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누구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8~90년대부터 활동했던 한 고참 래퍼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요즘 아이들은 넬리(Nelly)가 힙합의 시조인 줄 알고 있다고...
넬리 이전에도 래퍼와 랩그룹이 있었고, 이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넬리가 있게 됐지만 이에 대해 잘 모르거나 아예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스파이 픽션도 마찬가지다. 이언 플레밍(Ian Fleming), 존 르 카레(John Le Carre), 그래이햄 그린(Graham Greene), 알리스터 맥클레인(Alistair MacLean), 프레드릭 포사이스(Frederick Forsyth)등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스파이 픽션이 인기를 끌 수 있었겠는지 생각해 보고 넘어가야 한다.
물론, 이들 이전에도 첩보소설을 쓴 작가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스파이 픽션 중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5~60년대 작가들을 우선 먼저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이언 플레밍(1908~1964)은 1953년 소설 '카지노 로얄(Casino Royale)'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스파이 캐릭터, 제임스 본드(James Bond)를 탄생시킨 영국 소설가다.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 소설과 영화 시리즈가 이후에 나온 스파이 픽션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영화, 소설 할 것 없이 제임스 본드를 모방한 아류작이 한 둘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존 르 카레(1931~ )는 이언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 어드벤쳐와는 성격이 다른 보다 진지하고 사실적인 첩보소설로 유명한 영국 작가다. 제임스 본드 시리즈가 스타일리쉬한 에이전트의 쿨한 어드벤쳐에 대한 것이라면 존 르 카레의 소설은 실제로 벌어지는 첩보전을 보는 듯한 사실적인 스파이 스릴러다.
존 르 카레는 이언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 어드벤쳐가 실제 정보부 활동과 거리가 있다면서 보다 사실적인 첩보소설들을 발표했다. 존 르 카레의 소설을 영화로 옮긴 리처드 버튼 주연의 영화 'The Spy Who Came In From the Cold' DVD 뒷면엔 'Forget James Bond and step into the real, dour and chilling world of spies and counterspies.'라고 되어있다.
르 카레도 비평가들로부터 '제임스 본드 인기에 편승한 아류'라는 혹평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정신나간 자가 아닌 이상 그 누구도 존 르 카레의 소설을 '제임스 본드 아류'라고 부르지 않는다.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 시리즈가 사실성이 부족한 어드벤쳐 스파이 소설이라면 존 르 카레의 작품은 이와 정 반대의 매우 리얼한 첩보소설로써 양날개 역할을 하고있다. 제임스 본드 시리즈와 확실하게 차별화된 첩보소설로 인정받은 것이다.
그래이햄 그린(1904~1991)은 영화 '제 3의 사나이(The Third Man)'의 스토리를 쓴 작가로 유명한 영국 소설가다. 그래이햄 그린은 스파이 스릴러 소설만을 쓴 것이 아닌 만큼 '스릴러 작가'로 부르기는 곤란하지만 'The Ministry of Fear', 'Our Man in Havana', 'The Human Factor' 등 다수의 스파이 스릴러 소설로도 유명하다.
알리스터 맥클레인(1922~1987)은 '나바론 요새(The Guns of Navarone)'로 유명한 스코틀랜드 스릴러 작가다. '나바론 요새'는 2차대전을 배경으로 한 전쟁물이지만 맥클레인은 'Ice Station Zebra', 'Death Train' 등 스파이 스릴러도 유명하다.
'Death Train'은 피어스 브로스난(Pierce Brosnan) 주연의 액션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프레드릭 포사이스(1938~ )도 'The Days of Jackal', 'The Odessa File', 'The Fourth Protocol' 등의 스파이 스릴러로 잘 알려진 영국 작가다.
그의 소설은 영화로도 많이 제작되어 영화팬들에게도 친숙한 제목이 많다.
이밖에도 스파이 소설을 쓴 스릴러 작가들은 많을 것이다. 그런데 한가지 재미있는 건 '스파이 소설'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 대부분이 영국인 소설가라는 것이다. 이언 플레밍, 그래이햄 그린, 존 르 카레 등등 모두 영국인이다.
미국인 중엔 없냐고?
잭 라이언 시리즈의 톰 클랜시(Tom Clancy), 제이슨 본 시리즈의 로버트 러들럼(Robert Ludlum), 모사드 에이전트 게이브리엘 앨런 시리즈의 다니엘 실바(Daniel Silva) 등이 있다. 하지만, '스파이 쟝르를 대표한다'고 할만 한 이름은 선뜻 떠오르지 않는다.
알카에다를 추적하는 이스라엘 에이전트의 활약을 그린 게이브리엘 앨런 시리즈 'The Secret Servant'의 겉표지에는 작가 다니엘 실바를 'one of America's most gifted spy novelists ever, and the successor to Graham Greene and John Le Carre.'라고 소개했다. 다니엘 실바가 그레이햄 그린, 존 르 카레에 이은 대단한 스파이 소설가라는 것이다.
여기에 동의하든 안 하든 이것은 각자 판단하기 바란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실바가 '선배'로 삼은 그레이햄 그린, 존 르 카레 모두 영국 작가라는 것이다.
톰 클랜시의 소설은 흥미로운 작품도 더러 있지만 '테크노 스릴러' 혹은 '밀리터리 소설' 쪽에 가깝지 제대로 된 스파이 스릴러는 많지 않다.
물론, 클랜시의 작품 중에도 캐릭터 중심의 스파이 스릴러에 가까운 소설이 있다. 바로 잭 라이언 시리즈다. 하지만, 이 시리즈의 문제는 실제와 다른 미국 대통령 등이 등장하면서 리얼리티를 떨구고, CIA 애널리스트이던 잭 라이언이 나중엔 미국 대통령까지 된다는 데 있다. 007 시리즈에 비유하자면 제임스 본드가 영국 총리가 되는 셈이다. 때문에 주변설정이 아무리 사실적이더라도 지금 현재 벌어지고 있는 첩보전이라는 현실감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다.
미국 스릴러 소설 작가 로버트 러들럼(1927~2001)도 여러 편의 스파이 소설을 남겼다. 하지만, 러들럼의 소설들은 주로 액션영화 스타일에 가깝다. 이언 플레밍의 멋쟁이 캐릭터나 존 르 카레의 리얼리스틱한 에스피오나지 스토리가 부족하다 보니 특별할 것 없는 서스펜스 스릴러 영화를 보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곤 한다.
그래서 일까? 러들럼의 소설 'The Bancroft Strategy' 뒷면에 있는 인터테인멘트 위클리(Entertainment Weekly)의 리뷰가 아주 인상적이다:
"Reading a Ludlum novel is like watching a James Bond film..."
물론, 러들럼에게도 캐릭터가 있다. 바로 제이슨 본(Jason Bourne)이다. 그런데 제이슨 본은 이니셜이 'J.B'라는 것부터 제임스 본드와 겹친다. '제임스 본드'와 '제이슨 본' 발음이 비슷하다는 것 정도는 영어권이 아니더라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메인 캐릭터 이름을 제이슨 본, 이니셜까지 J.B로 정한 것은 조금 너무한 게 아니냐는 생각도 든다. 대번에 제임스 본드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넬리가 래퍼의 시조로 알고있는 사람들은 제이슨 본이 제임스 본드보다 먼저라고 우길 지도 모른다. 그래서 짚고 넘어가자면 이언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는 1953년 소설 '카지노 로얄'로 데뷔했고 러들럼의 제이슨 본은 1980년 '본 아이덴티티(Bourne Identity)'가 데뷔작이다.
물론, 'All-American Spy'인 제이슨 본이 'Keeping the British End Up'인 제임스 본드 머리 위에 올라서는 것을 보고싶어 하는 일부 미국언론과 이런 데서까지 애국심에 정력을 낭비하는 사람들은 '제이슨 본은 100% 독창적인 오리지날 캐릭터이고 007 영화 시리즈가 제이슨 본 시리즈를 따라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싶을 지도 모른다.
스파이 캐릭터로 뚜렷하게 보이지도 않는 제이슨 본을 '스파이', '시크릿 에이전트'라고 표현하면서 '제이슨 본+맷 데이먼=아메리칸 스파이'로 만드는 것도 순수한 의도로 보이지 않는다. 미국에선 다니엘 크레이그보다 맷 데이먼의 인지도가 높다는 점, 제이슨 본이 미국인 에이전트라는 점을 이용하는 것인 지도 모른다.
제임스 본드와 제이슨 본 캐릭터는 천지차이라면서도 '제임스 본드가 아무리 바뀌더라도 제이슨 본이 될 수 없다'며 마치 007 시리즈가 제이슨 본을 모방한다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고, 주위에선 스파이로 보이지 않는 캐릭터를 '스파이', '시크릿 에이전트'라고 추켜세우고,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제임스 본드를 늙고 오래된 구시대 캐릭터라고 끌어내리면서 치졸하게 경쟁하려는 것 모두 미국인들이 미국산 스파이 캐릭터의 빅토리를 보고싶어 한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할 것 같다. 대표적인 스파이 캐릭터를 미국산으로 얼마나 바꾸고 싶으면 이러겠나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듯.
하지만 잘 될 수 있을까?
중동문제를 다룬 리얼한 첩보물은 몰라도 스타일리쉬한 캐릭터 중심의 스파이 시리즈를 '짝퉁'이란 소리 듣지 않고 만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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