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아놀드 슈왈츠네거가 나오지 않는 '터미네이터' 영화가 나왔다.
시리즈 네 번째 영화인 '터미네이터 살베이션(Terminator Salvation)'이 바로 그것이다.
슈왈츠네거가 나오지 않는데 '터미네이터' 영화로 보이기나 하겠냐고?
슈왈츠네거가 없는 '터미네이터' 영화를 상상하기 쉽지않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문제는 슈왈츠네거도 세월이 흐르면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늙는다는 것이다. 슈왈츠네거가 시리즈의 얼굴이라지만 그렇다고 백발노인이 되더라도 지팡이을 짚어가면서 터미네이터 노릇을 해야 하는 건 아니겠지?
게다가 그는 현재 캘리포니아 주지사다. 요즘 그다지 인기가 높지않은 것 같은 게 흠이지만...
슈왈츠네거가 더이상 터미네이터로 출연하지 못하게 되었다면 시리즈를 끝내는 게 차라리 낫지 않냐고?
어떤 면에서 보면 차라리 그렇게 하는 게 깔끔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슈왈츠네거 하나 때문에 포텐셜이 있는 프랜챠이스를 날려버릴 필요는 없다. 슈왈츠네거의 시대를 접고 그 다음으로 넘어가는 게 완전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늙은 터미네이터' 대신 저항군 리더로 성장해 가는 젊은 존 코너(크리스챤 베일)를 주인공으로 대체하면 되니까.
하지만, 존 코너는 인간이지 터미네이터가 아니지 않냐고?
그렇다. 이번에 개봉한 '터미네이터 살베이션'은 싸이보그가 아닌 인간이 주인공을 맡은 첫 번째 '터미네이터' 영화다. 제목엔 여전히 '터미네이터'가 들어갔지만 주인공은 터미네이터가 아닌 인간인 것.
물론, 여기에도 물음표를 달 수 있다. 영화를 보고나면 존 코너가 주인공인지, 아니면 마커스 라이트(샘 워딩턴)가 주인공인지 살짝 헷갈리기 때문이다.
자, 그렇다면 영화는 어땠을까?
예상했던대로 볼거리는 지지고 볶는 배틀씬밖에 없었다. 엉성하고 매우 단조로운 스토리를 제외하고 나면 초대형 로봇, 물속을 헤엄치는 로봇, 모터싸이클처럼 생긴 로봇 등 다양한 기계들과의 배틀씬이 전부였다. 물론 액션은 풍부한 편이었고, 논스톱 액션영화라 부를 만 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만한 씬이 없었고, 단조로운 레이스 트랙을 도는 기분이었을 뿐 비좁은 절벽길을 달리는 스릴이 없었다. 스토리도 그랬지만 액션도 클라이맥스가 없었다.
게다가, 등장하는 기계들이 워낙 다양했기 때문인지 '터미네이터' 영화가 아니라 '싸이보그 버전 스타쉽 트루퍼스'에 가깝게 보였다. 때로는 '트랜스포머스(Transformers)'의 배틀씬과도 겹쳐지더라. 제작진이 배틀씬을 쿨하게 만들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한 것은 인정할 수 있지만 얼마나 새롭고, 참신하며, '터미네이터' 영화다운가를 따져보면 후한 점수를 주기 힘들다. 이전 공상과학영화들에 나왔던 장면들을 짜깁기한 게 전부였기 때문이다.
제작진들도 '터미네이터'다운 것이 부족하다고 느꼈던 것일까? 제작진은 "Come with me if you wanna live", "I'll be back"과 같은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유명한 대사, '터미네이터' 1, 2탄에 사라 코너로 출연했던 린다 해밀튼 사진, 그리고 Guns 'N Roses의 '터미네이터 2' 주제곡, 'You Could Be Mine' 등을 동원하며 '터미네이터 살베이션'을 지금까지 나온 터미네이터 시리즈와 연결시키려 노력했다. 하지만 이런 오마쥬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사실, 그다지 필요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영화를 유치하게 만들기만 했다. '터미네이터 살베이션'에 필요했던 건 세련된 스토리였지 유치한 오마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존 코너(크리스찬 베일)가 싸이보그에게 "너희가 어머니, 사라 코너를 죽이려 했고, 아버지, 카일 리스를 살해했다"고 하는 유치한 대사도 고개를 젓게 만들었다. 요새 틴에이저들이 아놀드 슈왈츠네거 시절의 '터미네이터' 시리즈 줄거리를 잘 모를 수도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이긴 하지만, 굳이 이런 식으로 무슨 프레스 브리핑 하듯 썰렁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었을까? 같은 내용을 설명하더라도 다른 방법으로 할 수 있지 않았냐는 것이다.
만약 아놀드 슈왈츠네거가 터미네이터로 출연했다면 저렇게 할 필요는 없지 않았겠냐고?
그랬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슈왈츠네거가 터미네이터로 또 출연한다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잊어선 안된다. '터미네이터' 영화라고 해서 반드시 슈왈츠네거가 나와야 한다는 법도 없다. 슈왈츠네거 없이도 '터미네이터' 시리즈는 충분히 계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터미네이터 살베이션'이 '터미네이터' 영화처럼 보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아놀드 슈왈츠네거가 주인공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영화가 전체적으로 시시했기 때문이다. 터미네이터(아놀드 슈왈츠네거)가 아닌 존 코너(크리스찬 베일)를 주인공으로 삼는다는 아이디어까지는 좋았는데 '좋은 아이디어'는 거기까지가 전부였을 뿐 나머지가 받쳐주지 않았다.
그래도 크리스찬 베일은 제 역할을 할 만큼 했다. 슈왈츠네거 이후의 새로운 '터미네이터' 프랜챠이스를 이어갈 배우로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베일이 연기한 존 코너가 기계들과의 전투를 지휘하는 게 전부인 단조로운 캐릭터에 그쳤다는 것이다. 영화 줄거리부터 인간과 기계의 전투쪽에 포커스를 맞추게 되어있으니 어쩔 수 없었는지 모르지만 흔해빠진 SF 전투영화의 평범한 전사 캐릭터 이상이 아니었다.
마커스 역을 맡은 호주배우, 샘 워딩턴(Sam Worthington)도 괜찮았다. 워딩턴은 007 제작진이 피어스 브로스난의 뒤를 이을 새로운 얼굴을 물색할 때 제임스 본드 후보로 거론되었던 배우다. 제임스 본드를 맡기엔 키가 약간 작다는 게 문제가 될 수 있겠지만 차기 제임스 본드 후보 중 하나로 기억해둘 만한 배우다.
그런데 마커스라는 캐릭터를 왠지 어디서 본 것 같다고?
마커스의 사연이 90년대 영화 '데몰리션 맨(Demolition Man)'과 비슷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100%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비슷한 부분이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비디오게이머들에게는 또다른 캐릭터가 떠올랐을 수 있다. 일본 게임 메이커, 남코(Namco)의 플레이스테이션2용 RPG, '제노사가(Xenosaga)'에 나왔던 지기(Ziggy)라는 캐릭터다. 지기는 죽은 뒤 싸이보그가 된 캐릭터다.
뿐만 아니라, 카일 리스(앤튼 옐친)와 꼬마소녀, 스타(제이다그레이스)는 '제노사가'의 주니어와 모모를 연상시킨다. 카일 리스와 스타가 항상 붙어다니고, '싸이보그' 마커스가 이들을 구출하려 한다는 스토리도 왠지 '제노사가'와 비슷해 보인다.
'터미네이터 살베이션'의 모터싸이클씬이 스퀘어의 CGI 애니메이션 '파이널 판타지 VII: 애드벤트 칠드런(Final Fantasy VII: Advent Chldren)'을 떠오르게 한다는 것은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
그렇다. '터미네이터 살베이션'은 비디오게임에서도 여러가지를 빌려왔다. SF 판타지 비디오게임 분위기를 내려고 한 것이다. 청소년들이 좋아할 만한 SF 액션영화를 만드는데 비디오게임 만큼 참고하기 좋은 게 어디 또 있을까?
그런데 제작진이 '터미네이터'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잊은 것 같다는 게 문제다.
폭력수위를 낮추고, PG-13 레이팅을 받았다는 것까지는 문제될 게 없었다. 첫 번째 '터미네이터' 영화처럼 죽음이란 걸 모르는 끈질긴 싸이보그와의 처절한 사투를 기대했던 것도 물론 아니다. '터미네이터 2'에서부터 이런 것을 포기했으니까. 그래도, '터미네이터 살베이션'은 좀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명색이 '터미네이터'인데 킬러 싸이보그와의 사투보다 인간 대 기계의 전투를 그린 전쟁영화를 패밀리 어드벤쳐 비디오게임 수준으로 만들면 곤란하지 않냐는 것이다.
아쉽게도 '터미네이터 살베이션' 역시 '사라 코너 크로니클'과 다를 게 없는 수준이었다. 틴에이저들을 겨냥한 SF물이라는 것부터 시작해서 전반적으로 시시하다는 것까지 공통점이 아주 많았다. '터미네이터 살베이션'이 이런 수준에서 그치지 않기를 바랬는데 '역시나' 이렇게 되고 말았다. 아놀드 슈왈츠네거가 주인공이었더라도 별 소용 없었을 것이다. 폭력수위를 높혀 PG-13이 아닌 R등급을 받았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영화를 보고나니 차라리 PG-13을 받은 게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렇게 아동틱한 패밀리 어드벤쳐 영화로 R등급을 받았다면 오히려 웃음거리가 되었을 테니까. '어울리지도 않는 R등급을 억지로 받으려고 고생 많이 했다'는 비아냥을 듣느니 까놓고 PG-13을 받은 게 차라리 나았다.
그렇다고 '터미네이터 살베이션'이 낙제점을 받을 정도로 한심한 영화라는 건 아니다. 굳이 점수를 주자면 턱걸이 C 정도라고 할까?
역시 1984년 1탄 만한 '터미네이터' 영화는 다시 나오지 않는 것일까?
현재로써는 그렇게 보인다. '터미네이터' 시리즈도 제임스 본드', 배트맨, '스타 트렉' 시리즈처럼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려는 듯 하지만 익사이팅한 리부팅은 실패한 듯 하다. 제임스 본드, 배트맨, '스타 트렉'의 캡틴 커크와 스파크 등에 견줄 만한 캐릭터를 탄생시키지 못했다는 게 아마도 가장 큰 실패일 것이다. 성공적인 캐릭터를 탄생시키지 않는 한 성공적인 프랜챠이스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크리스찬 베일이 연기한 존 코너가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뒀다고 평가할 수 있겠지만 이 정도로는 시리즈의 미래가 밝아보이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터미네이터 살베이션'에 나왔던 노래 2곡을 들어보자.
첫 번째 곡은 Alice In Chains의 'Rooster'.
두 번째 곡은 Guns 'N Roses의 'You Could Be M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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