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24일 토요일

007 시리즈 섹시즘 문제 '본드걸' 비중 축소밖에 개선 방법 더 없다

영국 영화감독, 대니 보일(Danny Boyle)이 버라이어티데드라인의 보도대로 새로운 '본드25'의 스크린플레이를 준비 중인 것이 사실로 밝혀졌다. 그러나 대니 보일의 '본드25' 연출이 확정된 것은 아닌 듯 하다. 현재로썬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만, 007 제작진이 대니 보일의 스크립트를 선택하지 않으면 성사되지 않을 수도 있다. 아직 공식 발표도 없었다.

그런데 최근에 대니 보일이 흥미로운 말을 했다. 보일은 얼마 전 가진 인터뷰에서 "#MeToo", "Time's Up" 시대가 반영된 '본드걸' 캐릭터를 '본드25'에 등장시킬 생각이라고 말했다.

최근 들어서 "#MeToo", "Time's Up" 등을 통해서 여성 문제가 주목을 받고 있는데다, 007 시리즈가 전통적으로 "페미니즘"과는 상극인 영화 시리즈만큼 대니 보일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이 간다.

대니 보일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다. 듣기에는 옳게 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원론적인 공감을 얻기 위한 말이었다면 별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실제로 보일이 '본드걸' 캐릭터에 손을 댈 생각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유는 간단하다. 007 시리즈의 "섹시즘" 문제를 개선할 방법이 더이상 많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007 제작진은 지난 1995년부터 2012년까지 본드의 상관, M을 여성으로 바꿨다. 영국 여배우, 주디 덴치(Judy Dench)가 1995년작 '골든아이(GoldenEye)'부터 2012년작 '스카이폴(Skyfall)'까지 7편의 007 시리즈에 M으로 출연했다.

(참고: 2015년작 '스펙터(SPECTRE)'에도 덴치가 M으로 잠깐 등장하는 씬이 있지만, 이전에 녹화한 비디오에 등장한 것이 전부이므로 제외시켰다)

이언 플레밍(Ian Fleming)의 원작 소설부터 시작해서 60년대부터 80년대에 공개된 영화 시리즈 모두 M은 항상 남성이었다. 007 시리즈 1탄부터 14탄까지 빠지지 않고 미스 머니페니로 출연했던 캐나다 여배우, 로이스 맥스웰(Lois Maxwell)은 머니페니를 그만둘 때 M을 원했다고 말했으나 성사되지 않았다. 80년대에만 해도 여성 M에 부정적인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90년대에 들어서 주디 덴치가 M을 맡으면서 한계를 넘어섰다.

007 제작진이 "POLITICAL CORRECTNESS"의 영향을 크게 받기 시작한 90년대에는 여성 M 뿐만 아니라 '본드걸' 이미지도 달라졌다. 본드에 매달리며 교태를 부리던 전통적인 '본드걸' 이미지에서 벗어나 과학자, 컴퓨터 전문가, 여전사 타잎의 특수요원 등으로 변모해갔다."섹시미" 하나를 빼면 볼 게 거의 없었던 '본드걸'에서 탈피해 90년대부턴 외모 뿐 아니라 명석한 두뇌와 강인한 성격까지 두루 갖춘 '본드걸' 쪽으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본드걸'이 "섹스어필 장식용"이라는 비판을 들어왔던 만큼 이 역시도 "POLITICAL CORRECTNESS"를 의식한 007 제작진의 의도된 변화 주기였다.

다니엘 크레이그(Daniel Craig) 시대에 와서는 제임스 본드의 플레이보이 이미지를 누그러뜨렸다. 대부분의 전통적인 '본드걸'들은 "그저 스쳐지나가는 인연"일 뿐이었다. 그러나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에 와서는 본드와 보다 깊고 진지한 관계로 발전하는 '본드걸'들이 자주 눈에 띈다. '카지로 로얄(Casino Royale)'의 베스퍼 린드와 '스펙터'의 매들린 스완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베스퍼 린드와 매들린 스완 모두 "성공한 커리어 우먼"임과 동시에 "본드와 진지한 관계로 발전하는 본드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성공한 커리어 우먼" 타잎 본드걸은 과거 007 시리즈에도 종종 등장한 바 있으나 "본드와 진지한 관계로 발전하는 본드걸"은 1969년작 '여왕폐하의 007(On Her Majesty's Secret Service)'의 트레이시가 유일할 정도로 매우 드물다. 따라서 다니엘 크레이그가 출연한 4편의 제임스 본드 영화 중 2편에 그러한 '본드걸'이 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까지 007 제작진은 본드의 상관을 여성으로 바꿔봤고, '본드걸' 이미지를 "성공한 커리어 우먼"으로 개선시켰으며, 본드와 '본드걸'과의 관계도 과거보다 진지해지도록 만들었다.

이미 변화를 줄 만큼 줬다는 것이다.

007 시리즈 내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다 했다고 본다.

그런데 여기서 무엇을 더 할 수 있겠는지 현실적으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수퍼히어로 저리가라 할 만한 여전사 타잎 '본드걸'도 이미 이전에 본 캐릭터이고, 의사, 과학자, 컴퓨터 전문가 등 "성공한 커리어 우먼" 타잎 '본드걸'도 새로울 것이 없다. 본드의 "플레이보이 이미지"를 누그러뜨고 본드와 진지한 관계로 발전하는 '본드걸'을 등장시키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007 시리즈는 본드의 러브 라이프에 초점을 맞춘 로맨틱 드라마가 아니라서 매번 본드가 '본드걸'과 진지한 관계로 발전하도록 설정할 수 없다. 본드의 "플레이보이 이미지"를 되도록이면 지우고자 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본드걸'과 진지한 관계를 갖도록 설정하는 방법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해볼 수 있는 건 이미 거의 다 시도해봤는데도 계속해서 "섹시즘" 이슈에 집착하면서 의도가 빤히 들여다보이는 "이것저것들"을 눈에 바로 띄는 장소에 배치해봤자 되레 우스꽝스러워지기만 할 수 있다. 007 시리즈가 "남성 판타지"라서 다소 부적절하게 보일 수 있는 장면이 간간히 나온다는 사실을 어지간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데, 굳이 이러한 007 시리즈에서 "#MeToo" 이슈를 건드리려 한다는 자체가 우스꽝스럽게 비쳐질 수도 있다. 물론 좌파-리버럴 언론들은 영화가 개봉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문제의 "#MeToo" 장면만 콕 집어서 부각시키며 "대니 보일이 007 시리즈를 바꿔놨다"고 극찬할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박수"를 받고 싶어서 낯 간지럽게 "#MeToo" 이슈를 건드린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도 시도해 보겠다면 어떤 방법이 더 남아있을까?

더 남아있는 옵션이 많지 않다고 본다. 따라서 다음 단계는 '본드걸'의 비중을 축소하는 것밖에 없다. 현재 007 시리즈 '본드걸'은 주연급의 "리딩 본드걸", 조연급의 "서포팅 본드걸", 대사가 없는 "마이너 본드걸"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본드걸'이 '섹시즘 비판'으로 문제가 되고 있으므로 "리딩 본드걸"을 없애고 모든 '본드걸' 전체를 "서포팅 본드걸" 또는 "마이너 본드걸"로 바꾸는 방법이 있다. 이렇게 하면 본드가 여러 용무를 보며 이동하는 과정에서 마주치는 마이너 캐릭터로 '본드걸'의 역할 축소가 가능하다. 물론 "본드걸 역할이 줄어든 007 시리즈"를 상상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본드걸'과 007 시리즈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돼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007 시리즈에 "의미있는 여성 캐릭터"가 반드시 등장해야 하는 건 아니다. 2012년작 '스카이폴'도 뚜렷한 "리딩 본드걸"이 없는 제임스 본드 영화로 꼽힌다.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가면 '본드걸' 전체를 마이너급 캐릭터로 설정 가능할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본드걸 역할 축소"에 반대하는 본드팬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 본드걸로 캐스팅되나"에 대한 관심 자체가 과거 시절에 비해 많이 약해졌다. 본드팬 입장에선 '본드걸'이 부실하면 영화가 허전해 보일 수 있지만, 이러한 "변화"에 익숙해지면 별 문제 없을 것이다.

그 다음에 할 일은 007 시리즈에 거의 매번 등장하는 "러브씬"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다. "매 영화마다 본드가 적어도 2명 이상의 본드걸과 러브씬을 갖는 것이 이상적인 세팅"이라고 주장하는 본드팬들을 흔히 찾아볼 수 있고, 007 시리즈를 분석하면서 매 영화마다 본드가 "자빠뜨린" 본드걸의 수까지 카운트해서 기록하는 본드팬들도 있으므로 "007 시리즈에서 러브씬을 완전히 없앤다"고 하면 펄쩍 뛸 본드팬들도 여럿 있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젠 "모든 제임스 본드 영화에 "러브씬"이 반드시 나와야 한다"는 수십년 묵은 룰에서 벗어나야 한다. 007 시리즈에 "러브씬"이 빠지기 어려운 이유는 "플레이보이 기질이 다분한 "행운남" 제임스 본드가 섹시한 미녀와 마주칠 때마다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는 "남성 판타지"적 요소를 계속 남겨놓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는 007 제작진도 마찬가지다. 그들도 마찬가지니까 거의 모든 007 시리즈에 "러브씬"을 집어넣은 것이다. 그러나 007 시리즈의 "섹시즘" 문제를 확실하게 바로잡으려면 "러브씬"을 포함한 로맨틱한 씬을 전부 없애야 한다. '본드걸'과는 미션과 관련된 대화만 주고받도록 하고 그 이상으로 관계가 발전하지 않도록 쐐기를 박아버려야 한다.

"리딩 본드걸"의 역할과 비중이 줄어들고 "러브씬"까지 없어지면 007 시리즈가 너무 삭막해질 수 있다. 007 시리즈의 최대 볼거리에 "본드걸"과 "러브씬"이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데, 둘 다 사라지면 우리가 알던 007 시리즈처럼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무더기 본드걸"을 다시 등장시키는 방법이 있다. "무더기 본드걸"이란 수영장 씬, 파티 씬 등에 단체로 등장하는 대사 없는 "마이너 본드걸"들을 의미한다. "무더기 본드걸"은 90년대 이후로 007 시리즈에서 자취를 감췄다. 이들을 다시 등장시켜야 한다. "리딩 본드걸"의 역할이 줄고 본드가 "섹스리스"가 된 대신 "무더기 본드걸"로 빈 공간을 메꾸며 볼거리를 제공하면 된다. 물론 "무더기 본드걸"도 논란이 생길 수 있긴 하지만, "무더기 본드걸"은 화려한 옷을 입고 대사 없이 지나가는 "패션 모델"에 가까우므로 별다른 문제 없이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이 정도의 씬은 다른 헐리우드 영화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므로 007 시리즈가 아무리 차별 대우를 받는다 해도 이 정도의 "눈요깃감"으로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정도로 양이 차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남자들에게 성추행, 성차별 당했다는 이유로 앙심을 품고 전세계 모든 남성을 말살시키겠다는 여성 빌런(Villain)을 등장시킬 차례가 될 듯.

댓글 7개 :

  1. 그럼 본드라는 이름만 달고, 알맹이는 본드 영화가 아닌 본드 영화가 나오겠군요. 그 시절(60’s) 본드스타일 영화는 이제 만들고 싶어도 못만들겠네요. 좌파-리버럴 입김에 놀아나는 영화치고 괜찮은 영화가 없습니다. 항상 입만 살아있는 겉무늬만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political correctness 한국에서는 패션 좌파라고 불리는 입만 살아있는 그 사람들이 문제지요. 영화판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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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미 그렇게 됐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갈수록 맛이 순해지더니 이젠 양주인지 소주인지 분간하기 어렵게 됐거든요.
      그래도 양이 안 차서 MeToo까지 들먹이면 어떤 본드 영화를 만들겠단건지 모르겠습니다.
      겉만 뻔지르한 소리로 공감얻기, 박수받기 즐기는 가식적인 놀이는 좀 적당히 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지나치면 거꾸로 해가 될 수 있다는 걸 자꾸 잊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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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마지막 아이디어는 60년대 의 조카 본드 (우디 앨런) 마저 생각나게 만드는군요.
    더 나아가서는 같은 가족용 첩보 판타지 속 악역처럼 보이는 결과물이 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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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 카지노 로얄
      2. 캣츠&독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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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패로디, 애니메에나 나옴직한 광적이면서도 진지하게 보기 어려운 악역이 나올 수 있습니다.
      나를 사랑한 스파이의 스트롬버그, 문레이커의 드랙스도 촌수가 멀지 않습니다.
      스트롬버그와 드랙스가 007 시리즈에 등장한 대표적인 코믹북 스타일 악역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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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스트롬버그&드랙스는 연기자분들이 진지하게 연기해주셔서 캐릭터로서 멋져보이기라도 하죠. 007 속 #MeToo 빌러네스라니- 역할 흔쾌히 맡은 여배우 있어봐야 돈 벌려는 목적으로 수락해서 골든 라스베리 급 연기를 보여준다던지 (e.g. < 오, 인천 >의 로런스 올리비에 경, < 던전&드래건 > 제러미 아이언스), 그보다도 먼저 대본 받는 족족 바닥에 내던질 그림이 그려지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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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현실적으론 성차별하는 억만장자-백인-남성-노인 악당이 등장할 가능성이 더 높겠죠.
      하지만 남성 혐오를 동기로 테러를 계획한다는 설정은 여전히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녀가 악당이 된 이유에 #MeToo를 끼워넣는 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스카이폴의 실바, 스펙터의 블로펠드 모두 과거 때문에 악당이 된 케이스죠.
      이런 캐릭터에 #MeToo와 문레이커 플롯을 접목시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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