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8월 9일 화요일

제임스 본드가 우주로 나간 '007 문레이커'를 극장에서 보다!

지난 7월부터 미국 메릴랜드 주 실버 스프링에 위치한 영화관 AFI 실버(Silver)에서 6070년대 클래식 제임스 본드 영화들을 상영하고 있다. 4년 전엔 007 시리즈 50주년 기념으로 클래식 제임스 본드 영화들을 상영했던 AFI 실버가 2016년 여름엔 얼마 전 세상을 떠난 007 시리즈 프로덕션 디자이너, 켄 애덤(Ken Adam)을 기억하는 의미에서 애덤의 클래식 대표작들을 상영하고 있다. 007 시리즈가 아닌 영화들도 상영하고 있으나 켄 애덤의 대표작 중 상당수가 클래식 007 시리즈이다 보니 워싱턴 D.C 거주 본드팬들에겐 클래식 007 시리즈를 빅 스크린으로 다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됐다.

AFI 실버의 클래식 제임스 본드 시리즈 상영의 하이라이트는 '문레이커(Moonraker)'였다.

'문레이커'는 4년 전 007 시리즈 50주년 기념 당시 AFI 실버에서 상영되지 않았던 영화다. 지난 2012년, AFI는 로저 무어(Roger Moore) 주연의 영화 중에선 '나를 사랑한 스파이(The Spy Who Loved Me)' 달랑 한 편만 상영하는 데 그쳤었다. 그러나 금년엔 '나를 사랑한 스파이'와 '문레이커' 두 편을 상영했다.

1979년작 '문레이커'는 켄 애덤이 프로덕션 디자인을 맡은 마지막 제임스 본드 영화다.

덕분에 '007 문레이커'를 극장에서 처음으로 볼 기회를 잡았다.




사실 여차했으면 '007 문레이커'가 내가 극장에서 처음 본 제임스 본드 영화가 될 뻔 했다. 그러나 벽에 붙은 포스터만 보는 데 그쳤다. 극장에서 볼 수도 있었으나 별로 끌리지 않았다. '문레이커'가 개봉했을 당시만 해도 007 시리즈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고, "007"과 "제임스 본드" 를 어디서 줏어들어본 정도가 전부였다.

뿐만 아니라, 우주복을 입은 제임스 본드의 모습도 영 내키지 않았다. 공상과학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제임스 본드가 우주복을 입고 포즈를 취한 '문레이커' 포스터를 보고 영화를 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문레이커'는 제임스 본드를 우주로 내보낸 유일한 제임스 본드 영화다. 숀 코네리(Sean Connery) 주연의 1967년 영화 '두 번 산다(You Only Live Twice)'에서 본드가 우주로 나갈 뻔 하다 그쳤으나 1979년 영화 '문레이커'에서 드디어 우주로 나가고야 말았다.

'문레이커'는 본드가 우주에 나간 정도가 아니라 여러 대의 스페이스 셔틀이 도킹 가능한 우주기지/우주정거장, 광선총이 등장하는 등 전통적인 007 시리즈의 세계에서 너무 벗어난 영화로도 꼽힌다. 스파이 픽션 쟝르의 범주에서 벗어나 공상과학 영화 쪽에 더 가까워졌다는 비판도 받았다.

그래서 일까? 구글의 상영시간 페이지를 보니 '문레이커'의 쟝르가 '액션/어드벤쳐' 뿐 아니라 '공상과학/판타지'라고 돼있었다. 007 시리즈에 실용화되지 않은 장치들이 종종 등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문레이커' 만큼 영화의 쟝르가 SF/판타지로 분류될 정도로 정체가 크게 혼란스러운 제임스 본드 영화는 없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문레이커'는 본드팬들로부터 최악의 제임스 본드 영화로 종종 꼽히곤 한다. '문레이커'는 가장 흥행에 성공한 제임스 본드 영화 중 하나임과 동시에 최악의 제임스 본드 영화 중 하나로 꼽히는 영화다. '스타 워즈(Star Wars)'의 인기에 자극받은 007 제작진이 제임스 본드를 우주로 내보내며 '스타 워즈' 흉내를 낸 덕분에 흥행에 성공하긴 했으나, 007 시리즈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면서 제임스 본드 영화가 아닌 SF 영화처럼 만들어 놓으며 본드팬들을 실망시켰다. 이것 저것 따지지 않고 가볍게 시간을 보내기에 좋은 오락영화로써는 과히 나쁘지 않은 영화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본드팬들은 영화 제작진이 제임스 본드를 우주로 내보내 광선총을 쏘게 만들었다는 점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영화 '문레이커'는 내가 이언 플레밍(Ian Fleming)의 원작소설을 읽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80년대 중반 쯤 홈 비디오로 '문레이커'를 보고 나서 "50년대에 출간된 동명 원작소설을 기초로 한 영화라는데, 웬 광선총에 우주정거장이 나오나" 궁금증이 생겼던 것이다.

이 때부터 영화와 원작소설을 비교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 결과, 영화 '문레이커'가 원작소설과는 완전히 딴판인 내용의 영화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일각에선 "어떻게 영화를 원작소설과 100% 똑같게 만들 수 있냐"고 한다. 얼핏 듣기엔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상식 선에서 "100% 싱크로"를 요구하는 사람은 없다. "원작을 얼마나 충실하게 영화로 옮겼나"를 따지는 사람들은 봤어도 "100% 싱크로"를 요구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그렇다. 핵심은 "얼마나"이다.

'문레이커'의 경우는 원작소설을 "느슨하게" 참고했다고 하기도 힘들다. 악당의 이름을 제외한 나머지에선 원작소설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완전히 딴판이다. 원작소설은 우주와 전혀 관련 없으며, 악당이 꾸미는 음모도 "인류멸망"과 전혀 무관하다. 소설 '문레이커'는 나치 잔당이 미사일을 이용해 영국을 파괴하려는 테러 음모에 관한 내용이다. 그러므로 우주기지에서 발사한 독개스로 지구상의 인류를 모두 말살시키려 한다는 영화판의 황당한 줄거리와 완전히 다르다. 뿐만 아니라 로케이션도 소설과 완전히 다르며, 리딩 본드걸/여주인공의 이름도 다르다. 강철이빨을 한 거구의 헨치맨, 죠스(리처드 킬)가 소설에 나오지 않는 건 두 말 할 필요도 없다.

과거에도 007 시리즈가 원작소설을 "느슨하게" 영화로 옮긴 적은 있었다. 1967년작 '두 번 산다'와 1971년작 '다이아몬드는 영원히(Diamonds are Forever)'는 로케이션과 등장 캐릭터 이름을 제외한 나머지는 원작과 완전히 다른 내용이었다. 비록 플롯은 원작소설과 완전히 달랐지만 로케이션과 등장 캐릭터 이름 정도는 원작과 일치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로저 무어 시대엔 "느슨함"이 더욱 심해졌다. 제목만 빼고 나머지는 원작소설과 완전히 다른 영화가 나오기 시작했다. 1977년작 '나를 사랑한 스파이(The Spy Who Loved Me)'와 1985년작 '뷰투어킬(A View to a Kill)'은 제목을 제외하곤 원작소설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영화들이다.

'문레이커'는 소설에 등장했던 악당(휴고 드랙스)을 영화에도 등장시켰으므로, 제목만 따온 게 전부인 007 시리즈보단 원작소설과의 싱크로율이 그나마 높은 편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본드가 광선총을 들고 우주로 나간다는 007 시리즈의 세계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황당한 플롯이 '문레이커'를 말아먹었다.

로저 무어의 1977년 영화 '나를 사랑한 스파이'도 터무니 없는 플롯이란 점에선 '문레이커'보다 크게 나을 바 없어도 "로저 무어의 스타일을 잘 살린 제임스 본드 영화"라는 평을 받았다. 1979년작 '문레이커'는 '나를 사랑한 스파이'의 탬플릿으로 한 번 더 울궈먹은 영화다. 큰 스케일, 코믹북 스타일의 악당과 헨치맨, 여러 가지 가젯들을 사용하는 액션 씬 등으로 가득한 제임스 본드 영화를 한 번 더 만든 것이다.'나를 사랑한 스파이'를 연출했던 영화감독(루이스 길버트)과 스크린라이터(크리스토퍼 우드)도 '문레이커'로 돌아왔다. 여기까진 싫든 좋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영화의 무대를 우주로 옮기는 무리수를 두면서 "더이상 007 시리즈로 보이지 않는다"는 비판을 초래했다.

그렇다고 전혀 볼 게 없는 영화는 아니다. 베니스에서 벌어진 곤돌라 추격 씬, 브라질 리오의 케이블 카 격투 씬, 아마존 정글에서 벌어지는 보트 체이스 씬 등은 볼 만했다.

그러나 '문레이커'는 장점보다 단점이 많은 영화다. 리딩 본드걸, 홀리 굳헤드 역을 맡은 미국 여배우 로이스 차일스(Lois Chiles)는 존재감이 없는 실망스러운 본드걸 중 하나로 꼽힌다. 악당 휴고 드랙스 역을 연기한 프랑스 배우 마이클 론스데일(Michael Lonsdale) 역시도 사악함이나 위협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따분하고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줬다. 007 시리즈의 가장 유명한 헨치맨 중 하나로 꼽히는 죠스로 출연했던 리처드 킬(Richard Kiel)도 실망스럽긴 마찬가지였다. '나를 사랑한 스파이'에 이어 '문레이커'에서도 같은 역으로 출연했으나 전작에서 보여줬던 것을 한 번 더 울궈먹은 것으로 보였을 뿐이었다.

이렇듯 '문레이커'는 내가 좋아하는 제임스 본드 영화가 절대로 아니다. 가벼운 오락영화로써는 여전히 괜찮은 편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잘 만든 제임스 본드 영화는 절대 아니다. 가벼운 오락영화를 찾는 일반 영화관객들은 '문레이커'를 보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겠지만, 007 시리즈다운 엔터테인먼트를 원하는 본드팬들은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힘든 제임스 본드 영화 중 하나다.

그런데도 영화관에서 빅 스크린으로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를 마다할 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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