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25일 일요일

'스카이폴' - 리딩 본드걸은 없고 머니페니가 본드걸?

007 시리즈의 대표적인 볼거리 중 하나는 본드걸이다. 50년 전 007 시리즈 1탄 '닥터 노(Dr. No)'에서 우슐라 안드레스(Ursula Andress)가 흰색 비키니 차림으로 자메이카 해변에 나타난 이후 지금까지 007 시리즈에 본드걸이 빠진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지금까지 제작된 모든 007 시리즈에 여주인공 격인 리딩 본드걸과 조연급인 서포팅 본드걸이 빠짐없이 등장했다.

그런데 007 시리즈 23탄 '스카이폴(Skyfall)'은 약간 달랐다.

물론 '스카이폴'에도 본드걸이 있긴 있다. 캄보디아-프랑스 혼혈 베레니스 말로히(Berenice Marlohe), 영국 여배우 나오미 해리스(Naomie Harris)를 대표로 꼽을 수 있다.

문제는 누가 리딩 본드걸이고 누가 서포팅 본드걸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는 것.

'스카이폴' 트레일러를 본 사람들은 베레니스 말로히가 연기한 시버린이 리딩 본드걸인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딱 그렇게 보이게끔 트레일러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외로 시버린은 역할과 비중 모두가 낮은 서포팅 본드걸이었다. 다니엘 크레이그(Daniel Craig)와 함께 하이네켄 맥주 광고에 출연하는 등 영락없는 리딩 본드걸처럼 보였지만 허무하게도 뚜껑을 열어보니 아니었다. 영화의 마지막까지 본드와 함께 하는 리딩 본드걸인 줄 알았지만 베레니스 말로히의 출연 시간은 의외로 짧았다. 어딘가 미스테리하고 강렬해 보이는 베레니스 말로히가 상당히 훌륭한 리딩 본드걸이 될 것 같다는 기대를 모았으나 그 기대는 바로 허무와 실망으로 바뀌었다.

나오미 해리스가 연기한 이브는 더 고약하다. 관객들을 유치한 방법으로 속이기 위해 준비한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007 제작진이 어떠한 방법으로 관객들에게 새로운 '서프라이즈'를 제공하려 하는지 어느 정도 꿰뚫어 보는 본드팬이라면 나오미 해리스의 본드걸 캐스팅 루머가 나왔을 때 '제작진이 어떤 역할을 맡기려고 해리스를 캐스팅하려는 것일까'를 분명히 생각해봤을 것이다. 그러므로 해리스가 머니페니 역을 맡을 것 같다는 건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었던 퍼즐이다. 그러나 해리스는 영국 신문 데일리 메일 등이 머니페니 루머를 보도하기 시작하자 이를 극구 부인하면서 "내가 맡은 역은 여자판 본드와 같은 캐릭터다. 머니페니 루머가 도대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다"고 오리발을 내밀었다. 심지어 영화감독 샘 멘데스(Sam Mendes) 마저도 해리스가 머니페니 역을 맡았다는 사실을 마치 엄청난 극비사항인 양 다뤘다.

Really? C'mon man!!

이런 식으로 하니까 007 제작진이 유치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뻔하게 보이는 걸 뭘 그렇게 필사적으로 숨기려 하냔 말이다. 비밀 같지도 않은 것을 가지고 애들 데리고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007 제작진이 즐겨 사용하는 방식과 패턴을 파악하고 있는 본드팬들이 많다는 사실을 전혀 모를 정도로 맹한 사람들도 아닐텐데 말이다.

나오미 해리스가 연기한 본드걸 캐릭터, 이브가 '여자판 007'로 보이는 필드 에이전트였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007 제작진은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나오미 해리스가 총을 들고 있는 스틸을 여러 장 공개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머니페니가 아니다"라는 소리였다.

그러나 "필드 에이전트였던 이브가 나중에 머니페니가 되는 게 아니냐"는 추측이 바로 나왔다. '이브'가 머니페니의 이름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혼란이 있었지만, "이브가 실제 이름이 아니라 코드네임일 수도 있다"는 의견도 나온 바 있다.

그렇다. '이브의 퍼즐'은 영화가 개봉하기 훨씬 전에 이미 풀린 상태였다. 007 제작진만 이를 극비 취급하면서 완강하게 오리발을 내밀었을 뿐 알 만한 사람들은 다들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007 제작진이 최근 들어 참신한 변화와 새로운 서프라이즈 등을 준비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수준이 이것밖에 되지 않는지 한심할 뿐이다. 그러니까 이럴 바엔 예전에 하던 대로 하는 게 차라리 더 나을 것 같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이다.

나오미 해리스의 이브가 더욱 눈쌀을 찌푸리게 만든 이유는 총을 들고 설치는 필드 에이전트 본드걸이었기 때문이다. 바바라 브로콜리(Barbara Broccoli)가 007 프로듀서를 맡은 이후 변한 것 중 하나는 본드걸이 대단히 터프해졌다는 점이다. 과거의 '본드걸 = 섹스토이' 이미지를 벗고 현대 여성상에 걸맞는 강인한 본드걸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여기까지는 잘못된 것이 없다. 하지만 문제는 왜 자꾸 여전사형 필드 에이전트를 고집하냐는 것이다. 총을 들고 설치는 '액션걸' 타잎이 아니더라도 강한 이미지의 본드걸 캐릭터를 충분히 만들 수 있는데 007 제작진은 여전사형을 계속 고집하고 있다. 007 시리즈는 제임스 본드를 중심으로 한 영화이고 대부분의 액션은 본드의 몫이어야 정상인데, 007 제작진은 어떻게서든 여기에 여전사형 본드걸을 끼워넣으려 한다. 1997년작 '투모로 네버 다이스(Tomorrow Never Dies)'의 양자경까지는 싫든 좋은 이해할 수 있었다고 쳐도 2002년작 '다이 어나더 데이(Die Another Day)'의 할리 베리(Halle Berry)는 한마디로 최악이었으며, '콴텀 오브 솔래스(Quantum of Solace)'의 올가 쿠릴렌코(Olga Kurylenko) 역시 그녀만의 매력을 제대로 발산하지 못하고 핸드건을 들고 설치는 유치한 여전사 시늉을 내다가 끝났다. 강한 본드걸을 표현하려다 매력을 다 날려버린 것이다.

나오미 해리스의 이브도 마찬가지였다. '스카이폴' 프리 타이틀 씬에서 이브가 M과 긴박한 목소리로 교신을 하며 나름 터프하게 자동차의 앞유리를 깨는 씬에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긴장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어린이 시간대에 방영하는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다급한 듯 "째째째째" 거리는 이브의 목소리가 애니메이션 성우를 연상케 했던 것이다. '스카이폴'의 프리 타이틀 씬은 나오미 해리스의 터프한 척 하는 어색한 연기 때문에 빛이 많이 바랬다.


물론 제작진은 머니페니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드라마틱하게 소개하려던 것이 목적이었을 것이다. 머니페니에게 필드 에이전트 경력을 붙여준 것도 - 여전히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 과히 나쁜 아이디어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브/머니페니의 비중이 비정상적으로 커지면서 베레니스 말로히의 시버린과 함께 리딩 본드걸 역할을 절반씩 나눠가진 셈이 됐다.

머니페니가 리딩 본드걸의 절반을 차지했다고?

그렇다. 상당히 코믹하게 들리지만 '스카이폴'에선 사정이 그렇게 됐다.

물론 이것 또한 007 제작진의 '잔머리'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전통적으로 머니페니는 본드걸로 분류하지 않는데, 007 제작진이 '스카이폴'에서 이를 바꿔놨기 때문이다. 아마도 007 제작진은 이것 또한 '신세대(?) 제임스 본드 시리즈에서 달라진 주요 차이점'으로 자랑스럽게 이용하려 했던 것 같다. "이것 봐라. 007 제작진이라고 매번 과거의 007 시리즈를 재탕 반복할 줄만 아는 게 아니다. 우리도 머리 쥐어짜면 재밌는 아이디어 나온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말이다.

그러나 별로 쓸데 없는 것을 지지고 볶은 것으로 보일 뿐 그다지 참신하고 재미있는 아이디어로 보이지 않는다. 007 제작진이 무언가 새로운 변화를 주려고 노력하는 것은 아주 아주 아주 잘 알겠는데,  이런 건 좀 웃길 뿐이다. 현시대에 어울리는 그럴싸한 스파이 스토리를 준비할 생각은 하지 않고 왜 이런 장난만 치고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진짜 풀어야 할 숙제는 안 하고 쓸데없는 것들로 생색만 내려는 것으로 보일 뿐이다.

스토리상 어쩔 수 없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가운데 손가락 욕을 면키 어렵다. 왜냐, '스카이폴'의 거의 모든 문제가 스토리에서부터 시작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엉뚱한 스토리가 '스카이폴'을 제임스 본드  영화가 아닌 코믹북 수퍼히어로 영화로 만들어 놓았고, 악당 역시 배트맨 시리즈의 조커와 같은 코믹북 수퍼히어로 캐릭터를 만들어 놓았으며, 리딩 본드걸이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엉뚱하게도 머니페니의 '총 쏘던 시절' 이야기나 보고 앉아있어야 했느니 말이다.

(에이전트 리스트와 관련된 줄거리는 '미션 임파서블' 1탄과 비슷하다는 건 뭐 생략하기로 하겠다.)

이러니까 "요새 007 시리즈를 왜 이렇게 만드냐"는 소리를 면치 못하는 것이다. 뭔가 변화를 보여주려 노력하는 건 알겠는데, 그 결과가 이것 저것 남의 것을 모방하면서 007 시리즈의 정체성을 까먹고 있는 게 전부이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은 박스오피스에서 짭짤한 재미를 볼 수 있을 지 몰라도, 007 시리즈가 정체성을 잃고 이것저것 모방하는 사이에 다른 경쟁 프랜챠이스들이 007 시리즈가 해야 할 것을 먼저 다 가져갈 지 모른다. 그 때 가서 '제임스 본드 007'이라는 이름 하나만 달랑 남았을 때엔 무엇으로 관객들을 끌어모을 생각인지 궁금할 뿐이다.

아무튼 '스카이폴'의 본드걸이 007 시리즈 최악이 아니었나 한다. 캐스팅은 나쁘지 않았지만 캐릭터가 영 아니었다. '스카이폴'의 본드걸이라고 하면 트레일러에 속고 오리발 내밀기에 당한 기억밖에 없으니 말 다했다. 다만 아시안과 백인 혼혈인 베레니스 말로히와 영국 흑인배우인 나오미 해리스에 본드걸을 맡기면서 UN 스타일로 백인, 흑인, 아시안 관객들을 조금씩 모두 만족시키는 데는 성공했는지도...

댓글 3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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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확실히 스카이폴에서의 본드걸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더라구요. 솔직한 맘은, 아니 이 영화에서 본드걸이 있긴 했었나? 란 느끼에 가깝지만요 ㅋㅋㅋㅋ

    본드님의 블로그에 간만에 들어왔는데, 스카이폴 비판이 상당히 많네요.
    저는 007 시리즈의 팬도 아니고, 명절때 티비에서 해주는 것 이외에는 제대로 관심을 가지고 본 것은 카지노 로열부터라고 할 수 있는, 그냥 영화팬입니다.
    카지노 로열은 영화 자체로도 탁월한 수작이었다고 생각해요. 퀀텀 오브 솔러스는 좀 실망이었구요. 그리고 스카이폴은, 전혀 다른 결의 영화로 나왔더라구요. 좀 놀랐습니다.

    앞선 두 작품과 비교해서 액션이 강하지도 않았으며, 본드걸도 약했고, 악역은 다소 존재감이 약해보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본 007영화중에선 제일 무게감이 있어보인다는 느낌은 받았습니다. 해서, 007팬들에게 환영받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건 아니었네요.

    코믹북 슈퍼 히어로물, 특히 다크나이트의 냄새가 어느정도 풍긴다는 것도 동감합니다. 그렇지만, 다크나이트는 슈퍼히어로물로도, 헐리웃 영화로도, 심지어 영화사적으로도 훌륭한 걸작이 아니던가요(!)

    007영화는 진화를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진화의 방향성이 어떤 이이게는 환영받고, 어떤 이에게는 실망을 안겨주고 있는 것같네요. 분명한 것은 이 방향성이 끊길 뻔한 007의 목숨을 이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저는 환영하는 입장입니다. 앞으로도 더 다양한 시도들과 방향들이 이 007이라는 이름아래서 좋은 '영화'로서 나오길 바라는 입장이라고 할까요. 열혈 007팬이신(!) 오공본드님의 입장이랑은 좀 다르겠지만 말이에요!

    역시 제 생각이랑은 좀 다르지만, 제가 정말 좋아하는 영화평론가의 스카이폴 관람비평을 링크합니다! 이젠 더 자주 들릴게요!

    http://blog.naver.com/lifeisntcool?Redirect=Log&logNo=130150289442&from=post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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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오랜만에 오셨군요...^^
    사실 새로운 007 시리즈는 카지노 로얄 때부터 제이슨 본 시리즈를 모방했다는 소리를 들었죠.
    심지어 스티븐 스필버그와 조지 루카스까지 까놓고 "본이 본드를 바꿔놨다"고 말할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전 그때만 해도 카지노 로얄을 옹호했습니다. 그런 영화가 나올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거든요.
    2002년 다이 어나더 데이를 본 직후 이젠 스타일을 바꿔야 한다고 한 적도 있거든요.
    그런데 콴텀 오브 솔래스부터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죠...^^
    까놓고 콴텀은 제이슨 본 시리즈를 따라했고 이번 스카이폴은 다크 나이트를 따라했고...
    그럼 제임스 본드는 어디로 간 걸까요?
    끊길 뻔한 007의 목숨을 이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말씀엔 저도 동감합니다.
    하지만 제 생각엔 이건 좀 지나친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분들은 전통 007 시리즈를 강조하면 자꾸 바보스럽고 느끼한 스타일을 먼저 떠올리는데,
    그런 걸 걷어내고도 여전히 007 영화답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전 생각합니다.
    제가 콴텀 오브 솔래스와 스카이폴에 연달아 실망한 이유는, 그 요령을 엉뚱한 데서 찾는 것 같아서 입니다.
    일부러 007 영화답지 않게 만들려 노력할 필요까진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007 영화답지 않게 보이는 007 영화는 아무리 흥행성공했다 해도 007 영화로 보기 힘들죠.
    만약 007 영화를 007영화처럼 보이지 않도록 만들어야만 버틸 수 있다면 끝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건 제임스 본드 007이란 주인공 이름과 넘버를 빼곤 007영화가 아닌 셈이 되니까요.
    전 이런 게 맘에 들지 않습니다. 아마 여기서 의견이 많이 갈리는 것 같습니다...^^
    저와 같은 경우엔 변화도 좋지만 지킬 건 지켜야 007 간판 달고 광고할 수 있다는 생각이구요,
    다른 분들은 전통 스타일은 중요하지 않고 재미있고 완성도만 높으면 성공한 것이라는 것이고...
    저도 카지노 로얄 때만 해도 변화를 환영했는데 지금은 제가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듯 합니다.
    하지만 영화 만드는 게 돈 벌자고 하는 짓이므로 앞으로 가든 뒤로 가든 흥행성공했으면 된거죠 뭐... ^^

    아, 이 사이에 킥오프를 했군요...^^
    왠지 금년 시즌에도 NFC 동부에선 10승 달성 못한 팀이 플레이오프에 올라갈 것 같습니다.
    왠지 꼬락서니들이 다들 하나같이...^^
    머지 않아 NFC 동부에선 워싱턴 레드스킨스가 최강팀이 될 것 같습니다.
    RG3 역시 물건인 듯 하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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