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29일 화요일

'헤이트풀 에이트', 썩 맘에 들진 않았어도 3시간이 지루하지 않았다

쿠엔틴 타란티노(Quentin Tarantino) 감독의 새 영화가 개봉했다. 영화는 10편까지만 만들고 그 이후부턴 소설 집필과 스테이지 공연 등 다른 일을 하고싶다고 밝힌 타란티노 감독의 여덟 번째 영화다.

타란티노 감독의 여덟 번째 영화의 쟝르는 지난 '쟁고 언체인드(Django Unchained)'에 이어 이번에도 또 웨스턴이다.

제목은 '헤이트풀 에이트(The Hateful Eight)'.

'헤이트풀 에이트'의 출연진은 화려함과 동시에 낯익다. 타란티노 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는 새무엘 L. 잭슨(Samuel L. Jackson), 커트 러셀(Kurt Russell), 팀 로스(Tim Roth), 마이클 매드슨(Michael Madsen), 월튼 고긴스(Walton Goggins) 등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제니퍼 제이슨 리(Jennifer Jason Leigh), 데이미언 비치르(Damian Bichir), 브루스 던(Bruce Dern), 채닝 테이텀(Channing Tatum) 등이 출연했다.

커트 러셀은 춥고 눈이 내리는 날 범죄자 데이지(제니퍼 제이슨 리)를 교수형시키기 위해 레드 록이라 불리는 곳까지 마차로 호송 중인 현상금 사냥꾼 루스 역을 맡았고, 새무엘 L. 잭슨은 데이지를 호송 중인 루스 일행을 길에서 만나는 또다른 현상금 사냥꾼 워렌 역으로 출연했다. 월튼 고긴스는 루스가 마차로 이동 중 길에서 만나게 되는 두 번째 인물인 매닉스 역을 맡았다. 자신을 레드 록 신임 보안관이라고 밝힌 매닉스도 워렌과 함께 루스의 마차를 얻어탄다. 팀 로스, 마이클 매디슨, 데이미언 비치르, 브루스 던은 루스 일행이 폭설을 피해 도중에 들린 오두막에서 만나게 되는 낯선 사나이 역으로 출연했다.

쿠엔틴 타란티노는 '헤이트풀 에이트'의 연출, 스크린플레이를 맡았다.

'헤이트풀 에이트'는 미국서 '로드쇼(Roadshow)'와 '일반(General)' 버전으로 개봉했다. 북미에서 12월25일 제한적으로 먼저 개봉한 70mm 로드쇼 버전은 런타임이 3시간이 넘으며, 북미서 12월 마지막 주말에 개봉하는 디지털 일반 버전은 로드쇼 버전에 비해 20분 정도 짧은 것으로 전해졌다. 로드쇼 버전으로만 봤을 뿐 아직 개봉하지 않은 일반 버전은 보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히 어떤 차이가 있는지 모른다. 아마도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는 '인터미션'이 아닐까 추측해 보는 정도다. 로드쇼 버전엔 챕터 3 이후 '인터미션'을 거쳐서 챕터 4로 넘어갔으나 멀티플렉스에서 개봉하는 일반 버전엔 '인터미션'이 없을 듯 하므로, '인터미션'이 런타임 20분 차이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것일 수도 있다.


'헤이트풀 에이트'는 아주 심플한 영화다. '헤이트풀 에이트'는 범죄자 데이지(제니퍼 제이슨 리)를 호송하던 현상금 사냥꾼 루스(커트 러셀)가 길에서 만난 또다른 현상금 사냥꾼 워렌(새무엘 L. 잭슨)과 보안관 매닉스(월튼 고긴스)와 함께 여행을 하다 폭설을 피해 들린 오두막에서 만난 낯선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그린 영화다. 루스 일행이 마차를 타고 오두막까지 가는 파트와 오두막에서 낯선 사람들을 만난 뒤 벌어지는 2개의 파트로 구성되었다. 챕터 1과 2는 마차 파트이고 3부터 마지막까지는 오두막 파트다. 따라서 영화의 거의 전체가 마차와 오두막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된다.

사건은 오두막에 도착한 워렌이 그곳에서 일해야 할 낯익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고 처음 보는 사람으로 바뀐 점을 의심스러워 하면서 시작한다. 루스 역시 폭설로 오두막에 고립된 사람들 중 거짓말을 하는 자가 있다고 의심한다. 남북전쟁 당시 북군 출신인 워렌과 남군 출신인 매닉스는 마차에서부터 오두막에 도착해서까지 인종 문제로 언쟁을 벌이는 등 긴장감이 흐르고, 오두막에서 남군 장군 출신인 스미더스(브루스 던)까지 만나면서 분위기가 더욱 험악해진다. 이 때 오두막에서 살인사건이 터지면서 누가 범인이며 동기가 무엇인가에 대한 미스터리를 풀어가게 된다...


'헤이트풀 에이트'는 웨스턴이라기 보다 범죄 미스터리 영화에 가까웠다. 웨스턴이 추리소설을 만난 듯한 영화였다.

'헤이트풀 에이트'는 액션 비중이 매우 낮은 영화였다. 총격전을 벌이는 씬이 영화에 나오긴 하지만, 사실상 영화 전체가 대화 씬으로 채워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대화 비중이 큰 영화였다. 오두막 씬에선 영화가 아니라 무대 연극을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또한, '헤이트풀 에이트'는 절반은 코미디인 영화였다.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코믹한 씬들이 종종 나왔으며, 등장 캐릭터들도 모두 괴팍스럽고 코믹했으며, 재밌는 대사도 풍부했다.

그렇다. '헤이트풀 에이트'는 웨스턴이 추리소설을 만난 듯한 대사량이 많은 코미디 영화였다.

타란티노 감독 특유의 폭력 수위 높은 액션 씬으로 가득한 화끈한 웨스턴 액션 영화일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의외로 '헤이트풀 에이트'는 그런 영화가 아니었다. 줄거리는 처음엔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궁금증이 생겼지만, 다 알고 나니 있으나 마나 한 매우 단순한 스토리가 전부였다. 등장 캐릭터들이 하나씩 등장해 자기 소개를 하고 지난 과거 이야기, 남북전쟁 이야기, 인종문제 이야기 등으로 이야기 꽃을 피웠지만, 영화의 줄거리는 "주인공 일행이 길을 가다 도중에 악당들을 만나 한바탕 한다"가 사실상 전부였다. 이렇게 매우 단순한 줄거리 위에 애거서 크리스티(Agatha Christie)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And Then There Were None)'를 연상케 하는 미스터리물 스타일을 덧씌운 아이디어는 다소 의외이긴 했어도 과히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연극인지 영화인지, 코미디물인지 미스터리물인지, 아니면 서부영화인지 다소 혼란스러운 영화였다.

대사량이 많은데 영화가 3시간이 넘을 정도로 길었다면 도중에 지루했겠다고?

그렇진 않았다. 진행속도가 조금 더디다는 느낌은 분명히 들었으나 영화를 보는 도중에 지루함이 밀려오진 않았다. 등장 캐릭터들이 다들 흥미진진했고, 재밌는 대사가 많이 나오는 등 유머도 풍부했기 때문이다. 진행속도가 더디긴 했지만 영화에 계속 집중하도록 만들었고, 대화 내용에도 계속 귀를 기울이게 됐다. 별다른 특별한 이야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연극에서 무대에 오른 배우들이 계속해서 서로 대사를 주고 받는 모습과 자꾸 겹쳐졌지만, 도중에 흥미를 잃고 산만해지지 않았다. '헤이트풀 에이트'보다 '괴짜들의 수다'가 영화와 보다 잘 어울리는 제목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런타임 3시간이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썩 맘에 들진 않았어도 3시간을 버티는 것이 힘들거나 지루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이런 단순한 줄거리로 3시간짜리 영화를 만들었다는 게 말이 되나' 싶으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3시간이 지루하지 않도록 만든 타란티노의 재주'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출연진도 모두 좋은 연기를 펼쳤다. 특히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데이지 역을 맡은 제니퍼 제이슨 리였다. 데이지는 루스와 함께 수갑을 찬 채로 행동하면서 수시로 루스에게 두들겨맞아 머리에서 피를 흘리고 코피까지 터지면서도 괴팍한 유머 감각을 가진 아주 재밌는 캐릭터였다. 제니퍼 제이슨 리는 한편으론 엉뚱하고 살짝 맛이 간 듯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사악한 범죄인의 모습을 띤 데이지를 훌륭하게 연기했다. 말을 많이 하면 루스에게 얻어터졌기 때문에 대사량은 다른 캐릭터에 비해 적은 편이었으나, 데이지가 등장할 때마다 스크린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유명한 배우들이 많이 출연했고 등장 캐릭터들도 모두 흥미로운 편이긴 했어도 강한 인상을 남길 만한 캐릭터는 없었는데, 제니퍼 제이슨 리가 연기한 데이지는 오래 기억에 남을 만한 캐릭터였다.


사실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타란티노의 영화는 흥미롭긴 해도 그의 스타일이 여러모로 입맛에 잘 맞지 않는다.

'헤이트풀 에이트'도 그런 타란티노 영화 중 하나였다. 썩 만족스럽진 않은 영화였어도 영화를 보는 동안엔 지루함을 모르고 흥미진진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영화였다. 타란티노의 영화는 이 정도에서 만족하는 데 어느 정도 익숙해진 상태였는데, 이번 '헤이트풀 에이트' 역시도 그 정도였다. 액션이 부족하고 대사량이 무척 많은 데다 진행속도가 더뎠다는 점 등 다소 뜻밖이었거나 실망스러웠던 부분이 타란티노의 이전 영화들보다 뚜렷하게 느껴졌던 만큼 굳이 점수를 매긴다면 이전 영화들보다 약간 낮게 줘야 할 지 모른다. 하지만 '헤이트풀 에이트'도 "입맛에 잘 맞지 않았어도 영화을 보는 동안엔 재밌었던 영화"였던 것엔 큰 차이가 없었다. 아주 맘에 들진 않았어도 영화 내내 지루하지 않았고 시간 낭비를 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면 성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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