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어스 브로스난, 저라드 버틀러, 마리아 벨로 주연의 영화라면 어느 정도 시선을 끌 것이다.
미국에선 제목도 '버터플라이 온 어 휠(Butterfly on a Wheel)'에서 '섀터드(Shattered)'로 간단하게 바꿨다.
그러나, 극장에서 개봉하지 않고 곧바로 DVD로 나왔다.
덕분에 12월말 미국서 DVD로 출시되기까지 볼 수 없었다.
왜 그랬을까?
영화를 보고나니 대충 감이 잡힌다: 이런 식의 얇팍한 스릴러로 좋은 반응을 얻기 힘들었을테니까.
'섀터드'는 톰 라이언(피어스 브로스난)이 닐(저라드 버틀러)의 딸을 납치한 뒤 돈을 요구하는 단순한 범죄영화처럼 시작한다.
잠깐! 그렇다면 피어스 브로스난이 악역으로 나오는 거냐고?
'나이든 매튜 매커너히'에 가깝게 보이는 피어스 브로스난이 악역에 도전했다는 게 어찌보면 재미있지만 요샌 이런 식의 이미지 변신이 유행이다보니 새로울 것도 없다.
그런데 이 영화의 문제는 피어스 브로스난이 악역으로 나온 게 아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영화라는 생각이 자꾸 든다는 게 문제다.
'영국배우'가 미국의 '시카고'를 배경으로 한 스릴러에 나온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클라이브 오웬과 제니퍼 애니스턴이 시카고를 배경으로 찍은 스릴러가 있기 때문이다. 클라이브 오웬의 '시카고 스릴러 영화'도 그리 잘만든 영화는 아니지만 이 영화를 먼저 본 사람들은 '섀터드'를 보면서 그 영화가 자연스럽게 생각날 것이다. 왠지 모르게 셋업이 비슷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섀터드'와 같은 스릴러 영화에선 넘겨짚기가 쉬우면 곤란하다. 마지막까지 눈을 뗄 수 없을만큼 궁금증을 증폭시키고 쇼킹한 반전으로 뒷통수를 치는 맛이 제대로 있어야 한다. 하지만, '섀터드'는 이런 게 부족하다. '섀터드'도 스릴러 영화의 조건을 충족시킬만한 모든 것을 그런대로 모두 갖췄다고 할 수 있지만 금새 상황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수준에 그쳤다. 이 덕분에 영화에선 무언가 상당히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진 것처럼 다들 놀란 표정을 짓고 있어도 그다지 놀라울 게 없어 보인다. 넘겨짚었던대로 대체로 모두 맞아떨어지는데 놀랄 게 있겠수?
그렇다고 지루한 영화는 아니다. 톰(피어스 브로스난)이 닐(저라드 버틀러)을 괴롭히는 부분은 그런대로 볼만하다. 돌아가는 상황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바람에 김빠진 스릴러가 됐지만 그렇다고 못봐줄 정도로 심각한 영화는 아니다.
결국 이 영화는 내용과 줄거리를 즐기라고 만든 게 아니다. 내용과 줄거리는 사실 볼 게 거의 없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건질 게 하나도 없는 건 아니다. 피어스 브로스난과 저라드 버틀러가 있기 때문이다.
90년대의 제임스 본드로 유명한 피어스 브로스난은 제임스 본드와는 전혀 다른 캐릭터를 멋지게 연기했다. 브로스난에게 악역이 어울린다는 건 아니다. 제임스 본드 시리즈보다 '섀터드'와 같은 드라마가 그에게 더욱 잘 어울린다는 것이다.
일부는 브로스난을 '액션배우'로 생각하지만 그는 많은 여성팬들을 몰고다니는 'Pretty Boy'에 가깝다. 미남인데다 액션영화에 아주 어울리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브로스난에겐 부드러움만 있을 뿐 남자다운 강렬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바로 이 때문에 브로스난의 제임스 본드 캐릭터도 어정쩡해 보였다. 외모만 따지면 제임스 본드에 아주 잘 어울린다고 해야겠지만 '배우 브로스난'은 잘 어울리지 않았던 것.
하지만, '섀터드'와 같은 드라마, 서스펜스, 스릴러 영화엔 아주 잘 어울려 보인다. 분노보다 슬픔을 연기하는 게 더 편해 보이는 브로스난에겐 이런 쟝르가 딱인 것처럼 보인다. '섀터드'에서의 브로스난은 억지로 히어로 캐릭터를 연기하던 007 시리즈에서와 달리 훨씬 편안해 보인다.
스코틀랜드 출신 배우 저라드 버틀러도 제임스 본드 후보로 거론됐던 배우다. 브로스난이 떠난 제임스 본드 자리가 공석이었을 당시엔 3~40대 영국 남자배우 거의 모두가 후보다시피 했고, 버틀러도 그 중 하나였다.
사실, 버틀러는 제임스 본드 시리즈에 이미 출연한 경력이 있다.
물론, 제임스 본드로 출연한 건 아니다.
피어스 브로스난의 2번째 007 영화 '투모로 네버 다이(Tomorrow Never Dies - 1997)'에서 침몰하는 영국군함 승무원으로 잠깐 나온 것.
한줄이나마 대사도 있었다.
이 때문일까?
피어스 브로스난과 저라드 버틀러가 같은 영화에 함께 출연한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웃음이 나왔다. 1997년작 '투모로 네버 다이'에선 브로스난과 함께 출연할 기회조차 없었던 버틀러가 10년 사이에 주연급 배우로 성장해 2007년작 '섀터드'에서 브로스난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게 재미있었다.
뿐만 아니라, 브로스난의 007 영화에 대사 한줄짜리 단역으로 출연했던 경력을 가진 버틀러가 브로스난을 이을 제임스 본드 후보중 하나로 거론됐다는 것도 재미있는데 '섀터드'에선 브로스난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캐릭터로 나오다니! 마치 브로스난이 버틀러에게 '내 것을 넘보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직접 보여준 것처럼 보이더라.
그렇다. 내가 '섀터드'를 보게 된 이유는 피어스 브로스난과 저라드 버틀러의 '제임스 본드 인연(?)' 덕분이었다.
그리고, 기대했던대로 '섀터드'는 이것 하나 빼곤 기억할 게 없는 영화였다.
마지막 순간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스릴 만점의 영화를 원한다면 '섀터드'는 피하는 게 좋다. 아주 형편없을 정도의 영화는 아니지만 새로울 게 없는, 뻔히 들여다보이는 내용이 전부이기 때문에 궁금한 미스테리도 없고 쇼킹한 반전도 없다.
뻔한 이야기인줄 알면서도 그저 시간 죽이기용으로 보는 TV 드라마처럼 취급한다면 별 문제 없겠지만 피어스 브로스난, 저라드 버틀러 등 빅네임 배우들이 나온다고 큰 걸 기대하면 큰 실망을 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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