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 17일 수요일

'In the Valley of Elah', 전쟁의 후유증

행크 디어필드(토미 리 존스)는 미국 육군 밀리터리 폴리스(MP)출신 퇴역 군인이다. 행크는 아들이 둘인데 큰아들은 10년전 전사했고 둘 째 아들 마이크는 현재 이라크에서 복무중이다.

아니, 복무중인줄 알고 있었다. 마이크가 소속된 육군부대에서 '아들이 사라졌다'는 전화가 걸려오기 전까지는...

마이크가 속했던 부대는 어느새 이라크를 떠나 미국 뉴 멕시코주에 있는 포트 루드(Fort Rudd)로 이동한 상태였다. 그러니, 마이크는 미국에 돌아와서 사라진 것. 행크는 실종된 아들을 찾기위해 테네시에서 뉴 멕시코까지 직접 트럭을 몰고 간다.

하지만, 마이크는 군부대 근처 수풀에서 불에 타고 토막난 채 발견된다. 칼에 40번 이상 찔리고 토막이 난 뒤 불에 탄 상태로 발견된 것.

아들의 시신이 발견되자 행크는 뉴 멕시코주 여형사 에밀리(샬리즈 테론)과 함께 범인 추적에 나선다.



얼핏보면 살인사건 미스테리처럼 보이지만 '인 더 밸리 오브 엘라(In the Valley of Elah)'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쟁터에서 돌아온 병사들이 겪는 PTSD(Post-Traumatic Stress Disorder)다. 전쟁터에서 받은 정신적인 충격에서 오는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병사들이 미국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살인사건 미스테리보다 더욱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인 더 밸리 오브 엘라'는 살인범을 추적하는 영화처럼 시작한다. 하지만, 전쟁터에서 돌아온 병사들이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는 '전쟁 후유증'에 시달리는 쪽으로 넘어가면서부터 살인사건은 뒷전으로 밀려난다. 범인이 누구인가, 살인동기가 무엇인가보다 전쟁이 병사들에게 미치는 영향쪽으로 쏠려버리는 것.

부상당한 포로의 상처에 손가락을 집어넣으며 '아프냐'면서 히히덕거리고, 불에 탄 시체에 스티커를 붙여놓고 장난칠 뿐만 아니라 민간인을 죽여도 꿈쩍하지 않을 정도로 폭력에 무감각해지고 부도덕한 행위에도 익숙해진 병사들의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다보니 '살인범이 누구냐'는 건 더이상 궁금할 게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전쟁터에서 이미 '전쟁 스트레스의 포로'가 돼버린 병사들이 미국으로 돌아왔다고 멀쩡해질 수 있을까? 대부분의 경우 성격이 포악해지거나 자살, 알콜 중독 등으로 이어진다. 성격이 포악해진 경우엔 부인을 죽인 살인자로 둔갑하기도 한다. 배틀필드에서의 기억과 스트레스가 멀쩡했던 사람을 파멸시킬 수도 있는 것.

'인 더 밸리 오브 엘라'의 줄거리는 살인사건 미스테리에서 전쟁 후유증으로 파멸의 길을 걷게 되는 병사들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행크가 MP 시절 경험을 살려 에밀리와 함께 직접 수사를 하면서 사건의 전모를 밝혀나가는 것은 그런대로 흥미진진하다. 하지만, 명탐정 저리가라일 정도로 보이는 건 약간 심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행크가 에밀리보다 더욱 훌륭한 수사관인 것처럼 보이다보니 아들을 잃은 아버지가 아니라 전문 수사관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아버지인 것까진 맞다고 해야겠지만 '유가족'이 아니라 '경감님'으로 보일 정도다.

덕분에 에밀리라는 캐릭터가 더욱 애매해졌다. 에밀리는 영화가 너무 삭막해지는 걸 막기 위해서 나온 게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캐릭터인만큼 어떻게 보면 이 역할 정도는 제대로 했는지 모른다. 에스콰이어의 'Sexiest Woman Alive'로 선정된 샬리즈 테론이 에밀리로 나왔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샬리즈 테론이 이런 영화에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는 것.

샬리즈 테론이 뉴 멕시코주 여형사역에 어울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토미 리 존스의 파워풀한 연기에 밀리면서 들러리 정도로 보일 뿐이다. 샬리즈 테론이 '여주인공'인 것은 사실이지만 에밀리가 여주인공으로 불릴만큼 무게가 느껴지는 캐릭터인지 의심스럽다. 살해당한 마이크의 어머니, 조앤(수잔 서랜든)이 집에 남고 행크(토미 리 존스) 혼자서 뉴 멕시코로 떠나는 바람에 마땅한 여주인공이 없다보니 대타로 나온 것처럼 보이는 게 전부다.



영화 자체도 미스테리/스릴러 영화로 따지면 볼거리가 많다고 하기 곤란하다. 살인사건 미스테리로 위장한 반전영화라고 해야 정확한만큼 살인사건 자체에 얽힌 미스테리보다 병사들이 겪는 전쟁 후유증에 촛점을 맞춘 덕분이다. 대부분의 미스테리 영화에선 사건을 수사하는 부분의 비중이 크겠지만 '인 더 밸리 오브 엘라'는 명탐정(?) 행크가 간단하게 미스테리를 풀어나가는 식으로 넘어가는 게 전부다. 그런데도 싱겁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이유는 전쟁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병사들의 이야기를 다뤘기 때문이다. 만약, 이 영화에서 전쟁 후유증이란 메인테마를 빼버린다면 남는 게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인 더 밸리 오브 엘라'는 메세지 전달이 우선이고 영화는 나중이라는 식으로 만든 것처럼 보이는 영화다.

하지만, '인 더 밸리 오브 엘라'가 2003년 조지아주에서 실제로 있었던 살인사건을 기초로 한 영화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등장인물의 이름과 장소 등 크고 작은 차이가 있지만 '인 더 밸리 오브 엘라'는 실화다. 이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게 하나도 없을 것이다. 범인이 누구인지도 알고 있을테니 궁금한 것도 많지 않을 것이다. 이렇다보니, 메세지 전달이 우선이고 영화는 나중인 것처럼 보이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보고나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메세지가 제대로 전달된 덕분이리라.

어쩌면, 나까지 토미 리 존스를 '아버지'로 받아들였기 때문일지도... 겉으로는 무뚝뚝한 군인이지만 속으로는 부성애로 가득한 토미 리 존스의 아버지 연기에 넉아웃 된 덕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병사들이 전쟁 후유증에 시달린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있냐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인 더 밸리 오브 엘라'보다 전쟁 후유증 문제를 제대로 다룬 영화들도 많다고도 한다.

모두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인 더 밸리 오브 엘라'가 전쟁 후유증을 다룬 유일한 영화는 아니기 때문이다. 전쟁 후유증을 다룬 영화는 월남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 중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U.S Department of Veterans Affairs에 의하면 월남전 참전병사 중 30%가 PTSD 증세를 보였다고 하니 월남전 참전병사들의 전쟁 후유증을 그린 영화가 많은 것이 이상할 게 없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월남전 다음으로 높은 게 이라크전이다. U.S Department of Veterans Affairs에 의하면 이라크전 참전병사 중 12~20%가 PTSD 증세를 보인다고 한다. 일부 미국언론은 '5명중 1명꼴'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일부 이라크 참전 미군들은 이라크전을 'Desert Nam'이라고 부른다고 하던데, 지금 보니 전쟁상황 뿐만 아니라 전쟁 스트레스 지수도 월남전과 비슷해지는 것 같다. 뒤집어 말하면, 이라크 전쟁 후유증을 다룬 영화들도 월남전 영화처럼 쏟아져나올 수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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