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9월 22일 토요일

'3:10 To Yuma', 서부영화 돌아오다!

서부영화라고 하면 한물 간 쟝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서부영화라고 하면 50년대 흑백영화가 떠오르기 때문에 '한물 간 쟝르'라고 하는 사람들이 이해 안되는 건 아니다.

그런데, 서부극이란 쟝르가 한물 간 것인지, 아니면 최근에 만들어진 서부극이 볼품 없었기 때문인지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최근에도 잘 만들어진 서부영화가 계속 나왔다면 서부영화 하면 50년대 흑백영화가 생각날 정도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서부영화를 죽인 건 한심한 서부영화 덕분이지 쟝르 자체가 죽은 건 절대 아니다. 서부영화는 여전히 건재한다. 그리고, 여전히 멋진 영화가 될 수 있다. 서부영화는 할아버지 시절에나 유행했던 쟝르가 아니라 21세기인 지금도 여전히 통할 수 있는 쟝르다.

이것을 '3:10 To Yuma'가 증명해 보였다.



1957년에 나왔던 서부영화를 50년만에 리메이크한 영화, '3:10 To Yuma'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댄 에반스(크리스챤 베일)가 체포된 갱단 두목 벤 웨이드(러셀 크로우)를 3시10분 출발하는 유마(Yuma)행 기차에 태우기 위해 기차역까지 데리고 간다는 게 전부다.

하지만, 기차역까지 가는 길이 순탄치만은 않다. 아파치의 공격까지 뚫어야 한다.

이 영화가 19세기말 미국 아리조나주를 배경으로 한 영화인데 설마 아파치 헬리콥터 AH-64로 생각한 사람들은 많지 않으리라.



그렇다고 '3:10 To Yuma'의 볼거리가 '기차역까지 가는 동안 벌어지는 액션'이 전부인 건 아니다. 이 영화의 참 맛은 빚 독촉에 시달리는 자신을 무능한 가장이라고 생각하는 댄 에반스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매너가 좋은 무법자 벤 웨이드라는 두 사나이가 풀어가는 줄거리다.

가족들을 굶기지 않기 위해 200불을 받기로 하고 범죄자 벤 웨이드(러셀 크로우)를 기차역까지 호송하는 위험한 일에 자원한 댄 에반스(크리스챤 베일)는 가족들로부터 존경받는 가장이 되는 게 목적이기 때문인지 잭 웨이드가 빚을 모두 갚아준다고 해도 꿈쩍하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잭 웨이드를 3시10분 출발하는 유마행 기차에 태우겠다는 것. 댄의 큰아들, 윌리엄이 몰래 이들 일행을 쫓아왔으니 아들이 보는 앞에서 범죄자와 타협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는지도 모른다.



잭 웨이드(러셀 크로우)는 죄수 신분이란 것도 잊은 듯 자신을 호송중인 사람들을 구해주기도 하는 괴짜다. 맘에 들지않는 녀석은 해치워버리지만 상당히 인간적인 친구다. 오죽했으면 댄의 큰아들, 윌리엄으로부터 '그다지 나쁘지 않은 것 같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다. 악명높은 무법자로써는 매우 스타일 구겨지는 소리일지 모르지만 잭 웨이드는 윌리엄이 표현대로 그다지 나쁘게 보이지 않는 친구다.

그렇다고 범죄자가 아니라는 건 아니다. 살인, 강도 등 잭과 그의 갱단이 벌인 범죄까지 덮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무법자인 것까진 맞지만 그렇다고 사악한 친구는 아닌 것처럼 보인다는 게 전부다.



서로 친해질 수 없을 것 같은 두 사나이가 사흘동안 함께 여행을 하면서 뚜렷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서로 친해지기 시작한다. 죄수를 기차역까지 에스코트하는 임무를 띈 사나이와 죄수로 끌려가는 신세인 사나이가 시간이 흐를수록 속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로 발전하는데 스크린에서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게 한다. 묘하게 얽힌 두 사나이의 이야기는 마지막 순간까지 한눈 팔 틈을 주지않는다.

서부극도 액션영화로 분류해야겠지만 '3:10 To Yuma'는 액션보다는 줄거리가 볼거리인 영화다. 액션씬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액션씬 자체보다 두 사나이의 이야기가 메인인 영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루하다는 생각이 절대 들지않는 영화다. 액션보다 줄거리가 더 중요하다면 액션영화가 아니라 드라마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대사 한마디, 장면 한 컷 놓치지 않고 꼼꼼히 보게 만들고, 마지막에 찌릿한 감동까지 전해지는데 이 이상 더 바랄 게 있는지 모르겠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주연으로 나온 '스파게티 웨스턴(Spaghetti Western)'에 익숙한 사람들에겐 서부영화도 액션이 우선인 것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클래식 웨스턴은 그렇지 않았다. 게리 쿠퍼 주연의 클래식 웨스턴 '하이눈(High Noon)'의 액션씬은 마지막 클라이맥스 배틀이 전부인 것만 봐도 그렇다. '3:10 To Yuma'는 '하이눈'처럼 액션이 없는 영화는 아니다. 시작부터 한바탕 갈기는데다 중간중간에도 심심하지 않을만큼 액션씬이 나온다. 하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처럼 액션 위주인 것은 아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스타일의 액션위주 '스파게티 웨스턴'을 기대했다면 실망할지 모르지만 '스파게티 웨스턴'은 서부영화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정통 서부영화 팬들에겐 만족스러울 것이다.



이런 영화를 보고 '남성 영화'라고 하는 것 같다. 대개의 경우 액션성이 높거나 갱스터 영화를 '남성 영화'라고 부르는데 '3:10 To Yuma' 역시 그 카테고리에 포함되는 영화다. 멋진 아버지, 멋진 남편이 되고자 하는 사나이, 이것을 이해해주는 '멋쟁이 무법자'의 이야기인데 이게 '남성 영화'가 아니면 무엇일까?

'남성 영화'라고 하면 심하게 터프한 척 하는 남자 주인공이 나오는 와일드한 영화일 것으로 생각한다. 어찌보면 서부영화야 말로 여기에 딱 해당되는 쟝르인지도 모른다. 테마까지 권선징악인 게 대부분인 서부영화야 말로 여러모로 완벽한 '남성 영화'일 것이다. 하지만, '3:10 To Yuma'는 과장된 터프가이들이 나오는 그런 '남성 영화'가 아니다. 댄 에반스와 잭 웨이드 모두 전형적인 '히어로(Hero)' 캐릭터와는 거리가 있다. 거친 액션씬이 볼거리인 영화도 아니다. 하지만 '만약 그녀가 내 아내였다면...'이라는 남자들끼리의 대화를 주고받는 두 사나이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하는 '남성 영화'다.

난 싱글이다. 와이프도 없고 당연히 애들도 없다. 아직까진 가장이 되고픈 생각도 없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으로써의 책임감과 자존심, 명예 같은 걸 생각해보게 됐다. 아들 앞에선 쪼다가 아닌 멋진 아버지로 보이고 싶고, 와이프 앞에선 가족을 굶기지 않는 능력있는 가장이자 멋진 남편으로 보이고 싶은 댄의 속마음이 느껴졌다. 초라한 자신을 숨기고 싶고, 가족들이 자랑스러워할 뭔가를 성취해 이것을 가족들에게 보여주고픈 '그런 것들'이 느껴졌다. 바로 이런 게 진정한 '남성 영화'가 아닐까?



'3:10 To Yuma'는 2007년 들어 현재까지 본 영화들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진한 감동과 여운이 한참동안 가시지 않는 그런 영화였다. 극장을 나서면서 '시간낭비 했다'거나 '그저 볼만했다'가 아니라 '안 봤으면 후회할 뻔 했다'는 생각이 든 영화였다. 금년에 본 영화 중에서 극장에서 다시 한번 보고싶다는 생각이 들도록 만든 처음이자 현재로써는 유일한 영화다.

기회가 오면 50년대 서부영화나 가끔 보는 정도였을 뿐 최근 만들어진 서부영화는 거진 보지 않았다. 일부러 찾아볼 정도가 아니던 것. 그런데, '3:10 To Yuma'를 본 이후부터 달라졌다. 새로 나오는 서부영화 중에도 제대로 된 영화가 나올 수 있다는 희망을 봤고, 이와 동시에 클래식 서부영화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57년작 '3:10 To Yuma'도 아직 못봤으니 이걸 포함해 클래식 웨스턴 여러 편을 찾아볼 생각이다.

역시 가장 쿨한 쟝르는 서부영화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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