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공개된 제임스 본드 영화 '문레이커(Moonraker)'의 줄거리가 한심하다는 건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얘기다. 억만장자가 비밀 리에 건설한 우주 정거장에서 지구로 발사한 유독개스로 전 인류를 몰살시키려 한다는 플롯은 어린이용 공상과학 만화책에나 나옴직한 스토리다.
70년대말 '스타 워즈(Star Wars)'의 인기가 대단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러나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007 시리즈에 저런 플롯을 사용한 건 문제가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007 시리즈에 "진지하게 볼 수 없는 영화"라는 레이블이 붙게 된 가장 큰 이유도 저런 문제 때문이었다.
007 제작진은 다니엘 크레이그(Daniel Craig) 시대가 열리면서 007 시리즈를 "진지하게 볼 수 있는 영화"로 변화를 주고자 했다. "웃기는 영화" 딱지를 떼어내려 했던 것이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방법", 즉 "어떻게 하느냐"에 있었다.
크레이그의 첫 번째 영화 '카지노 로얄(Casino Royale)'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 영화 '콴텀 오브 솔래스(Quantum of Solace)'부터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무거운 분위기는 그럴싸 했으나 그게 전부였다.
세 번째 영화 '스카이폴(Skyfall)'에서는 완전히 주저앉았다. '스카이폴'의 제임스 본드는 이언 플레밍(Ian Fleming) 원작소설의 제임스 본드도 아니었고, 007 영화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 또한 아니었으며, 21세기 MI6 오피서의 모습 역시도 아니었다. 제임스 본드를 주인공으로 한 스파이 스릴러를 만들려면 저 셋 중에 하나에는 해당되어야 정상이지만, 엉뚱하게도 '스카이폴'의 제임스 본드는 '다크 나이트 워너비(The Dark Knight Wannabe)'였다. '다크 나이트' 트릴로지의 "톤"만 빌려와서 007 시리즈에 붙여놓은 게 전부였다. 007 시리즈의 가장 큰 문제가 플롯에 있는데, 이 문제를 확실하게 해결하지 않고 톤으로 눈가림만 하고 넘어가려 했던 것이다. 단지 이것만으로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허점 투성이의 플롯을 극복하면서 영화를 "진지하게" 볼 수 없었다. 1979년작 '문레이커'는 진지하게 볼 만한 영화가 아니라는 사실을 까놓고 숨기지 않았으므로 싫든좋든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스카이폴'은 분위기는 힘껏 잡았으나 엉성한 플롯이 분위기를 말아먹으면서 '문레이커'보다 더욱 유치해 보이는 제임스 본드 영화가 돼버렸다. 까놓고 유치한 영화보다 겉으로는 진지한 척 하면서 유치한 영화가 더욱 우스꽝스럽고 유치해 보이기 때문이다.
네 번째 영화 '스펙터(SPECTRE)'는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 007 시리즈 전체를 하나로 연결시키면서 잡탕이 돼버렸다.
제임스 본드 시리즈 팟캐스트를 진행하는 존 레인(John Rain)도 BBC와의 인터뷰에서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 007 시리즈의 여러 문제점들을 지적했다.
존 레인의 기대처럼 대니 보일이 007 시리즈에 "Breath of Fresh Air"를 가져올 수 있을지는 두고볼 일인 듯 하다. 무엇 때문에 007 시리즈에 "Breath of Fresh Air"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는 충분히 이해가 되고도 남지만, 다니엘 크레이그의 마지막 제임스 본드 영화를 맡은 대니 보일에 많은 걸 기대하기 어려워 보이기 때문이다. 무언가 색다를 수는 있지만, 그것이 007 시리즈에 적합한 변화일지 아닐지는 현재로서는 예측하기 어렵다.
그러나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 007 시리즈의 문제점 지적에는 틀린 말이 없다.
전세계 상당수의 "본드팬"들이 이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다. 불만 표출 수위에 차이가 있을 뿐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 007 시리즈의 불만스러운 부분에는 거의 차이가 없다.
007 제작진은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에 와서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진지한 영화로 변화를 주고자 했으나 그 기회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진지한 "척" 하는 데서 그쳤을 뿐 진지한 제임스 본드 영화를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제이슨 본(Jason Bourne) 시리즈, '다크 나이트' 트릴로지 등을 허겁지겁 베끼기만 했을 뿐 제임스 본드의 세계에 맞춰 소화시키는 데서 실패했다.
1989년작 '라이센스 투 킬(Licence to Kill)'을 예로 들어보자.
'라이센스 투 킬'은 사실적인 첩보 세계를 제임스 본드의 세계와 비교적 성공적으로 접목시킨 대표적인 영화로 꼽을 만하다. 사실적인 첩보 세계를 끌어들이기 위해 제임스 본드가 정보부의 복귀 명령을 어기고 독자적으로 행동한다는 파격적인 설정을 했으나, "그래도 여전히 007 시리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특수장비 담당 Q(데스몬드 류웰린)의 비중을 대폭 늘리며 밸런스를 맞췄다. 독자 행동을 하는 본드를 볼 땐 007 시리즈를 보는 것인지 의심스럽다가도 Q가 여러 특수장비를 가지고 등장하면 "그래도 여전히 007 시리즈"라는 사실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본드(티모시 달튼)가 마약 카르텔 두목 산체스(로버트 다비)의 신뢰를 얻어 그의 조직에 침투한다는 설정은 첩보소설로 유명한 영국 작가 존 르 카레(John Le Carre)의 1993년 소설 '나잇 매니저(The Night Manager)'와 겹쳐지는 부분이다. '나잇 매니저'를 읽으면서 1989년 제임스 본드 영화 '라이센스 투 킬'을 떠올린 "본드팬"들도 꽤 있을 것이다.
알 만한 사람들은 알겠지만, 존 르 카레 소설을 읽으면서 007 시리즈가 연상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서로 완전히 다른 스타일의 스파이물이기 때문이다. 존 르 카레의 소설은 첩보세계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들인 반면 007 시리즈는 남성 판타지 성격이 강한 액션 어드벤쳐다. 존 르 카레는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첩보 쟝르로 인정조차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존 르 카레의 '나잇 매니저'를 읽으면서 제임스 본드 영화 '라이센스 투 킬'이 떠올랐다면 '라이센스 투 킬'이 상당히 사실적인 첩보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적의 신뢰를 얻어 적의 조직에 침투한다"는 플롯은 스파이 쟝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설정이다. 이 정도는 제임스 본드의 세계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다. '라이센스 투 킬'에서처럼 본드를 직접 언더커버 에이전트로 침투시킬 수도 있고, 언더커버 에이전트를 관리하는 "핸들러" 역할을 맡길 수도 있다. 본드가 "핸들러" 역할을 맡을 경우 언더커버 에이전트를 "본드걸"로 설정하는 것도 가능하다.
007 시리즈를 "진지하게 볼 수 있는 영화"로 만들 생각이 진심으로 있었다면 저런 시도를 했어야 옳았다.
그러나 007 제작진은 별볼일 없는 "콴텀"이라는 조직, 우스꽝스러운 코믹북 빌런일 뿐 진지한 스파이 스릴러 빌런과는 거리가 먼 실바(하비에르 바뎀), 어릴 적 본드에 대한 시기심으로 삐뚤어진 속과 스케일 모두 작은 초라한 블로펠드(크리스토프 발츠) 등을 선보이는 데 그쳤다.
007 제작진은 진지하고 사실적인 제임스 본드 영화를 만드는 데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최신 유행하는 여러 가지를 잡탕으로 뒤섞어 겉으로만 번지르하게 보이도록 만든 게 전부다.
그러나 007 제작진이 다니엘 크레이그를 캐스팅했을 때 많은 본드팬들이 기대했던 건 이런 잡탕이 아니었다.
007 제작진은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진지한 영화로 만들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잡았으나 그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조금만 신경을 썼더라면 과거의 007 시리즈와 달리 사실적인 스타일의 스파이 스릴러이면서 돈벌이도 되는 액션-블록버스터를 충분히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최신 유행을 촌쓰러울 정도로 무조건 베끼고 모방하는 데만 급급한 바람에 "제이슨 본이 제임스 본드를 바꿔놓았다", "다크 나이트 트릴로지가 제임스 본드를 바꿔놓았다"는 굴욕적인 평을 듣게 됐다. 스파이 쟝르, 수퍼히어로 쟝르의 선구자인 제임스 본드 시리즈가 이제 와서 저런 평을 듣도록 만든 것엔 현재 007 제작진의 책임이 크다.
007 제작진은 텅빈 영화를 그럴듯하게 포장하기 위해 아카데미상을 받은 영화감독에게 잇따라 연출을 맡기고 있다.
한편, AMC와 BBC의 스파이 스릴러 미니시리즈 '나잇 매니저' 시즌 2 제작진은 영국의 스파이 스릴러 소설가 찰스 커밍(Charles Cumming)을 제작진에 합류시켰다. 찰스 커밍은 "21세기의 존 르 카레"라고도 불리는 젊은 스파이 스릴러 작가로, '트리니티 식스(The Trinity Six)', '포린 컨트리(A Foreign Country)' 등 여러 편의 스파이 소설을 발표했다. 찰스 커밍의 소설을 기초로 한 미니시리즈 등의 프로젝트 또한 진행 중인 것으로도 알려진 가운데 커밍은 존 르 카레의 소설을 기반으로 한 미니시리즈 '나잇 매니저' 시즌 2의 제작에도 참여하게 됐다.
존 르 카레가 1993년 발표한 '나잇 매니저'의 속편을 아직 발표하지 않은 관계로 AMC + BBC의 미니시리즈가 시즌 2로 이어질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출연진도 시즌 2 가능성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AMC + BBC가 '나잇 매니저' 시즌 2를 제작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으로 전해진 데 이어 찰스 커밍까지 제작진에 합류한 것으로 밝혀졌다. 존 르 카레의 원작소설 없이 시즌 2를 제작하는 대신 "21세기의 존 르 카레"라고 불리는 찰스 커밍을 제작진에 합류시킨 듯 하다.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은 영화감독만 따라다니는 007 제작진과 스파이 스릴러 쟝르를 잘 이해하고 있는 작가를 제작진에 합류시킨 AMC + BBC 둘 중 어느 쪽에 더 신뢰가 가는가?
70년대말 '스타 워즈(Star Wars)'의 인기가 대단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러나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007 시리즈에 저런 플롯을 사용한 건 문제가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007 시리즈에 "진지하게 볼 수 없는 영화"라는 레이블이 붙게 된 가장 큰 이유도 저런 문제 때문이었다.
007 제작진은 다니엘 크레이그(Daniel Craig) 시대가 열리면서 007 시리즈를 "진지하게 볼 수 있는 영화"로 변화를 주고자 했다. "웃기는 영화" 딱지를 떼어내려 했던 것이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방법", 즉 "어떻게 하느냐"에 있었다.
크레이그의 첫 번째 영화 '카지노 로얄(Casino Royale)'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 영화 '콴텀 오브 솔래스(Quantum of Solace)'부터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무거운 분위기는 그럴싸 했으나 그게 전부였다.
세 번째 영화 '스카이폴(Skyfall)'에서는 완전히 주저앉았다. '스카이폴'의 제임스 본드는 이언 플레밍(Ian Fleming) 원작소설의 제임스 본드도 아니었고, 007 영화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 또한 아니었으며, 21세기 MI6 오피서의 모습 역시도 아니었다. 제임스 본드를 주인공으로 한 스파이 스릴러를 만들려면 저 셋 중에 하나에는 해당되어야 정상이지만, 엉뚱하게도 '스카이폴'의 제임스 본드는 '다크 나이트 워너비(The Dark Knight Wannabe)'였다. '다크 나이트' 트릴로지의 "톤"만 빌려와서 007 시리즈에 붙여놓은 게 전부였다. 007 시리즈의 가장 큰 문제가 플롯에 있는데, 이 문제를 확실하게 해결하지 않고 톤으로 눈가림만 하고 넘어가려 했던 것이다. 단지 이것만으로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허점 투성이의 플롯을 극복하면서 영화를 "진지하게" 볼 수 없었다. 1979년작 '문레이커'는 진지하게 볼 만한 영화가 아니라는 사실을 까놓고 숨기지 않았으므로 싫든좋든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스카이폴'은 분위기는 힘껏 잡았으나 엉성한 플롯이 분위기를 말아먹으면서 '문레이커'보다 더욱 유치해 보이는 제임스 본드 영화가 돼버렸다. 까놓고 유치한 영화보다 겉으로는 진지한 척 하면서 유치한 영화가 더욱 우스꽝스럽고 유치해 보이기 때문이다.
네 번째 영화 '스펙터(SPECTRE)'는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 007 시리즈 전체를 하나로 연결시키면서 잡탕이 돼버렸다.
제임스 본드 시리즈 팟캐스트를 진행하는 존 레인(John Rain)도 BBC와의 인터뷰에서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 007 시리즈의 여러 문제점들을 지적했다.
"After three films that got "bogged down" in a family origins story arc that "just doesn't fit this world," John Rain, the host of Smersh Pod - a podcast celebrating all things Bond - hopes Boyle's appointment will bring a "breath of fresh air".
"I think if everybody involved with Bond was honest, they would admit that Spectre was a mistake," Rain says. "And the attempt at trying to stitch the plots of the last three films together was folly." - BBC
존 레인의 기대처럼 대니 보일이 007 시리즈에 "Breath of Fresh Air"를 가져올 수 있을지는 두고볼 일인 듯 하다. 무엇 때문에 007 시리즈에 "Breath of Fresh Air"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는 충분히 이해가 되고도 남지만, 다니엘 크레이그의 마지막 제임스 본드 영화를 맡은 대니 보일에 많은 걸 기대하기 어려워 보이기 때문이다. 무언가 색다를 수는 있지만, 그것이 007 시리즈에 적합한 변화일지 아닐지는 현재로서는 예측하기 어렵다.
그러나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 007 시리즈의 문제점 지적에는 틀린 말이 없다.
전세계 상당수의 "본드팬"들이 이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다. 불만 표출 수위에 차이가 있을 뿐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 007 시리즈의 불만스러운 부분에는 거의 차이가 없다.
007 제작진은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에 와서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진지한 영화로 변화를 주고자 했으나 그 기회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진지한 "척" 하는 데서 그쳤을 뿐 진지한 제임스 본드 영화를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제이슨 본(Jason Bourne) 시리즈, '다크 나이트' 트릴로지 등을 허겁지겁 베끼기만 했을 뿐 제임스 본드의 세계에 맞춰 소화시키는 데서 실패했다.
1989년작 '라이센스 투 킬(Licence to Kill)'을 예로 들어보자.
'라이센스 투 킬'은 사실적인 첩보 세계를 제임스 본드의 세계와 비교적 성공적으로 접목시킨 대표적인 영화로 꼽을 만하다. 사실적인 첩보 세계를 끌어들이기 위해 제임스 본드가 정보부의 복귀 명령을 어기고 독자적으로 행동한다는 파격적인 설정을 했으나, "그래도 여전히 007 시리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특수장비 담당 Q(데스몬드 류웰린)의 비중을 대폭 늘리며 밸런스를 맞췄다. 독자 행동을 하는 본드를 볼 땐 007 시리즈를 보는 것인지 의심스럽다가도 Q가 여러 특수장비를 가지고 등장하면 "그래도 여전히 007 시리즈"라는 사실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본드(티모시 달튼)가 마약 카르텔 두목 산체스(로버트 다비)의 신뢰를 얻어 그의 조직에 침투한다는 설정은 첩보소설로 유명한 영국 작가 존 르 카레(John Le Carre)의 1993년 소설 '나잇 매니저(The Night Manager)'와 겹쳐지는 부분이다. '나잇 매니저'를 읽으면서 1989년 제임스 본드 영화 '라이센스 투 킬'을 떠올린 "본드팬"들도 꽤 있을 것이다.
알 만한 사람들은 알겠지만, 존 르 카레 소설을 읽으면서 007 시리즈가 연상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서로 완전히 다른 스타일의 스파이물이기 때문이다. 존 르 카레의 소설은 첩보세계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들인 반면 007 시리즈는 남성 판타지 성격이 강한 액션 어드벤쳐다. 존 르 카레는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첩보 쟝르로 인정조차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존 르 카레의 '나잇 매니저'를 읽으면서 제임스 본드 영화 '라이센스 투 킬'이 떠올랐다면 '라이센스 투 킬'이 상당히 사실적인 첩보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적의 신뢰를 얻어 적의 조직에 침투한다"는 플롯은 스파이 쟝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설정이다. 이 정도는 제임스 본드의 세계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다. '라이센스 투 킬'에서처럼 본드를 직접 언더커버 에이전트로 침투시킬 수도 있고, 언더커버 에이전트를 관리하는 "핸들러" 역할을 맡길 수도 있다. 본드가 "핸들러" 역할을 맡을 경우 언더커버 에이전트를 "본드걸"로 설정하는 것도 가능하다.
007 시리즈를 "진지하게 볼 수 있는 영화"로 만들 생각이 진심으로 있었다면 저런 시도를 했어야 옳았다.
그러나 007 제작진은 별볼일 없는 "콴텀"이라는 조직, 우스꽝스러운 코믹북 빌런일 뿐 진지한 스파이 스릴러 빌런과는 거리가 먼 실바(하비에르 바뎀), 어릴 적 본드에 대한 시기심으로 삐뚤어진 속과 스케일 모두 작은 초라한 블로펠드(크리스토프 발츠) 등을 선보이는 데 그쳤다.
007 제작진은 진지하고 사실적인 제임스 본드 영화를 만드는 데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최신 유행하는 여러 가지를 잡탕으로 뒤섞어 겉으로만 번지르하게 보이도록 만든 게 전부다.
그러나 007 제작진이 다니엘 크레이그를 캐스팅했을 때 많은 본드팬들이 기대했던 건 이런 잡탕이 아니었다.
007 제작진은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진지한 영화로 만들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잡았으나 그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조금만 신경을 썼더라면 과거의 007 시리즈와 달리 사실적인 스타일의 스파이 스릴러이면서 돈벌이도 되는 액션-블록버스터를 충분히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최신 유행을 촌쓰러울 정도로 무조건 베끼고 모방하는 데만 급급한 바람에 "제이슨 본이 제임스 본드를 바꿔놓았다", "다크 나이트 트릴로지가 제임스 본드를 바꿔놓았다"는 굴욕적인 평을 듣게 됐다. 스파이 쟝르, 수퍼히어로 쟝르의 선구자인 제임스 본드 시리즈가 이제 와서 저런 평을 듣도록 만든 것엔 현재 007 제작진의 책임이 크다.
007 제작진은 텅빈 영화를 그럴듯하게 포장하기 위해 아카데미상을 받은 영화감독에게 잇따라 연출을 맡기고 있다.
한편, AMC와 BBC의 스파이 스릴러 미니시리즈 '나잇 매니저' 시즌 2 제작진은 영국의 스파이 스릴러 소설가 찰스 커밍(Charles Cumming)을 제작진에 합류시켰다. 찰스 커밍은 "21세기의 존 르 카레"라고도 불리는 젊은 스파이 스릴러 작가로, '트리니티 식스(The Trinity Six)', '포린 컨트리(A Foreign Country)' 등 여러 편의 스파이 소설을 발표했다. 찰스 커밍의 소설을 기초로 한 미니시리즈 등의 프로젝트 또한 진행 중인 것으로도 알려진 가운데 커밍은 존 르 카레의 소설을 기반으로 한 미니시리즈 '나잇 매니저' 시즌 2의 제작에도 참여하게 됐다.
존 르 카레가 1993년 발표한 '나잇 매니저'의 속편을 아직 발표하지 않은 관계로 AMC + BBC의 미니시리즈가 시즌 2로 이어질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출연진도 시즌 2 가능성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AMC + BBC가 '나잇 매니저' 시즌 2를 제작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으로 전해진 데 이어 찰스 커밍까지 제작진에 합류한 것으로 밝혀졌다. 존 르 카레의 원작소설 없이 시즌 2를 제작하는 대신 "21세기의 존 르 카레"라고 불리는 찰스 커밍을 제작진에 합류시킨 듯 하다.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은 영화감독만 따라다니는 007 제작진과 스파이 스릴러 쟝르를 잘 이해하고 있는 작가를 제작진에 합류시킨 AMC + BBC 둘 중 어느 쪽에 더 신뢰가 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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