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1월 7일 수요일

카지노 로얄 vs 여왕폐하의 007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 데뷔작 '카지노 로얄'이 개봉한지 어느덧 1년이 지났다.

말도 참 많았다. 다니엘 크레이그가 제임스 본드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007 시리즈가 판타지 액션에서 벗어나 플레밍의 원작으로 돌아왔다고 '007 영화 답지 않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플레밍의 원작에 비교적 충실하게 영화화 했는데 '007 영화 답지 않다'고?

플레밍의 원작에 비교적 충실하게 영화화 했는데 '제임스 본드가 많이 달라졌다'고?

그렇다. '카지노 로얄'은 이런 잡음에 시달렸다. 본드팬들이 '카지노 로얄'에서 '여왕폐하의 007(On Her Majesty's Secret Service)'을 발견할 때 저런 주장을 하던 사람들은 제이슨 본 시리즈를 발견했다. '카지노 로얄' 이전에 나온 007 영화가 20편이나 있으니 이들과 우선 비교하는 게 순서인 것 같지만 제이슨 본 시리즈와 연결시겼다. '카지노 로얄'과 '여왕폐하의 007' 사이에 비슷한 곳이 여러 군데 있는데 이것은 건너 뛰고 제이슨 본 시리즈를 비교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액션이 사실적이다, 제임스 본드가 피를 흘린다, 가젯이 안나온다, 분위기가 진지하다는 이유를 들면서 '카지노 로얄'이 이전 007 시리즈와 다르다는 것만을 강조하려는 게 목표였으니 제이슨 본 시리즈와 비교하는 게 왔다였을 것이다.

하지만, '카지노 로얄'의 제대로 된 비교대상은 제이슨 본 시리즈가 아니라 '여왕폐하의 007'이다. '카지노 로얄 개봉 1주년 기념(?)'으로 본드팬들은 '카지노 로얄'에서 무엇을 봤는지 대충 훑어보기로 하자.

1. 아스톤 마틴 DBS

아스톤 마틴은 제임스 본드 시리즈와 떼어놓을 수 없는 자동차다. '골드핑거'에 나왔던 아스톤 마틴 DB5가 특수장치가 탑재된 첫 번째 '본드카'로 기록된 이후 아스톤 마틴 자동차는 '썬더볼', '여왕폐하의 007', '리빙데이라이트', '골든아이', '투모로 네버 다이스', 'The World is Not Enough', '다이 어나더 데이', '카지노 로얄'에 등장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여왕폐하의 007(1969)'에 나온 아스톤 마틴 DBS다.



아스톤 마틴 DBS는 '카지노 로얄(2006)'에도 나온다. 긴 세월차가 있는만큼 많이 달라졌지만 DBS라는 이름은 변함없다.



또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글러브박스에 총이 들어있다는 것.

'여왕폐하의 007'의 아스톤 마틴 DBS 글러브박스엔 라이플이 들어있다.



'카지노 로얄'의 아스톤 마틴 DBS 글러브박스엔 권총이 들어있다.

'여왕폐하의 007'과 '카지노 로얄'에 나온 아스톤 마틴은 둘 다 DBS인데다 글러브박스에 총이 들어있다는 공통점도 있다.



아래 사진은 CORGI의 다이캐스트 모델 아스톤 마틴 DBS.



2. 사표

'여왕폐하의 007'엔 이전 007 시리즈에서 볼 수 없었던 장면이 나온다.

제임스 본드가 사표를 쓰는 것!

제임스 본드가 사표를 쓰면 어쩌겠다는 거냐고?

007 시리즈는 또 어떻게 되는 거냐고?

본드가 사표를 쓰지 않았으니까 아직까지 시리즈가 이어지는 것 아니겠수?



그런데, 본드가 '카지노 로얄'에서 또 사표를 쓴다!

'여왕폐하의 007'에선 영화가 1969년작이보니 미스 머니페니에게 사직서를 써달라고 부탁하지만 2006년작 '카지노 로얄'에선 이메일로 사표를 쓴다. 좋게 얘기하면 세월차를 느낄 수 있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대로 얘기하면 소니 바이오 노트북 광고였다.



제임스 본드라는 캐릭터가 007 영화 시리즈를 통해 '수퍼 액션 히어로'처럼 변질된 건 다들 아는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여왕폐하의 007'과 '카지노 로얄'에서의 제임스 본드는 열받으면 사표쓰고 나가겠다는 식으로 나오기도 하는 평범한 '직장인'의 모습을 보여줬다.

3. M의 집

'여왕폐하의 007'에서 재미있는 장면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본드가 M의 집을 찾아가는 것이다. 007 시리즈에 M의 집이 나온 건 '여왕폐하의 007'이 처음이다.




M이 나비 채집에 열심인 평범한 노인의 모습으로 007 시리즈에 '노출'된 것도 '여왕폐하의 007'이 처음이다.



영화에서 M의 집이 나오는 건 '여왕폐하의 007'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카지노 로얄'에서 M의 집이 또 나온 것!



제임스 본드가 열받으면 사표쓰고 007 짓거리 집어치우겠다고 나온 것과 마찬가지로 M도 밤낮 사무실에서 본드에게 '이거 해와라, 저거 해와라' 하던 데서 벗어나 가정살림을 공개했다. 뿐만 아니라 주디 덴치는 파격적인 '베드씬'(?)까지 선보였다.



'여왕폐하의 007'와 '카지노 로얄'에선 제임스 본드와 M의 관계가 다른 영화에서와 다르다. 사무실에서 무뚝뚝하게 브리핑만 받고 끝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4. 본드걸 수난시대

'여왕폐하의 007'은 제임스 본드가 장가가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본드와 결혼한 트레이시가 신혼여행길에 블로펠드에 의해 살해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007 시리즈에서 메인 본드걸이 죽는 영화는 '여왕폐하의 007'이 처음이다.



그런데, 억센 팔자의 본드걸이 돌아왔다.

트레이시에 이어 저세상으로 간 메인 본드걸 넘버2는 '카지노 로얄'의 베스퍼.

베스퍼는 본드의 아내까지는 아니지만 본드가 특별한 생각을 했던 여자다.



결론은 이렇다:

스쳐지나가는 본드걸들은 장수하지만 본드가 특별한 마음을 가지면 다들 죽는다.

5. 카리스마 넘치는 콧수염의 사나이

'여왕폐하의 007'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콧수염의 사나이, 드라코가 본드에게 도움을 줬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카지노 로얄'에도 카리스마 넘치는 콧수염의 사나이가 나온다.

바로 매티스.

'여왕폐하의 007'에서 드라코로 나온 Gabriele Ferzetti와 '카지노 로얄'에서 매티스로 나온 Giancarlo Giannini 모두 이탈리안 배우라는 공통점도 있다.



본드팬들은 '카지노 로얄'에서 Giancarlo Giannini를 봤을 때 많은 캐릭터들이 오버랩 됐을 것이다. Giannini가 연기한 매티스가 왠지 모르게 상당히 낯익어 보이고, 왜 Giannini를 선택했는지도 짐작이 갔을 것이다.

왜일까?

본드를 돕는 카리스마 넘치는 콧수염의 사나이가 '여왕폐하의 007'의 드라코가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본드를 도와주는 카리스마 넘치는 콧수염의 사나이는 1963년작 '위기일발(From Russia With Love)'에도 나온다.

터키에서 본드를 맞이하는 케림 베이(Pedro Armendariz)다.



'카리스마'와 '콧수염'이라면 빼놓을 수 없는 또다른 배우가 있다.

1981년작 '유어 아이스 온리(For Your Eyes Only)'에서 본드를 돕는 콜롬보로 나온 토폴(Topol)이이다.



여기에 흥미로운 공통점이 있다:

카리스마 넘치는 콧수염의 사나이들이 나온 007 영화 모두 이언 플레밍 원작에 충실한 영화라는 것.

007 제작팀은 원작에 충실한 007 영화의 패턴을 거진 그대로 '카지노 로얄'로 옮겨왔다. 다시 말하면, 007 제작팀이 '카지노 로얄'로 파격적인 변신을 꾀했거나 엄청난 모험을 한 게 아니란 것이다. 007 제작팀은 45년동안 007 시리즈에 써왔던 수법을 다시 사용한 게 전부일 뿐이다.

우주선이 또다른 우주선을 납치한다는 황당한 줄거리의 '두번 산다(1967)' 바로 다음에 '여왕폐하의 007(1969)'이 나왔고, 스페이스셔틀을 타고 우주정거장에 가서 광선총 배틀을 한 '문레이커(1979)' 다음 영화가 '유어 아이스 온리(1981)'였으며, 투명 자동차가 나왔던 '다이 어나더 데이(2002)' 바로 다음 영화가 '카지노 로얄(2006)'이었다는 것도 잊어선 안된다.

영화배우가 피어스 브로스난에서 다니엘 크레이그로 바뀐 것도 놀랄 게 없다. 007 제작팀은 이미 80년대에 티모시 달튼을 캐스팅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로저 무어에서 티모시 달튼으로 교체된 것이나 피어스 브로스난에서 다니엘 크레이그로 교체된 것이나 똑같은 얘기다. 다니엘 크레이그는 티모시 달튼이 제대도 끝맺지 못한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 캐릭터를 이어받은 게 전부다.



대부분의 본드팬들은 제작팀이 '카지노 로얄'을 어떻게 만들려고 했는지, 다니엘 크레이그가 어떠한 제임스 본드를 연기하려고 했는지 어렵지 않게 파악했을 것이다. '카지노 로얄'이 전혀 낯설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007 영화를 처음 보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을테니 말이다. '두번 산다', '나를 사랑한 스파이', '문레이커', '다이 어나더 데이' 같은 007 영화 뿐만 아니라 '위기일발', '여왕폐하의 007', '유어 아이스 온리', '라이센스 투 킬'과 같은 원작쪽에 가까운 영화도 봤다면 '카지노 로얄'을 파악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카지노 로얄'은 1969년 '여왕폐하의 007'처럼 플레밍 원작의 냄새가 물씬 풍기도록 만든 게 전부다. 내용은 '카지노 로얄'이지만 영화는 '여왕폐하의 007'을 보는 것처럼 느껴지도록 만든 것이다.

'여왕폐하의 007'를 떠올리도록 유도한 이유는 간단하다:

투명 자동차를 타던 제임스 본드는 가고 이언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가 돌아왔다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카지노 로얄'은 이전 007 시리즈와 크게 다른, 유별나게 생뚱맞은 영화가 맞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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