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9월 27일 목요일

'이스턴 프로미스', 썰렁한 갱스터 영화

영국을 배경으로 한 갱스터 영화는 이상하게도 하나같이 와 닿지 않는다. 비디오게임도 영국 갱스터들이 나오면 맛이 나지 않는다. 미국 갱스터, 마피아, 야쿠자, 삼합회엔 익숙한데 영국의 갱스터라고 하면 그다지 그럴싸하게 들리지 않는다. '영국'과 '갱스터'라는 두 단어가 서로 잘 어울리지 않기 때문일지 모른다.

'이스턴 프로미스(Eastern Promises)'는 영국에서 활동하는 러시아 마피아의 이야기인만큼 엄밀하게 따지면 영국 갱스터 얘기는 아니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하지만, 영국 갱스터도 아니고 영국에서 활동하는 러시아 마피아 얘기라니까 왠지 모르게 더욱 어색하게 느껴진다.

'이스턴 프로미스'의 가장 큰 문제는 영국을 배경으로 하는 갱스터 영화를 억지로 만든 것처럼 보인다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영국은 갱스터로 유명한 곳이 아닌데도 어떻게서든 영국을 배경으로 하는 갱스터 영화를 만들어보려고 억지부린 것처럼 보인다. 중국엔 '무간도'가 있고 미국엔 '디파티드'가 있다면 영국엔 '이스턴 프로미스'가 있다는 식으로, 다시 말해 영국에도 갱스터 영화가 있다는 걸 보여주겠다는 의도로 만든 영화처럼 보인다는 것.

그렇다고, '무간도', '디파티드'에 견줄만한 영화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이스턴 프로미스'는 임신한 14세 러시아 소녀가 아이를 낳고 사망하자, 수술을 담당했던 Anna(나오미 와츠)가 사망한 소녀가 남긴 일기장을 번역하면서 영국내 러시아 마피아가 얽힌 사건이라는 것을 하나씩 밝혀낸다는 줄거리의 스릴러 영화다. 줄거리만 보면 '무간도', '디파티드'와 무관하게 보이지만 예상치 못한 곳에서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같은 갱스터 영화로써 전체적인 분위기만 약간 비슷할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그 이상으로 '디파티드'의 영향을 받은 영화였다. '이스턴 프로미스'는 영국내 러시아 마피아의 이야기에 '무간도', '디파티드'에서 빌려온 아이디어를 섞어놓은 'Vodka Departed, shaken not stirred'라는 맛없는 칵테일일 뿐이었다.



'반지의 제왕' 시리즈로 유명한 비고 모텐슨(Viggo Mortensen)은 러시아 마피아 보스의 아들, 키릴(Vincent Cassel)을 '모시는' 니콜라이라는 캐릭터로 나온다. 아무래도 비고 모텐슨이 러시아인 역할에 잘 어울린다는 것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영화 자체에 약간 부자연스러운 구석이 있어서인지 모텐슨이 연기한 니콜라이도 잘 와 닿지 않는다.

하지만, 이걸 극복하는 방법이 있었다.

바로, 성기노출!


(위 사진은 영화와 아무 상관없음. 성기노출만 빼고...)

유럽에선 성기노출씬에 익숙한 편이라지만 미국에선 아직 그 정도가 아니기 때문에 미국 배우들 사이에선 성기노출씬/Frontal Nude씬을 '유러피언 누드'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으로 알고있다. 이렇다보니 '이스턴 프로미스'가 개봉하기 전부터 가장 말이 많았던 게 비고 모텐슨의 성기노출씬이었다.

문제의 성기노출은 사우나에서 벌어지는 격투씬에서 나온다. 타월 한장 달랑 두르고 있는데 갑작스럽게 괴한들의 공격을 받는 씬이다. 비고 모텐슨은 성기노출을 하게 된 건 리얼리즘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걸치고 있는 것이라곤 타월 한장이 전부인 상황에 갑자기 공격을 당했을 때 현실적으로 누가 바지를 입을 생각을 하겠냐는 것.

물론,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죽이겠다고 덤벼드는 적에게 '타임아웃! 바지 입고 합시다!' 할 순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하지만, 사우나에 들어갔을 땐 허리에 감겨있던 타월이 격투가 벌어지기 직전엔 어깨 위로 이동한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이 잘 안된다. 같이 사우나를 하던 남자들은 다들 타월을 허리에 두르고 앉아있는데 왜 니콜라이(비고 모텐슨)만 타월을 풀어 어깨 위에 올려놓았을까?



니콜라이가 애초부터 타월을 두르지 않았거나 타월을 그대로 허리에 두른 상태에서 싸우기 시작했다면 '성기노출 하려고 일부러 타월을 풀고 대기중'이던 것처럼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타월을 허리에 두른 채 싸운다고 성기노출씬이 사라져야 하는 것도 아니다. 격렬한 맨손격투를 벌이다가 타월이 벗겨진다는 식으로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비고 모텐슨은 타월을 어깨에 두르고 대기중이었고, 격투가 벌어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알몸으로 싸우기 시작한다.

어찌보면, 별 것 아닌 성기노출 가지고 지나치게 왈가왈부 하는 것 자체가 웃긴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아직까지는 성기노출씬이 뉴스거리가 된다. 다른 것 다 볼 게 없더라도 '아무개의 성기노출씬이 나온다'고 하면 여기저기서 이에 대한 기사를 써댄다. 영화 자체보다 '성기노출'이 더욱 주목을 받는 것이다. 영화를 만든 사람들 쪽에선 겉으론 '왜 그런 것에만 신경을 쓰냐. 영화 전체를 봐달라'고 하겠지만 속으론 이것으로 마케팅 재미를 보고싶어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성기노출을 통한 '몽둥이 마케팅' 하나만 믿고있는지도 모른다. '아무개가 벗었다', '노출수위가 어쩌구' 하는 것들로 한몫 보려는 싸구려 영화들과 다를 게 없어 보일 수도 있다. '아무개가 성기노출한 영화'라는 것 하나만으로 재미를 보려는 영화로 비춰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오해를 받기 싫으면 억지로 성기노출씬을 넣은 것처럼 보이지 않으면 된다. 일부러 거기에 포인트를 둔 것처럼 보이지 않으면 크게 문제될 게 없다는 것. 그러나, '이스턴 프로미스'에서의 사우나 격투씬은 왠지 모르게 셋업된 것 같은 티가 난다. 이 정도면 자연스럽지 않냐고 할 수도 있지만 내가 볼 땐 여전히 의심스럽다.

그래도, 알몸으로 피튀기는 싸움을 한다는 것 자체는 그런대로 볼만하다. 아놀드 슈왈츠네거, 제임스 벨루시 주연의 '레드히트(Red Heat)'에서 슈왈츠네거가 사우나에서 싸우는 씬이 나왔으니 '사우나에서 싸운다'는 것 자체는 그다지 새로울 게 없는지 모르지만 '이스턴 프로미스'의 사우나 격투씬은 '레드 히트'의 것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격렬하다. '이스턴 프로미스'의 격투씬은 완벽하게 무장해제된 상태에서 사투를 벌인다는 처절함을 보여주고자 했고, 그것이 제대로 전해졌다고 본다. '타월 위치변동'은 여전히 신경 쓰이지만...



'이스턴 프로미스'는 얼핏보면 매우 심각한 갱스터 이야기인 것처럼 보이지만 계속 무언가를 따라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분위기가 잘 살아나지 않는다. 영국서 활동하는 러시아 갱스터 영화를 본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지만 새롭다는 느낌도 들지 않는다. 분위기는 그럴싸하지만 어디서 보던 것들을 엮어놓은 정도로 보일 뿐이며, 영화가 끝난 이후엔 시시하다는 생각만 든다. 영화가 약간 어정쩡하게 마무리 되는 것도 그렇고, 줄거리 자체가 잔뜩 깔아놓은 분위기에 비해 단조롭게 보이는 것도 신경 쓰인다.

'이스턴 프로미스'는 '대부', '굿 펠라스'와 같은 마피아 영화와 '무간도', '디파티드'에서 빌려온 아이디어를 섞어 그럴싸해 보이는 갱스터 영화를 만들어 보려고 한 것 같지만 뭔가 엉성해보인다. 다른 영국산 범죄영화들처럼 분위기만 잔뜩 잡다가 마는 그런 영화들 중 하나로 보일 뿐이다. 비고 모텐슨, 나오미 와츠 등 출연배우들은 화려하지만 극장용 영화로써는 어딘지 모르게 부족해보이는 데가 있어보이기도 한다. 영화가 약간 썰렁하고 허무해보이는 데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식사하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 것도 은근히 신경 쓰인다. '이스턴 프로미스'도 명색이 갱스터 스릴러인데 마치 TV 연속극을 보는 것처럼 지극히 일상적이면서도 평범한 장면들이 자주 나온다. '이스턴 프로미스'의 쟝르가 '드라마/스릴러'라지만 극장용 영화라면 식사하는 장면 등 분위기를 쳐지게 만드는 것은 추려냈어야 하지 않았나 한다. 식사 하면서 나누는 대화내용 중에 줄거리 전개상 꼭 알아둬야 하는 중요한 게 나온다면 모르지만 내 기억엔 그렇게 중요한 건 없었던 것 같은데 왜 편집하지 않았는지 의아스럽다. 줄거리 진행을 더디게 만들 뿐 아니라 영화를 따분하게 만드는 주범인데 말이다. 아무리 대사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지만 극장용 영화를 보면서 별 영양가 없는 얘기를 나누는 것까지 귀담아 들어줄 정도의 참을성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오후시간대 방영하는 TV 드라마라면 또 모르지만 극장용 영화가 이런 식이면 곤란하다고 본다.

그래도, 러시아 액센트가 강한 영어에 아예 러시아어로 대화하는 장면까지 나오는 걸 보면 러시아 마피아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려고 노력했다는 건 인정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배경이 영국이다', '러시아 마피아다'는 것 빼고 나면 다른 갱스터 영화들과 다를 게 없어보인다. 영국서 활동하는 러시아 갱스터 이야기라는 게 그다지 섹시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 까놓고 말해서, 남자 주인공이 성기노출을 한다는 것을 뺀 나머지는 다른 갱스터 영화에서 봤던 것들을 조각조각 붙여놓은 것처럼 보일 뿐이다.

'이스턴 프로미스'는 기대했던 만큼 재미있게 즐길만한 갱스터/스릴러 영화는 아니다. 갱스터 영화라면 뭐든 상관없다는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지만 내가 봤을 때 '이스턴 프로미스'는 따분한 영화 이상이 아니었다. 비고 모텐슨의 성기노출을 제외하고 관객들을 끌어모을만한 게 있는지 의심스러울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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