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시리즈 중에서 가장 잘 만들어진 영화를 꼽으라고 하면 '여왕폐하의 007(On Her Majesty's Secret Service/1969)'와 '유어 아이스 온리(For Your Eyes Only/1981)'가 빠지지 않는다.
이언 플레밍의 원작에 충실하게 만들어진 몇 안되는 007 영화 중 하나로 꼽히는 '여왕폐하의 007'은 플레밍의 원작에서 지나치게 벗어낫던 루이스 길버트 감독의 '두번 산다(You Only Live Twice/1967)' 바로 다음에 나온 영화다. 제임스 본드 시리즈가 스케일이 큰 액션 판타지 시리즈로 변했다고 해서 원작의 제임스 본드를 잊지 말라는 의미였다.
'유어 아이스 온리'도 마찬가지다. 제임스 본드가 스페이스 셔틀을 타고 우주정거장에 나가서 광선총을 쏘던 루이스 길버트 감독의 '문레이커(Moonraker/1979)' 바로 다음에 나온 영화가 바로 '유어 아이스 온리' 였다. 플레밍의 단편모음집에서 제목을 따온 만큼 영화 줄거리도 플레잉의 여러 숏스토리들을 이어붙인 게 전부지만 그래도 플레밍의 원작에 충실한 007 영화 중 하나로 꼽힌다.
그런데 두 영화의 공통점이 '원작에 충실한 영화'라는 것 하나가 전부가 아니다. 그렇다면 말이 나온 김에 두 영화의 공통점들을 몇 가지 짚어보기로 하자.
♦트레이시 본드
제임스 본드 시리즈 팬이라면 '여왕폐하의 007'에서 제임스 본드(조지 레젠비)가 트레이시(다이아나 리그)와 결혼한다는 것을 다들 알고있을 것이다.
바로 그 트레이시가 '유어 아이스 온리'에 나온다. '유어 아이스 온리'는 본드가 트레이시의 묘를 찾는 씬으로 시작한다.
♦블로펠드..?
'여왕폐하의 007'에는 블로펠드라는 문어 헤어스타일의 악당이 나온다. 여러 영화와 애니메이션에서 패로디 했던 흰색 고양이를 항상 들고다니는 바로 그 사나이다.
블로펠드는 '여왕폐하의 007'에서 본드와 격투를 벌이다 목 부위를 다친다.
그런데 흰색 고양이를 들고있는 대머리 사나이가 느닷없이 '유어 아이스 온리'에 나타났다. 목을 다친 것 정도가 아니라 휠체어까지 탄다는 게 차이점이긴 하지만 '그 때 그 블로펠드'와 비슷한 구석이 많아 보인다.
B, Blofeld...? Is that YOU??
그러나, 이 캐릭터는 공식적으로는 블로펠드가 아니다. '썬더볼'을 제작했던 케빈 맥클로리와 007 제작진 사이에 분쟁이 벌어지면서 '스펙터'와 '블로펠드'를 007 시리즈에 더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자 007 제작진이 블로펠드를 연상시키는 '짝퉁 블로펠드'를 내세워 장난을 친 것이 전부다.
하지만, 본드가 트레이시의 묘를 찾은 것에 이어 짝퉁 블로펠드까지 등장시키며 '여왕폐하의 007'과 비슷하게 보이도록 의도한 것만은 분명하다.
♦썰매
스위스에 도착한 본드가 기차역에서 헬리콥터가 있는 장소로 이동할 때 말이 끄는 썰매를 이용한다.
말이 끄는 썰매는 '유어 아이스 온리'에도 나온다. 이탈리아의 코티나에서 본드와 멜리나가 역으로 향할 때 썰매를 이용한다.
♦스펙터 헬리콥터
'여왕폐하의 007'에서 본드가 블로펠드의 기지인 피즈 글로리아로 향할 때 흰색과 붉은색이 섞인 벨 206 헬리콥터를 이용한다.
'유어 아이스 온리'에도 같은 기종의 헬리콥터가 등장한다. 컬러도 '여왕폐하의 007'에 나왔던 헬리콥터와 비슷하다.
♦빨간색 자동차와 스키
'여왕폐하의 007'에 나온 대표적인 본드카는 본드의 아스톤 마틴 DBS와 트레이시의 머큐리 쿠거다. 비록 아스톤 마틴 DBS가 본드의 자동차였지만 카 체이스 씬에 사용된 자동차는 트레이시의 머큐리 쿠거였던 만큼 '스키 2개를 뒤에 올려놓은 붉은색 자동차'가 더욱 기억에 남는다.
그런데 '스키를 올려놓은 붉은색 자동차'가 '유어 아이스 온리'에도 나온다. 본드가 이탈리아의 코티나에서 이용하는 버건디색 로터스 터보가 바로 그것이다. 물론, 뒤에 스키 2개를 올려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카 체이스
'여왕폐하의 007'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는 스위스에서 벌어지는 카 체이스 씬이다. 등장하는 자동차는 트레이시 소유의 머큐리 쿠거. 운전도 트레이시가 하며, 트레이시 소유의 자동차인 만큼 'Ejector Seat' 같은 가젯도 없다. 따라서 몸으로 때우며 추격자를 따돌릴 수밖에 없었다.
'유어 아이스 온리'에서도 본드는 비슷한 상황에 처한다. 본드의 멋진 흰샌 로터스 터보가 파괴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본드걸, 멜리나의 노란색 시트로엥을 얻어타는 것. 물론, 운전도 멜리나가 하며(그러나 멜리나가 자동차를 뒤집자 본드가 운전교대를 요구한다), 멜리나 소유의 자동차인 만큼 'Ejector Seat' 같은 가젯도 없다. 따라서 몸으로 때우며 추격자들을 따돌릴 수밖에 없었다.
♦파란색 스키복
'여왕폐하의 007'에서 본드가 블로펠드의 피즈 글로리아에서 스키로 탈출할 때 그가 선택한 스키복은 파란색이다.
'유어 아이스 온리'에서 본드가 이탈리아 코티나의 스키 리조트를 찾을 때 입은 옷도 파란색이다.
♦스키를 타며 즐거운 시간을...
'여왕폐하의 007'에서 본드와 트레이시가 블로펠드 일당에게 쫓기고 있다는 것을 잠시 잊은 채 함께 스키를 타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장면이 있다.
'유어 아이스 온리'에서도 본드와 본드걸이 함께 스키를 타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씬이 나온다. '여왕폐하의 007'의 트레이시에 견줄만 한 칼리버의 본드걸은 아니지만 '영계'라는 게 포인트.
♦밥슬레이
'여왕폐하의 007'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액션씬 중 하나는 본드와 블로펠드의 밥슬레이 체이스 씬이다.
밥슬레이는 '유어 아이스 온리'에도 나온다. 이번엔 본드가 직접 밥슬레이를 타지는 않지만 그대신 밥슬레이 트랙을 따라 스키를 타며, 모터싸이클이 그 뒤를 쫓는다.
♦스케이팅
'여왕폐하의 007'에서 블로펠드의 피즈 글로리아에서 탈출한 본드가 트레이시를 우연히 만나게 되는 장소는 스케이팅 링크였다.
'유어 아이스 온리'에도 스케이팅이 나온다. 본드걸, 비비가 피겨 스테이팅 선수로 나온 것. 비비를 연기한 미국배우 린 할리 존슨은 실제로 프로페셔널 피겨 스케이팅 선수다.
♦본드카=사람 잡는 카
온갖 가젯으로 무장한 본드카가 적들에게 얼마나 치명적인지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왕폐하의 007'에선 정 반대다. 본드의 아스톤 마틴 DBS에서 갓 결혼한 아내, 트레이시가 총에 맞아 죽기 때문이다.
'유어 아이스 온리'에서도 본드를 도와주던 이탈리안 에이전트 페라라가 본드의 로터스 터보에서 살해당한 채 발견된다.
♦바닷가에서 로맨틱한 시간을...
'여왕폐하의 007'에서 본드와 트레이시가 데이트를 즐기는 장면이 있다. 루이스 암스트롱의 'We Have All the Time in the World'가 흐르는 가운데 본드와 트레이시가 바닷가에서 로맨틱한 시간을 보내는 장면도 여기서 나온다.
'유어 아이스 온리'에서도 본드와 본드걸이 바닷가에서 로맨틱한 시간을 보내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여왕폐하의 007'에서 본드와 결혼하는 트레이시에 견줄만 한 칼리버의 본드걸은 아니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유어 아이스 온리'에서 본드와 함께 바닷가를 걸었던 여배우(카산드라 해리스)가 피어스 브로스난의 실제 아내였다는 것. '여왕폐하의 007'에서 본드와 함께 바닷가를 거닐던 본드걸은 제임스 본드의 극중 아내였다면 '유어 아이스 온리'의 본드걸은 제임스 본드를 연기한 영화배우의 실제 아내였으니 두 영화의 바닷가 씬에 나온 본드걸 모두 '본드의 와이프'라는 공통점이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유어 아이스 온리(1981)' 촬영시엔 로저 무어가 제임스 본드였으며, 피어스 브로스난은 1995년이 되어서야 제임스 본드가 되었으니 의도적으로 꾸민 것은 아니다.
대신, 루이스 암스트롱의 곡은 아니지만 배경음악으로 재즈가 흐르는 것을 또다른 공통점으로 꼽을 수 있을 듯.
♦팀워크
'여왕폐하의 007'의 마지막 부분에서 본드는 M이 도와주지 않자 미래의 장인이 될 드라코와 그의 팀에 도움을 청한다.
'유어 아이스 온리'에서도 상황이 비슷하다. 마지막 미스테리를 푸는 데 MI6가 도움이 되지 않자 본드는 콜롬보와 그의 팀에 도움을 청한다.
♦산꼭대기 건물
'여왕폐하의 007'에 나온 블로펠드의 기지, 피즈 글로리아는 스위스의 산 정상에 위치했다.
'유어 아이스 온리'에서 크리스타토스가 택한 비밀 아지트도 산 정상에 위치한 세인트 시릴이라는 수도원이다.
♦암벽등반
'여왕폐하의 007'에서 블로펠드의 피즈 글로리아에 침입하기 위해 MI6 에이전트가 암벽등반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유어 아이스 온리'에서는 크리스타토스의 비밀 아지트에 침입하기 위해 본드가 직접 암벽등반을 한다.
♦복수
플레밍의 소설 '여왕폐하의 007'은 본드의 아내, 트레이시가 블로펠드에게 살해당하면서 끝나고, 그 다음 작품 '두번 산다(You Only Live Twice)'는 본드가 복수에 성공하면서 끝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원작소설의 이야기일 뿐 영화에선 본드가 블로펠드에게 복수를 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았다. 지금까지 나오지 않았으니 본드가 블로펠드를 찾아가 복수를 하는 씬을 영화에서 볼 기회는 영원히 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007 시리즈에 복수가 한 번도 안 나온 것은 아니다. 티모시 달튼이 '라이센스 투 킬(1989)'에서 친구의 복수를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제임스 본드를 보여줬고, 현재 제임스 본드인 다니엘 크레이그는 원작의 캐릭터에 보다 가까워진 제임스 본드를 연기하면서 처절한 복수극을 보여주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이들보다 훨씬 이전에 로저 무어가 제임스 본드 영화에서 복수를 보여준 적이 있다. 가벼운 플레이보이의 비폭력적인 이미지였던 로저 무어가 복수전을 보여줬다는 게 어색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의 다섯 번째 제임스 본드 영화 '유어 아이스 온리(1981)'에서는 약간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무엇에 대한 복수를 하냐고?
'여왕폐하의 007'에서 트레이시 본드가 살해당했다면 '유어 아이스 온리'에선 본드를 도와주던 여자 캐릭터, 리슬이 살해당하면서 본드를 열받게 한다.
이탈리아에서 본드를 돕던 페라라를 살해했던 로크 일당에게 리슬까지 잃은 본드는 로크를 추적한 끝에 벼랑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는 로크의 자동차를 냉정하게 발로 차 절벽 아래로 떨어뜨린다. 로저 무어의 이전 제임스 본드 영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이다. 로저 무어는 그의 제임스 본드도 열받을 때가 있고, 열받으면 인정사정 없어진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렇다면 '유어 아이스 온리'에 복수 플롯이 왜 포함된 것일까?
'제임스 본드도 분노를 느끼는 평범한 인간(Human Being)'이라는 점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유어 아이스 온리'가 이언 플레밍 원작의 세계로 되돌아갔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위해 복수 플롯을 포함시켰다는 것이다.
'유어 아이스 온리'가 플레밍의 원작으로 돌아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넣은 것인 만큼 복수 플롯 또한 '여왕폐하의 007'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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