔드는 보스급 악당 캐릭터가 아니었다.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해 '콴텀 오브 솔래스'에 적지 않은 실망을 했던 게 사실이지만, '스카이폴'을 본 이후엔 차라리 '콴텀 오브 솔래스'가 더 나았다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었으며 악당도 차라리 '콴텀'이 계속 등장했더라면 더 나을 뻔 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007 제작진이 무엇보다도 기억해야 할 점은 악당 보스(Villain)와 그의 부하들인 헨치맨(Henchman)을 분명하게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007 시리즈의 전통적인 스타일이다. 007 제작진은 며칠 전 유니버설 픽쳐스의 영화 '섹션-6(Section-6)'가 007 시리즈 저작권을 침해했다고 낸 고소장에서도 'Bond Villain'과 'Bond Villain's Henchman'을 007 시리즈의 전통적인 요소 중 하나로 꼽은 바 있다.
그러나 007 제작진은 '스카이폴'에서 'Villain'과 'Henchman'을 명확하게 구분짓지 않았다. '스카이폴'의 실바는 외모와 행동은 'Henchman'이지만 실제로는 'Villain'인 엉거주춤한 캐릭터였다. 전형적인 007 시리즈 악당(Villain)은 조직의 보스로써 직접 행동하기 보다 헨치맨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스타일이다. 현장을 직접 뛰어다니는 '필드형'이 아니라 뒤에서 조종하는 '데스크형'이라는 것이다. 007 시리즈의 'Villain', 즉 악당 보스는 마피아 보스처럼 거대 조직의 두목과 같은 면이 보여야 한다. 그래야 두목, 즉 'Villain'과 행동대원, 즉 'Henchman'이 좀 더 분명하게 구별될 수 있다.
007 제작진은 고소장에선 'Bond Villain'과 'Bond Villain's Henchman'을 저작권 보호를 받아야 하는 007 시리즈의 전통적 요소로 꼽으면서도 007 시리즈 23탄 '스카이폴'에선 코믹북 수퍼히어로 시리즈를 모방한 어중간한 악당 캐릭터를 선보였다. 유니버설이 'Bond Villain'과 'Bond Villain's Henchman'을 흉내내려는 것이 저작권 침해에 해당된다면 007 제작진이 '스카이폴'에서 '다크 나이트'의 조커를 흉내낸 코믹북 수퍼히어로 캐릭터(실바)를 등장시킨 것 또한 마찬가지로 봐야하지 않나 싶다.
'본드24'에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해선 안 된다. 007 제작진은 '본드24'에서 007 시리즈에 어울리는 악당을 보여줘야 한다. "이젠 외도를 그만 하고 정상 궤도로 돌아갈 때가 됐다"는 본드팬들의 의견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는 007 시리즈에 변화를 준답시며 육갑떠는 걸 쓴웃음 지으며 지켜봐줬지만 이젠 그만할 때가 된 것 같다"는 본드팬들의 목소리가 적지 않게 들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007 제작진이 스펙터 관련 라이센스를 케빈 맥클로리(Kevin McClory) 측으로부터 모두 넘겨받았다는 점이다. 케빈 맥클로리가 판권을 쥐고 있으면서 007 시리즈 사용을 불허했던 스펙터와 블로펠드가 1971년작 '다이아몬드는 영원히(Diamonds are Forever)' 이후 다시 007 시리즈에 등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본드팬 중에서 스펙터와 블로펠드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스타 워즈(Star Wars)' 팬 중에서 다스 베이더(Darth Vader)를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스펙터와 블로펠드는 이언 플레밍의 소설 시리즈에도 나올 뿐만 아니라 6070년대 영화 시리즈에 연달아 등장했으므로 소설팬, 영화팬 모두에게 친숙한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외도 중이던 007 시리즈가 다시 정상 궤도로 돌아가면서 스펙터와 블로펠드와 함께 한다'는 씨나리오는 나쁘지 않아 보인다. 다만 스펙터와 블로펠드가 등장했던 과거 007 시리즈가 비현실적인 플롯으로 악명이 높은 만큼 똑같은 방식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엔 반대할 수 밖에 없다. 터무니 없는 플롯을 반복 재생산하던 시절로 되돌아가는 건 늦었다. 하지만 스케일은 과거보다 작더라도 여전히 위협적인 범죄와 음모를 꾸미는 범죄조직으로 재단장하는 건 가능하다. 내친 김에 지난 '콴텀'과 스펙터를 연계시키는 것도 방법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다.
007 제작진이 21세기 스펙터를 얼마나 성공적으로 재탄생시키는가에 따라 과거 6070년대에 했던 것처럼 스펙터와 블로펠드를 단골 악당으로 계속해서 사용 가능하게 될 수도 있다. 이렇게 된다면 007 제작진이 80년대 말부터 앓아온 만성적인 악당 찾기 두통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 007 시리즈가 '007 vs 스펙터' 구도로 굳으면서 매 영화마다 악당을 스펙터로 정해 놓고 스토리를 짤 수 있게 되면 매번 새로운 악당을 만들어내야 하는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다. 스펙터가 매번 새로운 범죄와 음모를 들고 나오도록 하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굳이 줄거리를 연결시키고 자시고 할 필요도 없다. 바로 이것이 전통적인 007 시리즈 스타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당장 '본드24'부터 스펙터가 등장하는 것일까?
그것에 대해선 아직 알려진 바 없다.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로썬 아무 것도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스카이폴'의 유치한 아동용 코믹북 스타일 스토리텔링이 '본드24'로 계속 이어진다는 전제 하에 한 번 예상을 해보자면, '본드24' 마지막 파트에 스펙터 또는 블로펠드가 나타나거나 이들을 암시하는 무언가를 보여줄 수는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찌되든 간에 스펙터와 블로펠드는 80년대 이후부터 새로운 악당을 만들기 위해 골머리를 앓아 온 007 제작진의 부담을 크게 덜어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스펙터와 블로펠드가 당장 '본드24'부터 영화에 등장할 지는 알 수 없는 얘기지만 앞으로 '007 vs 스펙터' 구도의 007 시리즈가 많이 나올 가능성이 크다. 007 제작진이 이것을 노리고 스펙터와 블로펠드 라인센스를 거둬들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본드24' 악당은 누가 맡을까?
최근 나온 루머에 의하면, '투웰브 이어즈 어 슬레이브(Twelve Years a Slave)'로 아카데미 남우주연 후보에 올랐던 치웨텔 에지오퍼(Chiwetel Ejiofor)가 유력 후보 중 하나라고 한다.
그렇다. 아카데미 연기상 부문에 후보로 올랐던 배우가 또 제임스 본드 시리즈 악역 후보로 꼽히고 있다.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던 영화배우가 '본드24' 악당 후보 중 하나로 지목된 것이 이젠 더이상 우연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치웨텔 에지오퍼가 나쁜 초이스라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흑인 배우가 007 시리즈 악역을 맡은 것은 로저 무어(Roger Moore) 주연의 1973년 영화 '죽느냐 사느냐(Live and Let Die)' 한 번이 전부다. 흑인 배우들이 부하 헨치맨 역을 맡은 적은 있어도 악당 보스 역을 맡은 적은 '죽느냐 사느냐' 한 번밖에 없다. 그러므로 아주 오랜만에 흑인 배우에게 악당 보스 역을 맡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하다. 지금까지 안 해 봤거나 뜸했던 것들을 찾는 데 혈안이 되어있는 007 제작진이 40년이 넘도록 볼 수 없었던 흑인 악당 보스를 아주 오랜만에 다시 선보이는 카드를 충분히 사용할 수 있을 듯 하다.
하지만 역시 문제는 영화배우보다 캐릭터다. 치웨텔 에지오퍼가 아무리 훌륭한 영화배우라고 해도 캐릭터가 형편없으면 별 수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치웨텔 에지오퍼는 2007년 영화 '아메리칸 갱스터(American Gangster)'에 댄젤 워싱턴(Denzel Washington)과 함께 출연한 적이 있다. 만약 그가 '본드24'의 악당 역을 맡는다면 이번엔 그가 댄젤 워싱턴이 '아메리칸 갱스터'에서 프랭크 루카스(Frank Lucas)를 연기했던 것처럼 카리스마틱한 보스 연기를 보여줘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 공식 발표되지 않았으므로 누가 '본드24' 악역을 맡게되는지는 조금 더 두고봐야 알 수 있을 듯 하다.
요근래 거의 유일하게 괜찮게 만들었던007영화인 카지노 로얄도
답글삭제악당캐릭터 자체는 뭔가 변변치 않았죠. 고문신의 기억과 외모에서 나오는 포스가 후덜덜해서 괜찮게 기억되지만요 ㅎ
르쉬프의 경우는 일단 원작 소설에 나오는 캐릭터라는 점이 큰 역할을 해줬던 것 같습니다.
삭제하지만 제 생각에도 강한 인상을 남긴 악당 캐릭터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