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제임스 본드는 술과 여자를 즐기며 살인을 하는 타락한 살인자일까?
우선 '살인'부터 짚어보기로 하자. 살인은 제임스 본드의 직무 설명서에 포함되어 있다. 그가 원하든 원치않든 상관없이 살인은 직무의 한 부분이므로 무기를 사용하고 싶지 않거나 살인을 하고싶지 않다면 직업을 잘못 고른 것이 된다. 제임스 본드의 직업은 살인을 피해가기 힘든 것이기 때문이다.
이언 플레밍(Ian Fleming)의 제임스 본드 소설, '골드핑거(Goldfinger/1959)'의 한 부분을 그대로 옮기겠다:
It was part of his profession to kill people. He had never liked doing it and when he had to kill he did it as well as he knew how and forgot about it. As a secret agent who held the rare double-O prefix - the licence to kill in the Secret Service - it was his duty to be as cool about death as a surgeon. If it happened, it happened. Regret was unprofessional - worse, it was death-watch beetle in the soul.이언 플레밍의 소설에 의하면 제임스 본드는 살인을 좋아한 적이 없지만 피할 수 없는 경우에는 살인을 하고 깨끗하게 잊는다. 또, 살인을 하게 되더라도 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으로 받아들이며, 후회하는 것은 프로페셔널답지 않다고 했다.
그래도 여전히 술과 여자를 좋아하는 방탕한 생활을 하는 것은 맞지 않냐고?
이것도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술과 여자문제만을 볼 게 아니라 살인이 직무의 일부이고, 자신 또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처지인 캐릭터가 이 모든 스트레스를 어떻게 견딜 수 있을지 생각해 봐야 한다. 직업이 이러한 만큼 그의 사생활도 우중충할 텐데 밤낮 울상만 짓고는 오래 버틸 수 없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떻게든 머리를 비울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머리에 구멍을 낼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언 플레밍의 표현대로 어떻게 'Forget about it' 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복잡한 속내를 쉽게 드러내면 이상해 진다. 제임스 본드라고 고민과 스트레스가 없을 리 없지만 나약하게 이를 드러내 보이는 것은 그답지 않다. 그저 눈빛과 표정으로 스쳐지나는 정도면 충분하다.
때문에 영화 '골든아이(GoldenEye/1995)'에서 제임스 본드가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는 씬은 문제가 있다. 과거의 007 시리즈에서 제임스 본드가 실패와 좌절을 모르는 수퍼 캐릭터로 묘사되었던 것을 바꾸려는 것은 좋은데 방법이 틀렸다.
그렇다면 제임스 본드는 어떤 방법으로 스트레스를 풀어야 어울릴까?
혼자 술을 마시는 건 어떨까?
피어스 브로스난(Pierce Brosnan)의 두 번째 제임스 본드 영화 '투모로 네버 다이스(Tomorrow Never Dies/1997)'에서 본드가 보드카(Vodka)를 스트레이트로 마시는 장면이 나온다.
다니엘 크레이그(Daniel Craig)의 두 번째 제임스 본드 영화 '콴텀 오브 솔래스(Quantum of Solace)'에서는 혼자서 베스퍼 마티니를 6잔씩이나 마신다.
제임스 본드처럼 당장 내일 어찌될 지 모르는 불확실함 속에서 살아가는 캐릭터라면 '내일은 없다' 식으로 즐기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다.
그러나, 영화에서 유치하게 대사로 읊을 필요는 없었다.
그렇다면 여자관계는?
사실 제임스 본드는 여자관계에 문제가 있다. 첫 번째 제임스 본드 소설 '카지노 로얄(Casino Royale/1953)'에서부터 본드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베스퍼 린드가 그를 배신하고 자살했으니 본드의 여자관계가 순탄치 않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일까? 이언 플레밍의 소설에서는 본드와 함께 했던 여자들이 다들 떠나간다. 본드가 다른 여자를 찾아 떠나는 게 아니라 여자들이 본드를 남겨두고 떠난다. 이별의 이유는 제임스 본드의 성격탓 등 여러 가지다. 여자는 많이 만나지만 깊은 관계로 발전할 여자를 찾는 재주는 없는 지도 모른다.
그래도 결혼에 성공하긴 한다. 제임스 본드는 플레밍의 1963년 소설, '여왕폐하의 007(On Her Majesty's Secret Service)'에서 트레이시와 어렵사리 결혼에 성공한다. 그러나, 트레이시는 결혼식을 마치자마자 살해당한다.
미래가 불투명한 직업에 종사하고, 백년가약을 맺을 파트너를 찾는 게 힘든 데다, 신부감을 어렵게 찾더라도 살해당하는 판이다. 그렇다면 가볍게 즐길 상대를 찾는 게 차라리 더 나을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에 한가지 오해가 따라붙는다. 제임스 본드의 여성 편력은 제임스 본드의 어드벤쳐에 많은 미녀들이 뛰어들기 때문이지 제임스 본드가 여자 꽁무니를 쫓는 게 아니지만 '제임스 본드는 여자만 보면 술잔 들고 따라붙는 캐릭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 제임스 본드가 가는 곳마다 미녀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제임스 본드 시리즈의 가장 중요한 판타지적인 요소 중 하나이지 제임스 본드의 플레이보이 기질은 중요한 게 아니다.
물론, 007 시리즈가 영화에서 오해받을 '짓'을 한 것은 사실이다. 불필요한 베드씬을 통해 플레이보이 이미지를 지나치게 강조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쓸 데 없는 베드씬이 007 시리즈를 이상하게 만들어 놓았다.
무의미한 섹스도 제임스 본드의 스트레스 해소 방법 중 하나로 볼 수 있지만 이런 식으로 표현할 필요는 없다. 앞으로 나올 007 시리즈에서 반드시 사라져야 할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이런 베드씬이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카지노 로얄'과 '콴텀 오브 솔래스'에서는 이러한 베드씬이 나오지 않았으니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듯 하다.
자, 그렇다면 다시 한번 묻겠다.
제임스 본드는 타락한 살인자일까? 제임스 본드가 여자를 끼고 마티니를 마시며 살인을 즐기는 타락한 캐릭터일까? 아니면 쉽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프로페셔널'일까?
스파이 캐릭터는 지치고 스트레스에 찌든 모습이 보다 리얼하게 보이지 않냐고?
그 정도는 초등학생도 알고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스트레스를 해소할 방법들을 찾아가며 충실히 근무하는 게 프로페셔널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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