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미국 여배우, 제니퍼 애니스턴(Jennifer Aniston)이 엘(Elle) UK와의 인터뷰에서 제임스 본드 시리즈에 출연하고 싶다는 희망을 밝힌 적이 있다. 농담 반, 진담 반이었으리라 본다. 그런데 미국 여배우가 본드걸에 관심을 보이니까 007 시리즈와 미국 여배우들의 그다지 섹시하지 않은 관계가 떠올랐다. 이상하게도 미국 여배우들이 연기한 본드걸들은 하나같이 기대이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번 짚어보기로 합시다.
007 시리즈 1탄 '닥터노(Dr. No-1962)'서부터 '여왕폐하의 007(On Her Majesty's Secret Service-1969)'까지는 미국 여배우가 출연하지 않았다. 아주 단역까지 따진다면 있겠지만 60년대에 나온 007 시리즈에서는 미국 여배우가 본드걸다운 본드걸 역을 맡은 적은 없었다.
그런데, 70년대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이 전통이 깨졌다. 1971년작 '다이아몬드는 영원히(Diamonds Are Forever)'는 로케이션부터 미국 라스베가스였고, 미국인 본드걸도 2명씩이나 출연했다. 질 세인트 존(Jill St. John)이 연기한 리딩 본드걸, 티파니 케이스와 본드(숀 코네리)가 카지노에서 만나는 서포팅 본드걸, 플렌티 오툴(라나 우드)이다.
두 캐릭터는 유머러스한 수다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60년대 시절처럼 우아하고 섹시한 매력을 지닌 본드걸 대신에 코믹한 본드걸이 둘씩이나 등장한 것.
다이하드 본드팬,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 감독은 베스트 본드걸로 질 세인트 존을 꼽았다. 의외였다. 스필버그 감독은 질 세인트 존이 연기한 티파니 케이스가 다른 본드걸과 달리 유머러스한 캐릭터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동의하기 힘들다. 스타일이 비슷해 보이는 본드걸이 둘이나 나왔기 때문인지 '다이아몬드는 영원히' 본드걸은 2명 모두 그다지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다음 작품인 '죽느냐 사느냐(Live and Let Die-1973)'도 미국인 본드걸이 나온다. 로지 카버라는 흑인 여성 CIA 에이전트로 출연한 글로리아 헨드리(Gloria Hendry)다.
사실, 글로리아 헨드리가 연기한 서포팅 본드걸, 로지 카버는 아주 실패적인 캐릭터는 아니다. 제임스 본드와 로맨틱한 관계를 갖는 첫 번째 흑인 본드걸이라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인기있는 본드걸이 아닌 것만은 사실이다.
미국인 여배우는 1977년작 '나를 사랑한 스파이(The Spy Who Loved Me)'에서 리딩 본드걸로 돌아왔다. KGB 에이전트, 안냐 아마소바를 연기한 바바라 바크(Barbara Bach)다.
문제는 '나를 사랑한 스파이'에서 보여준 그녀의 연기가 한마디로 심각했다는 것. 본드걸은 연기력보다 외모가 우선이라는 것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바바라 바크가 연기한 캐릭터는 본드의 품에 안기는 것 밖에 모르는 타잎의 본드걸이 아니었다. 바로 이 때문에 바바라 바크의 어설픈 연기가 더욱 눈에 띄었는 듯.
그런데도 바바라 바크는 인기있는 본드걸 중 하나로 꼽힌다. 영화가 일단 흥행에 성공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본드걸은 연기력이 어찌되었든 간에 얼굴과 몸매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증거인 듯 하다.
한가지 독특한 점은, 바바라 바크는 다른 미국인 본드걸들과 달리 미국인이 아닌 외국인 캐릭터를 연기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인지 바바라 바크는 미국인 여배우 티가 가장 적게 나는 미국인 본드걸이다.
미국인 본드걸은 바로 다음 작품인 1979년작 '문레이커(Moonraker)'에 또 등장한다. CIA 에이전트, 홀리 굿헤드를 연기한 미국 여배우, 로이스 차일즈(Lois Chiles)다.
'문레이커'라고 하면 제임스 본드(로저 무어)가 우주로 날아가 광선총 배틀을 한 화려한 영화라는 게 가장 먼저 떠오른다. 강철이빨을 한 거한, 죠스(리처드 킬)도 빠지지 않는다. 그런데 아무도 본드걸에 대해선 이야기하지 않는다.
얼마 전 본드걸을 정리할 기회가 있었는데 분명히 누구 하나를 빠뜨린 것 같았다. 그것도 리딩 본드걸 중에서. 그런데 그게 누구였는지 맨 마지막에 가서야 생각났다.
로이스 차일즈 교수님(그렇다. 교수님이다)한테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홀리 굿헤드는...
다음 차례로 넘어가면...
1981년작 '유어 아이스 온리(For Your Eyes Only)'에도 미국인 본드걸이 등장한다. 이번엔 아버지뻘 되는 제임스 본드(로저 무어)를 짝사랑하는 피켜 스케이팅 선수, 비비 달을 연기한 린-홀리 존슨(Lynn-Holly Johnson)이다.
일부는 린-홀리 존슨이 연기한 비비를 바닥권 본드걸 중 하나로 꼽는다. 이젠 꼬맹이까지 본드걸로 나오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비비는 그저 코믹 릴리프 역할을 맡은 서포팅 본드걸이 전부였으니 '최악의 본드걸 중 하나'라고까지 할 필요는 없을 듯 하다.
그러나, 비비가 인기있는 본드걸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미국인 본드걸은 1985년작 '뷰투어킬(A View to A Kill)'로 돌아왔다. 리딩 본드걸, 스테이시 서튼을 연기한 타냐 로버츠(Tanya Roberts)다.
하지만, 타냐 로버츠도 바닥권 본드걸 중 하나로 꼽힌다. '섹시하다'는 것까지는 인정한다 해도 그녀의 본드걸 캐릭터는 아무런 개성이 없었다. 영화의 배경이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인 덕분에 미국인 여자 캐릭터가 나왔다는 것 말고는 특별하다고 할 게 없었다.
미국인 리딩 본드걸은 1989년 영화 '라이센스 투 킬(License To Kill)'에 또 나온다. 이번에는 CIA 에이전트, 팸을 연기한 캐리 로웰(Carey Lowell)이다.
'라이센스 투 킬'은 7~80년대에 제작된 007 시리즈 중에서 가장 제임스 본드 영화다운 작품으로 꼽히지만 아쉽게도 본드걸은 해당되지 않는다. 캐리 로웰이 연기한 팸이라는 캐릭터가 너무 터프하고 톰보이 스타일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물론, '라이센스 투 킬'에는 루피라는 본드걸을 연기한 미국 여배우, 탈리사 소토(Talisa Soto)도 있다. 톰보이 스타일의 캐리 로웰과 여성적인 탈리사 소토가 'Nice & Smooth' 콤비를 이룬 것이다.
그러나, 연기력이 받쳐주지 않았다. 밝고 화려한 분위기의 영화였다면 바보같은 부분 중 하나이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었을 지 모르지만 '라이센스 투 킬'은 제법 진지한 분위기의 스릴러 영화였기 때문에 탈리사의 어설픈 연기를 그냥 지나치기 힘들었다.
미국인 본드걸은 1997년 영화 '투모로 네버 다이스(Tomorrow Never Dies)'에서 서포팅 본드걸로 돌아온다. 제임스 본드(피어스 브로스난)의 옛 애인, 패리스로 출연한 미국 여배우 테리 해처(Teri Hatcher)다.
테리 해처는 질 세인트 존, 라나 우드의 재림으로 보일 정도로 '다이아몬드는 영원히' 본드걸들과 이미지가 비슷했다. 말하는 투, 목소리, 성격, 행동 등 여러 면에서 질 세인트 존과 라나 우드를 다시 보는 듯 했다. 유머러스한 수다쟁이 본드걸이 다시 돌아온 것이다. 당장 여기서부터 감점이다.
그런데 본드와의 러브씬을 앞두고 주고받는 멜로드라마틱한 대사에서 어리둥절. 시작할 때는 명랑하고 유머러스했는데 러브씬을 앞두고는 갑자기 유치할 정도로 분위기를 잡는 멜로드라마형으로 변신하더라. 코믹 릴리프 역할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란 말이야? 여기서 또 감점.
그렇다고 테리 해처가 매력적인 여배우가 아니라는 의미는 아니지만 그녀의 본드걸 캐릭터는...
피어스 브로스난 시절의 특징 중 하나는 제법 유명한 여배우들이 본드걸로 자주 캐스팅되었다는 점이다. '투모로 네버 다이스'의 양자경과 테리 해처가 그랬고, '언리미티드(The World Is Not Enough)의 소피 마르소(Sophie Marceau)와 드니스 리처드(Denise Richards)도 마찬가지다.
또 한가지 특징은, 피어스 브로스난 영화에선 본드걸이 항상 '투톱'이었고, 둘 중 하나는 거의 항상 미국인 여배우였다는 점이다('골든아이(GoldenEye-1995)'는 제외). '투모로 네버 다이스'에 테리 해처가 있었다면 '언리미티드'에는 드니스 리처드가 있는 식이다.
하지만, '언리미티드'에서 드니스 리처드가 연기한 크리스마스 존스도 실패작으로 꼽힌다. 일부는 크리스마스 존스를 역대 최악의 본드걸로 꼽기도 한다. 쓸데 없이 라라 크로프트 커스튬을 입고 나와 설친 것을 제외하고는 한 게 없기 때문이다.
과연 드니스 리처드가 최악의 본드걸일까?
최악까지는 아닌 지도 모른다. 머리카락 하나 들어갈 정도의 틈은 있지 않을까.
크리스마스 존스는 한마디로 재앙수준의 캐릭터였지만 미국 틴에이져들을 끌어들이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것만은 인정해야 할 듯 하다.
피어스 브로스난의 마지막 제임스 본드 영화 '다이 어나더 데이(Die Another Day-2002)'도 2명의 본드걸이 나오며, 그 중 하나는 미국인 여배우다. 영국배우, 로자먼드 파이크가 MI6 에이전트, 미란다 프로스트로 나왔고, 미국 여배우 할리 베리(Halle Barry)는 NSA 에이전트 징크스를 연기했다.
할리 베리는 미스 아메리카 출신에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까지 받은 미모와 연기력을 겸비한 수퍼스타 배우다.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 무조건 훌륭한 본드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할리 베리를 캐스팅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녀가 연기한 캐릭터가 워낙 우스꽝스러웠던 바람에 죽을 쒔으니까. 그래도 할리 베리가 007 시리즈에 애정을 갖고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긴 하지만 그녀가 연기한 리딩 본드걸, 징크스는 재앙수준의 본드걸이었다.
한가지 기억해둘 게 있다면, 할리 베리가 007 시리즈 첫 번째 흑인 리딩 본드걸이었다는 사실이다. 흑인 여배우들이 007 시리즈에 본드걸로 출연한 적은 있었지만 리딩 본드걸을 맡은 건 '다이 어나더 데이'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징크스가 바닥권 본드걸에 속하는 것은 변함없다.
지금까지는 여기까지가 전부다. 다니엘 크레이그(Daniel Craig)의 '카지노 로얄(Casino Royale)'과 '콴텀 오브 솔래스(Quantum of Solace)'엔 미국 여배우가 출연하지 않았다. 안젤리나 졸리(Angelina Jolie), 제시카 비엘(Jessica Biel) 등 몇몇 미국 여배우들이 본드걸 후보로 오르내리긴 했으나 아직까지는 미국인 본드걸이 나오지 않았다.
문제는 '본드23'이다. 이미 작년부터 '본드23'의 로케이션 중 한 곳이 미국일 것이라는 루머가 나돌았던 만큼 미국인 본드걸도 돌아올 때가 된 것 같아 보인다. 지금 나돌고 있는 제니퍼 애니스턴 루머는 단지 루머일 뿐 실현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만 다른 미국 여배우가 본드걸이 될 가능성은 여전히 높은 편이다.
그게 무슨 문제냐고?
007 시리즈 팬이라면 걱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미국 로케이션인 007 영화와 미국인 본드걸 모두 평균수준 또는 그 이하라는 것을 알고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007 시리즈가 미국을 배경으로 하고, 미국인 본드걸이 나온다는 것은 본드팬들에겐 그다지 반가운 소식이 아니다.
제임스 본드 시리즈 원작자, 이언 플레밍(Ian Fleming)은 미국을 좋아했고, 소설에서도 미국을 우호적으로 묘사했다. 그런데 영화 시리즈는 프로듀서들이 1탄부터 지금까지 줄곧 미국인이었는데도 미국 로케이션이거나 미국인 본드걸이 나오기만 하면 맥이 빠져 버린다. 알버트 R. 브로콜리(Albert R. Broccoli), 마이클 G. 윌슨, 바바라 브로콜리 모두 미국인인데 007 시리즈가 미국으로 오기만 하면, 미국인 본드걸이 나오기만 하면 후질구레해 진다. 그 이유가 무엇인는 모르겠어도 007 시리즈와 미국이 매치가 잘 안되는 것만은 분명하다.
때문에 미국인 본드걸 캐스팅 루머가 나오면 긴장할 수밖에 없다. 또 이상해지는 게 아니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미국인 본드걸 결사반대'라는 건 아니지만 007 시리즈와 미국인 본드걸의 히스토리가 그다지 섹시하지 않은 만큼 미국인 여배우를 꼭 캐스팅해야겠다면 보다 신중하게, 제대로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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