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월 17일 토요일

김빠진 맥주같은 '디파이언스'

벨라루스를 침공한 나치군들이 유대인을 학살하거나 수용소로 끌고간다. 비엘스키 형제의 가족도 예외가 아니다. 유대인을 추격하는 독일군과 이들에 협력하는 지역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된 비엘스키 형제는 하는 수 없이 숲속으로 피신하게 된다.

숲으로 피신한 다른 유대인 일행과 합류한 비엘스키 형제는 맏형 투비아(다니엘 크레이그)를 리더로 한 '정글 커뮤니티'를 만들게 된다. 독일군들이 쳐들어와 죽는 순간까지 숲속에서 저항하며 버티기로 한 것.

'정글 커뮤니티'의 인구는 갈수록 불어나지만 식량은 부족했고 겨울은 혹독했다. 독일군의 공격도 갈수록 맹렬해지고, 투비아와 남동생, 주스(리예브 슈라이버)와의 갈등도 깊어 간다.

과연 이들이 언제까지 숲속에서 버틸 수 있을까?


▲'디파이언스(Defiance)' 포스터

But, there is ONE MAN you can count on.

His name is...

"Bond, James Bond."

다니엘 크레이그가 나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한 조크가 아니다. '디파이언스(Defiance)'는 제임스 본드가 흥행을 책임지는 역할을 맡은 것이나 다름없는 영화다. 22번째 제임스 본드 영화 '콴텀 오브 솔래스(Quantum of Solace)' 이후에 개봉한 것이 우연일 리 없으며, 다니엘 크레이그가 영화에서 제임스 본드의 건배럴 씬 흉내를 낸 것도 절대 우연일 리 없다.

그렇다. '디파이언스'는 제임스 본드(다니엘 크레이그)가 얼굴마담 노릇을 한 영화다. '디파이언스'와 투비아 비엘스키를 '2차대전 버전 제임스 본드 영화', '유대인 버전 제임스 본드'로 만들려고 한 것이다.

1000명이 넘는 유대인을 구한 투비아 비엘스키를 '영웅'으로 묘사하기 위해 제임스 본드 배우를 캐스팅한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이전의 2차대전 또는 홀로코스트 영화에서 봤던 저항 한번 못해보고 무참히 학살당하던 유대인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 것도 좋다. 하지만, 다니엘 크레이그가 턱시도 대신 가죽잠바를 입고 제임스 본드 흉내를 내는 것 하나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데, '본드카'까지 준비할 필요가 있었을까?

백마를 탄 투비아 비엘스키나 아스톤 마틴 DBS를 탄 제임스 본드나 크게 다를 게 없어 보였다.


▲설마 저 백마의 이름이 '아스톤 마틴'은 아니겠지?

'본드카'까지 나왔다면 '본드걸'도 나오냐고?

물론이다. '디파이언스'도 갖출 건 다 갖췄다.

비엘스키 형제에 대한 영화다 보니 여주인공이라고 부르기에 마땅한 캐릭터가 없지만, 투비아(다니엘 크레이그)와 가까운 사이가 되는 릴카를 연기한 알렉사 다발로스(Alexa Davalos)가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띄었다.

알렉사 다발로스는 '진짜 제임스 본드 영화'에 본드걸로 캐스팅해도 될만 해 보였다.


▲언오피셜 본드걸 알렉사 다발로스

영화가 이런 식이다 보니 '디파이언스'의 내용이 '백마를 탄 제임스 본드가 모세처럼 유대인들을 구한다'는 내용의 판타지 영화처럼 보였다. 투비아 비엘스키가 실존인물이고, 그가 수많은 유대인들을 구한 것도 사실이라면 영웅 만들기 보다는 스토리에 좀 더 비중을 뒀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스토리라인과 연출은 수백번은 본 듯한 TV 다큐멘타리 수준을 넘지 않았다. 비엘스키 형제의 이야기를 어디서 부터 어디까지 어떻게 영화로 옮기냐가 매우 중요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전형적인 '전쟁 난민 영화'로 둔갑하는 것을 보면서 한계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다. 지저분한 차림새의 사람들이 얼마 안 되는 음식을 불쌍한 표정으로 먹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수프를 줄 서서 배급받는 장면도 물론 빠지지 않았다. 겨울이 오면 눈이 오고, 눈이 오면 춥고, 추우면 감기에 걸리며, 감기에 걸리면 기침을 한다는 것도 아주 드라마틱하게 가르쳐 주더라.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기본적인 생필품마저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힘든 생활을 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이미 백만번은 본 것 같은 똑같은 장면들을 반복해서 보고싶진 않았다.

'디파이언스'의 메인 줄거리가 '나치를 피해 숲속에서 움막을 짓고 버틴 유대인들의 생존 이야기'인데 이 파트가 전형적인 난민 영화 수준에 그쳤다면 다른 볼거리라도 있냐고?

없다. 영화 제작진은 레지스탕스와 독일군간의 전투씬과 정글 커뮤니티 이야기를 번갈아가면서 보여줬지만 R레이팅 수준의 화끈한 액션도, 진한 감동도 없었다. 다큐멘타리, 또는 역사 드라마를 보느 것처럼 지루하기만 했을 뿐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고 할만 한 부분도 많지 않았다.

비엘스키 형제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있었던 것은 아니며, 그 많은 사람들이 숲속에 움막을 짓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버텼다는 게 대단하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크게 새로울 것이 없어 보였다. 2차대전 당시 유대인들이 나치 독일에 대항해 레지스탕스 활동을 단 한명도 하지 않았을리 없다는 것은 상식적인 부분이며, 숲속에 '정글 커뮤니티'를 만들고 그곳을 근거지로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다는 것도 - 물론 말처럼 쉽진 않았겠지만 - 크게 놀라울 게 없었다.

그래도 다니엘 크레이그가 버티고 있으니 볼만 하지 않았냐고?

'2차대전 제임스 본드 영화'가 되었든 무엇이 되었든 간에 다니엘 크레이그를 중심으로 셋업을 잘 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다니엘 크레이그보다 리예브 슈라이버가 더욱 눈에 들어왔다. 리예브 슈라이버는 주스 비엘스키역에 제격이었고, 크레이그보다 레지스탕스 리더에 더 어울려 보였다.

물론, 다니엘 크레이그도 제임스 본드로써의 이용가치가 어느 정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임스 본드 유명세'로 공헌한 것을 제외하곤 영화상에서의 존재감은 슈라이버만 못했다. 영화의 주인공은 투비아를 연기한 다니엘 크레이그가 분명하지만 실질적인 주인공은 주스를 연기한 리예브 슈라이버가 아니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미스터 본드보다 돋보였던 리예브 슈라이버

그렇다. '디파이언스'도 포스터만 그럴싸한 영화였다. 얼핏보면 액션, 유머, 감동으로 가득한 영화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김빠진 맥주같은 영화다.

에드워드 즈윅 감독의 영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디파이언스'엔 은근히 기대를 했었는데 트레일러부터 약간 유치하다 싶더니 역시 영화도 별볼 일 없는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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