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9월 25일 화요일

리처드 버튼이 제임스 본드였다면?

영국 웨일즈 지역신문에 난 흥미로운 기사가 하나 눈에 띄었다.

제임스 본드 시리즈의 원작가, 이언 플레밍(Ian Fleming)이 1959년 리처드 버튼(Richard Burton: 1925~1984)에게 제임스 본드역을 제의했었다는 것.

플레밍은 자신의 제임스 본드 소설 '카지노 로얄(Casino Royale)'의 영화화 이야기가 나오자 제임스 본드역을 맡게 될 남자다우면서도 어둡고 우울한 데가 있는 배우를 찾아나섰고, 리처드 버튼이 여기에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했다는 것.

Fleming approached Burton when he entered talks to turn his 1953 novel Casino Royale into a film. He was looking for someone manly and virile, dark and brooding – and thought the great Welsh actor would fit the bill.

하지만, 리처드 버튼이 거절했다고 한다. 1959년 당시만 해도 제임스 본드 시리즈가 지금처럼 성공할 것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리처드 버튼의 친척들은 다니엘 크레이그(Daniel Craig) 주연의 '카지노 로얄(Casino Royale)'을 보면서 '만약 리처드 버튼이 제임스 본드를 연기했더라면 저랬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리처드 버튼이 제임스 본드를 연기했다면 다니엘 크레이그가 '카지노 로얄'에서 연기한 진지하면서도 터프한 제임스 본드와 비슷했을 것이란 얘기다.

“I saw Daniel Craig in Casino Royale the other day and I thought to myself: yes, that’s Richard. That’s very much how my uncle would have played the role.”

리처드 버튼의 친척들에 따르면 버튼이 007 시리즈의 성공을 보면서 본드역을 거절한 걸 속으로 후회했을지 모르지만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고 한다.

그 이후 리처드 버튼은 존 르 카레(John Le Carre) 원작의 첩보영화 'The Spy Who Came in from the Cold(1965)'에 출연했다. 이언 플레밍의 영국 스파이 대신 존 르 카레의 영국 스파이를 맡은 것.



만약 리처드 버튼이 제임스 본드였다면 어땠을까?

리처드 버튼이 이언 플레밍의 제의를 받아들여 제임스 본드역을 맡았다면?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주 훌륭했을 것 같다. 이언 플레밍 원작의 제임스 본드와 비슷한 데가 많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다보면 '제임스 본드는 어떻게 생겼을까' 라는 생각이 들고, 이를 머릿속에서 그려보게 된다. 이때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제임스 본드의 모습은 누구와 가장 닮았을까? 아무래도 007 영화에서 제임스 본드로 나왔던 배우들과 비교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중 누가 소설에서의 제임스 본드와 비슷한 데가 많은 것 같은지 한번 생각해보자.

이언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 소설을 읽으면서 로저 무어나 피어스 브로스난의 얼굴이 떠올랐다면 상상력이 지나치게 풍부하다고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왜냐면, 소설에서의 제임스 본드는 로저 무어와 피어스 브로스난이 영화에서 보여준 것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숀 코네리의 얼굴도 떠오르지 않는다. 숀 코네리가 영화 '골드핑거'에서 제임스 본드였지만 소설로 읽다보면 코네리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 '문레이커'를 소설로 읽으면서 로저 무어의 얼굴이 그려지지 않는 건 두말할 필요없는 얘기다. 플레밍의 소설을 읽으면서 머릿속에서 그려보는 제임스 본드의 모습은 이상하게도 007 영화 시리즈에서 제임스 본드로 유명했던 배우들과는 매치가 안된다.

원작소설에서의 제임스 본드는 사무적이고 무뚝뚝한 장교에 가깝다. 이언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 소설은 전부 냉전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초현실적인 스파이 스릴러는 아니기 때문에 존 르 카레의 소설과는 살짝 거리가 있다. 소련 SMERSH가 파놓은 함정에 빠진다는 내용의 'From Russia With Love'와 집시로 위장한 암살부대가 나오는 '뷰투어킬', 동독에서 서독으로 넘어오는 영국 스파이를 돕는다는 내용의 '리빙데이라이트'를 포함한 몇몇 Short Story들은 존 르 카레 스타일과 비슷해보인다. 하지만, 제임스 본드는 냉전시대 스파이보다는 '수사관'에 더욱 가까워 보이는 캐릭터로 자주 나왔다.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났으니 가서 조사해보라'고 현지에 파견되는 에이전트에 가깝다.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 소설을 읽어본 사람들은 본드에 가장 잘 어울리는 배우로 티모시 달튼을 꼽는다. 차갑고 거칠고 무뚝뚝하면서 진지한 티모시 달튼을 보면서 이언 플레밍 원작의 제임스 본드와 비슷한 데가 많다고 생각하는 것. 요즘엔 다니엘 크레이그가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를 연기하면서 티모시 달튼을 밀어내기 일보직전이다. 풍기는 이미지가 플레밍의 본드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리처드 버튼이 추가됐다. 이미 고인이고 거의 50년전 이야기일뿐만 아니라 단 1편의 제임스 본드 영화에도 출연하지 않았지만 '만약' 그 때 당시에 리처드 버튼이 제임스 본드였다면, 그가 'Dr. No', 'From Russia With Love'에 출연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내 생각엔 숀 코네리보다 제임스 본드에 잘 어울렸을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숀 코네리가 최고의 제임스 본드라고 하고, 나 역시도 여기에 동의하지만 리처드 버튼이 제임스 본드 리스트에 들어온다면 또다른 얘기다. 리처드 버튼이 제임스 본드역을 수락했다면 아마도 어마어마한 제임스 본드가 됐을 것이다.

21편의 007 영화중에서 플레밍의 원작에 가까운 영화는 한손에 꼽힐 정도에 불과한데 007 시리즈 초창기에 리처드 버튼이 '플레밍 버전 제임스 본드'를 확실하게 연기했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리처드 버튼이 시작부터 강인하고 진지한 제임스 본드를 보여줬다면 007 시리즈가 가젯과 본드걸, 본드카 위주로 변질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따지기 시작하면 상당히 많은 'IF'가 나올 것이다.

자꾸 리처드 버튼 버전 제임스 본드를 얘기하다보니 숀 코네리의 제임스 본드가 맘에 들지 않았다는 것처럼 보일까봐 걱정된다. 절대 그런 건 아니다. 하지만, 리처드 버튼 버전 제임스 본드를 볼 수 없었다는 게 왠지 모르게 아쉽다. 제임스 본드에 잘 어울렸을 것 같은데 적어도 1편이라도 리처드 버튼이 제임스 본드로 나온 영화가 있었다면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무래도 007 영화에 제임스 본드로 나온 배우들 중에 플레밍 원작의 제임스 본드에 가까워 보이는 배우가 드물기 때문이리라.

댓글 없음 :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