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4월 7일 화요일

만약 내가 '콴텀 오브 솔래스'를 만들었다면

다니엘 크레이그(Daniel Craig)의 두 번째 제임스 본드 영화, '콴텀 오브 솔래스(Quantum of Solace)'를 보면서 왠지 엉성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는지 묻고 싶다. 아주 잘 만든 제임스 본드 영화는 물론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잘못 만든 영화도 아닌데 왠지 성의없게 만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는지?

참고: 스포일러가 있으므로 영화를 아직 안 본 사람들은 훠어이~ 오케이?

미식축구 경기가 막 시작했다. 킥 리터너가 오프닝 킥오프를 22야드까지 리턴한다. 스페셜팀이 벤치로 돌아오고 처음으로 공격팀이 필드에 나온다.

"1ST AND 10 AT 22 YARD LINE!"

드디어 첫 번째 공격을 시도하는 순간!

그런데, 갑자기 호르라기 소리가 들리더니 옐로 플래그가 날아오른다.

"FALSE START! OFFENCE. NUMBER 76. 5 YARD PENALTY. STILL 1ST DOWN!"

'콴텀 오브 솔래스' 얘기하다가 갑자기 왜 미식축구로 넘어가냐고?

'콴텀 오브 솔래스'가 'FALSE START'으로 시작한 제임스 본드 영화기 때문이다.

'콴텀 오브 솔래스'는 '카지노 로얄(Casino Royale)'에 이어 건배럴씬으로 시작하지 않는 두 번째 제임스 본드 영화다. 덕분에,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허전함을 느끼게 만든다.

'카지노 로얄'도 건배럴씬으로 시작하지 않았지만 '콴텀 오브 솔래스'만큼 허전하지는 않았다. 영화가 흑백으로 시작하면서 건배럴씬을 생각할 겨를을 주지 않았다. 'WHAT THE HELL'S GOING ON?' 하고 있는데 '탕!' 하더니 메인 타이틀로 넘어갔으니까.

그런데 '콴텀 오브 솔래스'는 사정이 달랐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산과 호수가 보이는 풍경을 보여주더니 바로 카체이스씬으로 넘어갔다. 이번엔 흑백도 아니었다. 007 제작진은 '카지노 로얄'도 건배럴씬 없이 시작했으니 영화관객들이 '새로운 오프닝'에 익숙해졌으리라 판단한 듯 하다. 하지만, '건배럴씬이 없으니 이렇게 썰렁하구나'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앞부분이 잘려나간 불법복제 비디오를 보는 기분이었다고 할까? '카지노 로얄'은 건배럴씬으로 시작하지 않아도 크게 허전하게 보이지 않도록 준비를 잘 했지만 '콴텀 오브 솔래스'는 나와야 하는 건배럴씬을 빼버린 것처럼 어색해 보였다.



문제는 오프닝이 전부가 아니다. 마무리도 석연치 않았다. 산과 호수 경치로 시작해서 카체이스씬으로 이어지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메인 타이틀로 넘어가는 부분을 잘못 정하는 바람에 프리 타이틀(PRE TITLE) 씬이 도중에 끊어진 것처럼 보였다.

제작진이 왜 이렇게 했는 지는 대충 짐작이 간다. 프리 타이틀 씬을 길게 만들지 않고 카체이스씬 하나만으로 짧고 화끈하게 만들면서 익사이팅한 분위기를 주제곡이 흐르는 메인타이틀씬으로 이어지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끊어서는 안 될 데서 끊었다는 것이다.

프리 타이틀 씬을 카체이스 하나로 끝낼 생각이었다면 본드의 아스톤 마틴 DBS를 추격하던 알파로메오가 절벽으로 떨어지는 데서 끊고 메인 타이틀로 넘어갔어야 했다. 거기까지 3분이 조금 넘는 게 전부기 때문에 프리 타이틀치고 너무 짧은 감이 있지만 격렬한 카체이스씬으로 굵고 짧게 넘어가려고 했다면 차라리 거기가 나았다.





하지만, 007 제작진은 본드가 박살난 아스톤 마틴을 끌고 안가에 도착한 뒤 트렁크를 여는 데서 끊었다. 격렬한 카체이스의 익사이팅한 기운이 다 가신 뒤에 끊은 것.

그렇다고 아주 이해가 안되는 건 아니다. '콴텀 오브 솔래스'가 전작, '카지노 로얄'과 줄거리가 이어지는 만큼 트렁크에 태운 인물의 정체를 공개하면서 메인 타이틀로 넘어간다는 발상인 듯 하다. 하지만, 프리 타이틀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도중에 자르고 메인 타이틀로 넘어가는 것처럼 어색해 보이게 됐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프리 타이틀을 끊고 메인 타이틀로 넘어갔어야 옳았을까?

작년에 '콴텀 오브 솔래스' 트레일러가 공개되었을 때 '혹시 이것이 새로운 건배럴씬?'이라는 포스팅을 한 적이 있다. 트레일러가 공개되기 이전부터 본드와 미첼의 추격전까지 프리 타이틀 씬에 들어간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본드가 미첼을 쏘면서 건배럴씬으로 이어진 뒤 메인 타이틀로 넘어가는 게 아니냔 생각을 했던 것.

그렇다. 프리 타이틀 씬은 본드가 에이전트 미첼을 쏘는 데까지 계속되었어야 옳았다. 영화의 첫 15분 동안의 내용을 보더라도 메인 타이틀로 가장 깔끔하게 넘어갈 수 있는 데는 여기밖에 없다.


그런데 프리 타이틀이 거기까지였다면 너무 길지 않냐고?

1999년 영화, '언리미티드(The World Is Not Enough)'의 프리 타이틀 씬은 14분이 넘었다. 그러므로, '콴텀 오브 솔래스' 프리 타이틀 씬이 10분을 넘겼더라도 크게 유별나다고 할 것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007 제작진은 프리 타이틀과 메인 타이틀을 멋지게 연결할 수 있도록 다 만들어 놓고 사용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몇 가지를 이유로 들 수 있겠지만 편집이 형편없는 수준이었던 게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편집에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다. 본드와 에이전트 미첼의 루프탑 체이스 씬도 고개를 젓게 만든다. 처음엔 그런대로 볼만 했는데 종이 있는 건물 옥상에서 벌어지는 격투씬이 분위기를 망쳐놓았다. 옥상에 숨어있던 미첼이 본드를 덮치는 그 씬 말이다. 종이 울리고, 비둘기가 날아가고, 권총을 들고 있던 미첼이 본드를 쏘지 않고 총으로 때리려고 하던 그 장면 말이다. 미첼은 본드를 쏠 기회가 충분히 있었는데도 쏠 생각을 하지 않고 그 대신 총으로 때릴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아니 도대체 '콴텀 오브 솔래스'가 6~70년대 영화도 아니고, 저예산 스릴러도 아닌데 액션 시퀀스가 이런 수준밖에 안 된단 말이냐!

본드와 미첼이 격투를 벌이다 함께 유리를 깨고 떨어진다는 설정에 맞추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는 있다. 하지만, 미첼이 총이 없었다면 이해하기가 좀 더 수월했을 것이다. 맨손으로 본드를 공격했거나, 몽둥이를 휘둘렀다면 말이다.

미첼이 총이 없었다면 바로 이어지는 떨어뜨린 각자의 권총을 집으려고 하는 씬을 찍을 수 없었을 것이다. 본드와 미첼의 권총 두 자루가 모두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문제도 조금만 수정하면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다. 본드와 미첼이 본드가 떨어뜨린 권총 하나를 놓고 쟁탈전을 벌이는 것으로 바꾸면 그만이다.

이렇게 한번 바꿔보자.

본드와 미첼이 본드의 권총을 서로 집으려고 쟁탈전을 벌이다가 권총이 바닥에 떨어지고 본드는 밧줄에 거꾸로 매달리게 된다. 미첼의 목적은 도망가는 것이지 본드를 죽이는 게 아니므로 밧줄에 거꾸로 묶여 매달려 있는 본드를 내버려 두고 도망가려 한다. 그러자 본드가 가까스로 바닥에 떨어진 권총을 집어 미첼을 쏜다.

이렇게 했더라면 더 나았을 것 같지 않수?

007 시리즈 제작진에게 딱 한마디 하고싶은 말이 있다: "DO NOT FORCE IT!". 격렬한 격투와 서스펜스도 좋지만 억지로 만들어 놓을 필요는 없다.

어찌됐든 문제의 루프탑 체이스 마지막 부분을 캡쳐 이미지로 다시 한번 봅시다.


▲옥상에 올라와 종을 치고...


▲숨어있는 미첼을 찾는데...


▲미첼이 본드를 공격한다...


▲권총을 든 손으로...


▲그리고 함께 떨어지는데...


▲바로 여기가 프리 타이틀의 마지막이어야 했다.

그렇다고 프리 타이틀에만 불만이 있는 건 아니다. 메인 타이틀에도 있다.

'콴텀 오브 솔래스'는 전체 007 시리즈 중 런타임이 가장 짧은 영화다. 역대 007 시리즈 중 가장 길었던 전작 '카지노 로얄'과 정 반대인 것. 이런데도 잭 화이트(Jack White)와 앨리씨아 키스(Alicia Keys)가 부른 주제곡, 'Another Way to Die'를 메인 타이틀에 사용하기 위해 더욱 짧게 편집할 필요가 있었을까? '빨리빨리'는 한국사람들만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콴텀 오브 솔래스'를 보니까 꼭 그런 것만은 아닌 듯 하더라.

메인 타이틀 비주얼도 볼 게 없었다. '카지노 로얄'에 나오지 않았던 '메인 타이틀 걸'들이 되돌아왔다는 것 하나를 제외하곤 정성을 들여 만든 것 같지 않았다. 가뜩이나 영화가 짧은데 메인 타이틀에 나오는 주제곡을 짧게 편집한 데다 비주얼도 볼 게 없는 수준인 것이 만들기 싫은 걸 마지못해 집어넣은 것처럼 보였다. 메인 타이틀 씬도 모든 제임스 본드 영화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007 시리즈 전통 중 하나이니 어떻게서든 짧고 볼품없게 만들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번엔 'Bond, James Bond'라는 대사가 안 나온다"는 걸 자랑하던 사람들이 만든 영화가 '콴텀 오브 솔래스'이므로 모든 걸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메인 타이틀 이후부터는 어느 정도 차분해 진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불만은 첫 15분에 몰려있다고 할 수 있다.

메인 타이틀 이후에 눈에 띄는 문제점 중 하나는 이전 포스팅에서 언급했던 '침착하지 않은 제임스 본드 캐릭터'다. 제임스 본드가 위기에 몰리고, 때론 당황할 때도 있다는 것은 전혀 문제될 게 없지만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침착성을 잃고 흥분한 듯한 모습을 보이는 건 곤란하다. 주위가 시끄럽거나 대화 상대가 멀리 떨어져 있는 관계로 큰 목소리로 대화를 해야 하는 것은 크게 문제될 게 없으나 007 시리즈에서 제임스 본드가 "엎드려!"를 외치면 몹시 유치해 보이게 된다.



또 한가지 문제는 정치적인 대화를 주고받는 씬이 나온다는 것이다. 007 시리즈는 정치적인 이야기를 심각하게 주고받는 분위기의 첩보영화가 절대 아닌 데도 007 제작진은 '콴텀 오브 솔래스'에 쿠데타가 어쩌구, 막시스트가 저쩌구 하는 대사를 집어넣었다. 9-11 테러와 이라크 전쟁 등을 거치면서 유행처럼 퍼진 정치적인 영화 만들기 놀이에 007 시리즈까지 휩쓸린 듯 하다.

문제는 이런 놀이가 이젠 한물 갔다는 것이다. 테러, 전쟁, 지구온난화 등을 다룬 어둡고, 무겁고, 정치적인 내용의영화가 너무 많이 나왔기 때문에 더이상 새로울 게 없는 데다, 버락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그 이전과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불황까지 겹치면서 일반 관객들은 지나치게 사실적이고 골치아픈 내용의 영화를 기피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일부 영화 평론가들은 미국에서 '콴텀 오브 솔래스'보다 2~3주 가량 먼저 개봉했던 레오나도 디카프리오 주연의 스파이 영화 '바디 오브 라이스(Body of Lies)'의 흥행실패 원인을 여기서 찾기도 했다.

007 제작진은 원작의 제임스 본드 캐릭터를 제대로 살려내는 방법 중 하나로 '콴텀 오브 솔래스'를 전편보다 더욱 암울한 분위기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원작의 제임스 본드는 차갑고, 어둡고, 무뚝뚝하고, 이것 때문에 동거하던 여자와 헤어지기도 하는 캐릭터였지만 영화 시리즈에서는 이러한 모습이 제대로 묘사된 적이 없는 만큼 '바로 이것이 원작의 제임스 본드다!'라는 미명 하에 약간 오버하기로 결정한 듯 하다. 하지만, 차라리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북미 박스오피스에서 보다 나은 성적을 거두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뭐든지 오버하는 건 좋지 않다.



또 한가지 신경에 거슬리는 건 매티스의 죽음이다. 매티스가 등장하는 데서 부터 영화가 볼만했는데 그를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고 어이없게 죽여버렸기 때문이다.



이 장면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노래가 하나 있다. 'ANOTHER WAY TO DIE'가 아니라 이 노래가 주제곡이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구려.


그렇다고 맘에 드는 게 하나도 없었던 건 아니다. 제임스 본드가 두고두고 상대할 수 있을만 한 거대한 범죄조직을 탄생시킨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 하다. 스펙터(SPECTRE)를 대신할 현대적이면서도 막강한 범죄조직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직의 명칭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콴텀(Quantum)'? '콴텀 오브 솔래스'를 제목으로 정한 것 까지는 문제될 게 없지만 넌센스 같은 제목에 센스를 찾아주기 위한 방법으로 범죄조직의 명칭을 '콴텀'으로 한 건 실수다. 스펙터를 대신할 거대한 범죄조직을 탄생시킬 생각이었다면 보다 그럴싸 한 이름을 붙였어야지 급한대로 제목의 일부를 떼어다 붙인 건 잘못이다.

그러고 보니 맘에 드는 것보다 들지 않는 게 더 많은 듯 하다. '콴텀 오브 솔래스'는 다니엘 크레이그가 제임스 본드라는 것을 제외하곤 건질 게 많지 않은 영화라고 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그래도 전체 007 시리즈 중에서 탑10에 들만한 영화라고 본다. 지금까지 나온 007 시리즈가 모두 22편이니 탑11에 든다고 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잘 만든 영화는 아니고, 완벽한 영화는 더더욱 아니지만 그래도 평균 이상은 되기 때문이다.

다만 본드팬들의 높았던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게 문제다. '본드23'에서는 007 제작진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기대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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