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 3일 수요일

제임스 본드와 기억상실증

007 영화에서 본 제임스 본드는 천하무적의 불사조 스파이다. 작은 부상 하나 없이 임무를 완수하는 수퍼 에이전트에 가깝다. 하지만, 이건 영화에서의 모습일 뿐 원작소설에서의 제임스 본드는 많이 다르다. 심지어 기억상실에 빠지기까지 한다. 영화에선 '완벽맨'이지만 소설에선 기억상실에도 빠지고 세뇌까지 당한다.

잘 믿기지 않는다고?

이언 플레밍의 소설 '두번 산다(You Only Live Twice)'를 한번 훑어보기로 하자:

Bond's hands and feet were beginning to ache with the strain of holding on. Something hit him on the side of the head, the same side that was already sending out its throbbing message of pain. And that finished him.

[중략]

What was it all about? Bond didn't know or care. The pain in his head was his whole universe. Punctured by a bullet, the balloon was fast losing height. Below, the softly swelling sea offered a bed. Bond let go with hands and feet and plummented down towards peace, towards the rippling feathers of some childhood dream of softness and escape from pain.

[중략]

When Kissy put an arm round his shoulders, he turned vaguely towards her. 'Who are you? How did I get here? What is this place?' He examined her more carefully.

'You're very pretty.'

Kissy looked at him keenly. She said, and a sudden plan of great glory blazed across her mind, 'You cannot remember anything? You do not remember who you are and where you came from?' Bond passed a hand across his forehead, squeezed his eyes. 'Nothing,' he said wearily. 'Nothing except a man's face. I think he was dead. I think he was a bad man. What is your name? You must tell me everything.'

[중략]

'He will live,' he said, 'but it may be months, even years before he regains his memory. It is particularly the temporal lobe of his brain, where the memory is stored, that has been damaged. For this, much education will be necessary.


사진: 영화 '두번 산다'의 Kissy와 본드

트레이시(제임스 본드의 부인)를 살해한 블로펠드와 혈투를 벌인 본드가 머리를 다치면서 바다에 빠지고, 머리부상 덕분에 기억을 잃는다는 부분이다. 머리에서 피를 흘리는 채로 기모노를 벗으려고 버둥거리고 있는 본드를 구조하는 건 '본드걸' Kissy. 본드는 상처를 치료받긴 하지만 기억이 돌아오지 않는다.

자신의 이름이 제임스 본드라는 것도 기억 못하는 상태에서 러시아를 향해 떠나면서 소설 '두번 산다'는 끝나고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The Man with the Golden Gun)'로 이어진다. '두번 산다'에서 기억을 상실한 본드는 그 이후 KGB에게 세뇌당한 뒤 M을 암살하기위해 런던으로 돌아간다. M을 암살하는데 실패한 본드는 청산칼리를 먹고 자살기도까지 한다. 기억상실에서 회복되기까지 여러 가지로 '쇼'를 하는 것. 한참 병원신세를 진 본드는 스카라망가를 상대하러 출발한다.

원작에서의 제임스 본드는 슬픔과 분노, 고통을 느끼지만 영화에서의 제임스 본드는 언제나 느긋하고 여유만만한 전형적인 헐리우드 캐릭터다. 덕분에 007 영화에선 본드가 위험에 처하거나 맥없이 무너지는 걸 보기 힘들다. 기억상실, 세뇌 같은 게 007 영화에 나오지 않는 건 두 말할 필요도 없다. 007 영화가 제임스 본드를 패배를 모르는 수퍼 스파이로 변신시킨 것이다.

영화에선 기억상실에 빠진 제임스 본드를 볼 수 없었고 앞으로도 보기 힘들겠지만 그렇다고 원작소설의 내용까지 바뀌는 건 아니다. 제임스 본드가 기억상실에 빠졌다는 게 맘에 들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르지만 원작에 나오는 걸 없다고 할 순 없다. 모든 사람들이 이언 플레밍의 책을 읽지 않고 007 영화만 아는 사람들이라면 가능하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제임스 본드를 1차원적인 캐릭터로 굳힐 수 없는 이유다.

제임스 본드가 기억상실에 빠진 것까지는 사실이지만 전체 줄거리에서 기억상실증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작다. '두번 산다' 마지막에서 기억상실증에 빠지면서 끝나고, 기억상실 덕분에 KGB에 세뇌됐다면서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가 시작하는 게 전부일 뿐이다. 그러므로, '기억상실증에 빠진 제임스 본드가 조금씩 기억을 되찾는다'는 줄거리의 007 영화가 나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제임스 본드도 기억상실증에 빠질 수 있는 캐릭터이고, 실제로 소설 '두번 산다'에서 기억상실증에 빠지는 것으로 나오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억상실증을 테마로 하는 007 영화가 나오진 않을 것이란 얘기다.

하지만, 트레이시의 복수를 하는 것은 영화에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영화 '여왕폐하의 007'에서 본드의 아내, 트레이시가 블로펠드에게 살해당하는 것까지는 나오는데 본드에게 복수할 기회가 아직까지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설 '두번 산다'의 줄거리가 '사랑하는 여자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한다'는 것인데 영화에서도 복수할 기회를 줘야한다. 티모시 달튼의 영화 '라이센스 투 킬(1989)'에서 본드의 복수극이 나오긴 했지만 블로펠드에게 진 빚은 아직까지 갚지 못했다. 트레이시의 복수를 자꾸 미루다보니 제임스 본드는 사랑하는 여자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할 생각이 없는 줄 아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더라.

소설에선 분명히 복수를 했는데 영화에선 왜 자꾸 미루고 있을까? 영화에서의 제임스 본드는 트레이시의 죽음을 잊어버린 것일까? 이것도 일종의 '기억상실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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