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9월 28일 금요일

'킹덤', 어색한 테러의 총합

테러와의 전쟁, 이란, 이라크 문제 등 그쪽 동네 이야기를 듣기 싫어도 강제로 듣다시피 하고있는 미국인들에겐 중동문제만큼 친숙한 게 없다. 게다가, 자폭테러, 매복공격, 납치, 참수, 비디오 촬영 등 와일드한 것들은 죄다 모여있다. 여기에 이런 것들을 청소할 '영웅'만 보태면 곧바로 그럴싸한 액션영화가 완성된다.

역시, 중동문제는 섹시한 영화소잿감이다.

기왕에 중동 테러문제를 소재로 영화를 만드는 김에 실제 발생했던 테러사건까지 갖다 붙여 더욱 리얼하게 만드는 것도 과히 나쁜 아이디어는 아니다.

'킹덤(The Kingdom)'이 딱 여기에 해당되는 영화다.



사우디 아라비아의 역사를 간추린 다큐멘타리식으로 거창하게 시작하는 '킹덤'은 얼마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실제로 발생했던 리야드 자폭 테러사건을 소재로 한다. 하지만, 사우디에서 테러사건이 터졌고, 이를 수사하기 위해 미국서 FBI 에이전트 4명이 출발했고, 현지서 만난 사우디 수사관들과 함께 범인을 추적한다는 게 전부인 영화다. 처음에는 거창하게 보이지만 실제론 아주 뻔한 내용인 것.

잔뜩 분위기를 잡으며 시작한 '킹덤'은 계속해서 '힘'을 풀지 않는다. 알고보면 단순한 줄거리의 영화지만 무지하게 폼을 잡아가며 역사적이고 정치적이고 사실적인 영화인 것처럼 보이도록 포장한다. 워싱턴 D.C가 나오고, 사우디 왕자들이 나오고, 뭔가 복잡미묘한 외교적인 이것 저것들이 꼬여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열심히 노력한 게 보인다.

그런데, 열심히 노력한 사람들한텐 미안한 얘기지만 장식용으로 갖다놓은 것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폼잡기' 다음으로 나오는 건 '뻔할 뻔자'다.

사우디에서 테러사건이 발생했다, FBI 4명이 출발했다, 그런데 사우디에선 미국 수사관들이 오는 걸 달갑지 않아한다는 것 정도는 중동문제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예측할 수 있을만한 얘기다.

달갑지 않은 FBI 에이전트들이 도착하자 사우디측에서 까다롭게 굴며 FBI 에이전트들과 크고 작은 충돌을 빚는다는 것도 새로울 게 없다.

미국과 사우디 수사관들이 함께 수사를 진행하면서 서로 친해진다는 것 역시 생전 처음 보는 설정인 것도 아니다.



유머도 어디서 보던 것들이다.

'킹덤'에 나오는 유머는 미국인과 사우디인 사이의 언어와 문화 차이에서 오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미국인이 외국에서 외국인들과 협력하는 영화'에서 항상 나오던 그런 것들이 전부라는 것. '킹덤'에서도 의사소통이 잘 안된다든지, 잘 나가다가 살짝 손발이 안맞는다든지 하는 미국인과 외국인 사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저 그런 것들로 웃기는 게 전부다.

그렇다고 웃기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예측했던 유머지만 그래도 몇몇은 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줄거리 전개방식부터 유머까지 새로울 게 없는 뻔할 뻔자라는 게 신경 쓰인다. 처음엔 뭔가 엄청난 게 들어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막상 포장을 하나씩 벗기기 시작하니까 '비슷비슷', '뻔할 뻔자'만 들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것들을 다 넘어서도 또다른 문제가 기다리고 있다.

모든 종류의 테러수법들을 모조리 영화에 넣으려고 한 것.

중동 테러리스트에 대한 영화인만큼 뉴스에서 보던 모든 테러수법들을 최대한 넣고 싶었을지 모르지만 앞뒤 분간 안하고 마구 집어넣은 것처럼 보이는 게 문제다. '저 상황에 저런 짓을 할 때냐'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약간 어처구니없게 보이는 부분도 눈에 띈다. 자폭공격, 매복공격, 납치, 참수, 비디오 촬영 등을 마치 '뽕짝 메들리'처럼 만들어놨으니 어색하게 보일 수밖에 없는 것.

테러리스트들이 실제로 사용하는 수법들이 나오는 건 사실이므로 '리얼리티가 떨어진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기회를 만났다는 듯이 달려들 필요는 없었다. 어지간한 사람들은 테러리스트들이 어떤 방법을 사용하는지 다 알고있는데 새삼스럽게 자폭공격, 매복공격 하는 것들을 줄줄이 보여줄 필요가 없었단 것이다.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겠지만 어거지를 쓰는 것으로 보일 정도로 무리해가며 테러수법들을 모두 보여주려고 할 필요는 없었다. '테러공격이 이렇구나' 하는 걸 실감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영화를 참 유치하게 만들었구나' 하는 게 느껴지면 문제있는 게 아닐까.



그래도, '킹덤'의 마지막 액션씬은 볼만하다. 어찌보면 이 영화에서 볼거리라곤 마지막 액션씬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수사과정은 기억에 남을만한 게 없지만 마지막 액션씬 하나는 볼만하다. 볼만하다고 해봤자 전쟁영화에서의 시가전 장면을 옮겨놓은 게 전부지만 이것 마저도 없었다면 '킹덤'은 볼 게 거진 없는 영화가 됐을 것이다.

테러사건 수사하다가 갑자기 '블랙 호크 다운' 같은 전쟁영화로 둔갑하다보니 살짝 어이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결국 보려주려 한 건 이것 아니냐는 생각이 든다.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이 영화의 테마에 딱 들어맞기 때문이다. 테러사건 수사만으론 테러리즘 퇴치에 불충분하게 보일테니 어떻게서든 한바탕 붙도록 만들 게 뻔했다. 아랍 테러리스트를 때려잡는 장면 없이 그냥 끝나면 섭섭하게 생각할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테니 말이다. 항상 인디언들이 적으로 나오고, 인디언 공격을 물리치는 카우보이가 '영웅'으로 나오던 옛 서부영화 스타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언제부터인가 미국영화에 아랍인들이 테러리스트로 자주 나오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아무 생각없이 아랍인들을 적으로 몰려는 게 아니냐는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서부영화에서 인디언을 무조건 적으로 묘사하면서 인디언에 대한 건 하나부터 열까지 요상하고 거부감이 들게끔 만들던 수법을 다시 사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랍인과 아메리칸 인디언이 피부색부터 비슷하고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와 의상이 눈에 띄는 것도 비슷한데다 '건조한 지역'을 배경으로 한다는 것까지 비슷하다보니 수십년 전 '웨스턴'에서 사용했던 수법을 '미들 이스턴'에서 다시 부활시키려는 것으로 보이기 딱 알맞다. 아랍인들을 적으로 하는 안티-미들 이스턴 트렌드가 계속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아랍인 전체가 무조건 나쁘게 묘사된 건 아니다. 사우디 군이 FBI 에이전트에게 도움을 주고, 나중엔 친구가 되는 것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아랍인 중에도 '친구'가 있다는 정도는 잊지않고 넣어둔 것. 하지만, 여전히 일방적인 영화로 보인다. 20세기엔 인디언을 무조건 적으로 몰았던 '웨스턴 영화'가 있었다면 21세기엔 아랍인들을 적으로 모는 '미들 이스턴 영화'라는 새로운 쟝르가 탄생한 걸로 보일 뿐.



'킹덤'은 잘 만들었다고 하기 힘든 영화다. 제이미 폭스와 제니퍼 가너 등 유명한 배우들이 출연한다지만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으며, 줄거리도 억지로 짜맞춘 것처럼 보일 뿐이다. 시작부터 엄청나게 분위기를 잡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느껴지는 게 없다. 그래도 마지막은 어떻게서든 감동적으로 장식하고 싶었는지 꽤 노력한 것처럼 보이지만 영화 내내 느껴지는 게 없을만큼 맹탕인 영화에서 무슨 감동을 기대할 수 있을까. 영화 속에선 무지하게 심각하지만 영화를 보는 입장에선 피식 웃음만 나올 뿐.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테러리스트를 추적하며 전투를 벌이는 액션영화로 만들었다면 차라리 나았을 것 같다. 액션이 전부인 영화는 아니라지만 결국엔 마지막 클라이맥스 액션씬 빼고는 볼 게 없는 영화가 됐는데, 이렇게 될바엔 차라리 100% 액션영화로 만드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것. 액션 이외로도 뭔가 묵직한 것이 있는 드라마+스릴러 영화인 것처럼 위장하려고 노력했지만 맘대로 되지 않은 것 같다.

그래도 기억에 남는 게 있다: '킹덤' TV 광고에서 흘러나왔던 Kanye West의 'Stronger'.

제이미 폭스의 2005년 영화 'Jarhead' 트레일러에도 Kanye West의 곡, 'Jesus Walks'를 사용하더니 '킹덤'에서도 또다시 Kanye West의 곡을 사용했다. 그 이유가 뭔지는 관심없으니까 생략하고 'Stronger' 뮤직비디오나 보면서 끝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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