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이유에서 나는 액션영화를 보면서 악당을 응원하곤 한다. 악당이 더욱 교활하고 악랄해지고, 더욱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주인공(들)을 코너로 몰아붙이라고 속으로 주문을 외운다.
그래서 인지 "남들은 주인공을 응원하는데 너는 거꾸로 악당을 응원하느냐"는 소리도 들어봤다. 이럴 때마다 나는 "악당이 악랄해질 수록 그를 상대하는 주인공(들)이 더욱 빛난다는 걸 잊지 말라"고 한다.
그렇다면 제임스 본드 시리즈 악당들은 어떠할까? 지금까지 나온 22개의 제임스 본드 시리즈에 나온 22명 중에 누가 가장 쿨한 악당일까?
그래서 한 번 모아봤다.
(참고: 이번 포스팅에선 보스급만을 다뤘다)
22명의 악당 중에서 베스트를 뽑는 것인 만큼 워스트(Worst)부터 내려가기로 하자.
그렇다면 영예의 워스트는 누구?
22위: 구스타브 그레이브스(Gustav Graves) - '다이 어나더 데이(Die Another Day)'
'다이 어나더 데이'는 투명 자동차가 비디오게임 수준의 자동차 배틀을 하는 영화다. 구스타브 그레이브스도 그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칭얼대는 철없는 어린아이 같은 캐릭터였을 뿐 위협적이지도 않았고, 카리스마도 없었다.
21위: 휴고 드랙스(Hugo Drax) - '문레이커(Moonraker)'
드랙스 역으로 마이클 론스데일(Michael Lonsdale)을 캐스팅한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문레이커'가 우주에서 광선총을 쏘는 영화라는 게 문제. 영화 줄거리가 지나치게 황당해지는 바람에 망가진 케이스.
20위: 맥스 조린(Max Zorin) - '뷰투어킬(A View to A Kill)'
맥스 조린은 1964년에 골드핑거가 했던 것을 거의 그대로 따라한 것을 제외하고는 한 게 없는 캐릭터다. 영화는 지루했고, 악당은 따분했다. 그렇다. '뷰투어킬'은 듀란듀란이 부른 주제곡 빼곤 건질 게 없는 영화다.
19위: 카말 칸(Kamal Kahn) - '옥토퍼시(Octopussy)'
루이 조단(Louis Jourdan)은 영화를 잘못 골랐다. 다른 제임스 본드 영화에 나왔더라면 괜찮았을 지 모르지만 '옥토퍼시'의 카말 칸은 영 아니올시다 였다. 스티븐 버코프(Steven Berkoff)가 연기한 광기어린 소련군 장군은 인상적이었지만 루이 조단의 카말 칸은 존재감이 약했다.
18위: 프란시스코 스카라망가(Francisco Scaramanga) -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The Man With the Golden Gun)'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쓴 영국작가, 이언 플레밍(Ian Fleming)과 사촌지간인 크리스토퍼 리(Christopher Lee)가 제임스 본드 시리즈의 악역으로 출연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 역시도 영화를 잘못 고른 케이스에 속한다. 황금총은 쿨했지만 영화 줄거리가 너무 우스꽝스러웠고, 크리스토퍼 리의 스카라망가 연기도 점잖고 매너있는 정도를 넘어 지나치게 나긋나긋해 보였다. '이빨빠진 드라큘라 같았다'라고 할까?
17위: 엘리엇 카버(Elliot Carver) - '투모로 네버 다이스(Tomorrow Never Dies)'
스토리도 우스꽝스러웠지만 조나단 프라이스(Jonathan Pryce)가 연기한 엘리엇 카버도 악당이 아니라 코메디언처럼 보였다.
16위: 블로펠드(Blofeld) - '다이아몬드는 영원히(Diamonds Are Forever)'
제임스 본드의 숙적, 언스트 스타브로 블로펠드(Ernst Stavro Blofeld)는 007 시리즈에 모두 다섯 차례 나온다. 하지만, '위기일발(From Russia With Love)'과 '썬더볼(Thunderball)'에서는 얼굴을 가린 채 목소리만 나왔으며, 얼굴을 드러내고 악당으로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두 번 산다(You Only Live Twice)', '여왕폐하의 007(On Her Majesty's Secret Service)', '다이아몬드는 영원히(Diamonds Are Forever)'까지 모두 세 번이다. ('유어 아이스 온리(For Your Eyes Only)' 프리타이틀씬에 나왔던 대머리 휠체어맨은 '언오피셜'이므로 제외)
찰스 그레이(Charles Gray)의 블로펠드는 이 중에서 세 번째이자 마지막 버전 블로펠드다.
'두 번 산다(You Only Live Twice)'를 끝으로 007 시리즈를 떠났던 숀 코네리(Sean Connery)가 제임스 본드로 다시 돌아왔는데, 혼자 컴백한 게 아니었다. '두 번 산다'에서 제임스 본드를 돕던 윌리엄 헨더슨이라는 캐릭터로 출연했던 찰스 그레이도 007 시리즈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차이가 있다면, 코네리는 변함없이 제임스 본드였지만 찰스 그레이는 브로펠드로 변신했다는 점.
하지만, 찰스 그레이의 블로펠드는 이름만 '블로펠드'였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다소 괴기스러워보이는 느끼한 미소가 전부였을 뿐 위협적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찰스 그레이에게 007 시리즈 악역을 맡긴 것 자체는 문제될 게 없었겠지만 블로펠드는 아니었다.
15위: 도미닉 그린(Dominic Green) - '콴텀 오브 솔래스(Quantum of Solace)'
프랑스 배우, 매튜 아말릭(Mathieu Amarlric)이 '콴텀 오브 솔래스'에 악역으로 캐스팅되었다는 소실을 접했을 때 기대가 컸는데 영화를 보고나서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속내를 알 수 없이 미스테리하고 절대 믿을 수 없을 듯한 악당을 연기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콴텀 오브 솔래스'의 도미닉 그린은 뚜렷한 개성이 부족한 비지니스맨이 전부였다. 세계정복 야욕에 불타는 코믹북 수준의 악당이 아니라는 게 불행중 다행이지만 매튜 아말릭에게 기대했던 악당은 머리싸움에 강한 캐릭터였기 때문에 실망이 컸다.
14위: 칼 스트롬버그(Karl Stromberg) - '나를 사랑한 스파이(The Spy Who Loved Me)'
'나를 사랑한 스파이'에서 칼 스트롬버그를 연기했던 독일배우, 커드 여겐스(Curd Jurgens)는 '블로펠드가 될 뻔한 사나이'다. 007 제작진이 스펙터(SPECTRE)라는 범죄조직과 두목, 블로펠드를 영화에 더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면서 궁여지책으로 블로펠드를 대신해 만든 캐릭터가 칼 스트롬버그이기 때문이다. 칼 스트롬버그는 엉뚱한 야욕에 사로잡힌 코믹북 스타일의 악당 캐릭터에 불과했지만 카리스마가 풍부한 여겐스 덕분에 그런대로 오케이.
13위: 닥터 카낭가(Dr. Kananga) - '죽느냐 사느냐(Live and Let Die)'
007 시리즈의 유일한 흑인 악당이다. 부하들로는 흑인이 나온 적이 종종 있지만 보스로는 '죽느냐 사느냐'에서 야펫 코토(Yaphet Kotto)가 연기한 닥터 카낭가가 유일하다. '타로카드로 점을 보는 여자가 순결을 잃으면 신통력을 잃는다'는 둥 영화의 분위기가 지나치게 판타지쪽으로 기운 것이 치명적이었지만 야펫 코토가 연기한 닥터 카낭가에는 그리 큰 문제는 없었다.
12위: 레나드(Renard) - '언리미티드(The World is Not Enough)'
영화 자체는 특별할 게 없는 또하나의 전형적인 피어스 브로스난(Pierce Brosnan)의 제임스 본드 영화였지만 후한 점수를 주고싶은 게 하나 있다면, 로버트 칼라일(Robert Carlyle)이 연기한 레나드(본명: Viktor Zokas)다. 지나치게 미스테리하고 어두운 성격이라는 게 걸리긴 했지만 일렉트라 킹(소피 마르소), M(주디 덴치)와의 관계 등 흥미로운 데가 있는 캐릭터였다.
11위: 줄리어스 노(Julius No) - '닥터 노(Dr. No)'
007 영화 시리즈 첫 번째 악당이다. 영화버전 '닥터 노'는 소설보다 SF 분위기가 강해진 데다 첫 번째 제임스 본드 영화였기 때문에 어색한 구석들이 있었다는 게 흠이지만 조셉 와이스맨(Joseph Wiseman)이 연기한 줄리어스 노에는 크게 문제될 게 없었다.
10위: 블로펠드(Blofeld) - '두 번 산다(You Only Live Twice)'
007 시리즈에 처음으로 얼굴을 드러낸 블로펠드의 모습은 오른쪽 얼굴에 상당한 흉터가 있는 대머리의 사나이였다. 1967년 영화 '두 번 산다(You Only Live Twice)'에서 제임스 본드(숀 코네리)에게 자신의 이름을 '언스트 스타브로 블로펠드'라고 소개했던 첫 번째 블로펠드다.
영국배우, 도널드 플레센스(Donald Pleasence)가 연기한 첫 번째 블로펠드는 007 시리즈 악당 중에서 가장 유명한 얼굴이기도 하다. 코메디언, 마이크 마이어스(Mike Myers)의 제임스 본드 패로디, '어스틴 파워스(Austin Powers)의 캐릭터, 닥터 이블(Dr. Evil)도 도널드 플레센스의 블로펠드를 모델로 한 캐릭터다.
그런데 문제는 영화 '두 번 산다'가 바닥권에 속하는 제임스 본드 영화라는 것. 황당무계한 스토리에 어색할 정도로 깊게 파인 얼굴의 흉터까지 겹치면서 '어스틴 파워스' 못지 않은 우스꽝스러운 영화가 된 게 바로 '두 번 산다'다. 도널드 플레센스의 블로펠드가 가장 유명한 007 시리즈 악당으로 꼽히는 것은 변함없지만 영화 퀄리티가 바닥이었다는 게 아쉬운 부분.
9위: 알렉 트레빌리안(Alec Trevelyan) - '골든아이(GoldenEye)'
숀 빈(Sean Bean)은 제임스 본드(피어스 브로스난)와 함께 MI6 에이전트로 활동하다가 범죄조직 리더로 둔갑한 전직 DOUBLE-O 에이전트, 알렉 트레빌리안(Alec Trevelyan)을 연기했다. 그렇다. '골든아이(GoldenEye)'의 악당은 전직 006로, 제임스 본드의 옛 동료이자 친구이다. 알렉 트레빌리안은 제임스 본드와 알렉 트레빌리안의 특별한 관계 덕분에 매우 흥미로운 캐릭터가 될 수 있었지만 '차라리 006이 주인공이었으면...'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007을 압도했다는 게 흠이라면 흠. 숀 빈이 제임스 본드였더라면 더욱 멋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8위: 르 쉬프(Le Chiffre) - '카지노 로얄(Casino Royale)'
이언 플레밍의 첫 번째 제임스 본드 소설에 등장했던 악당이 바로 루씨퍼(Lucifer)을 연상케 하는 이름의 르 쉬프(Le Chiffre)다. 눈물샘에서 피가 나는, 한마디로 피눈물을 흘리는 친구이기도 하다. 게다가 제임스 본드를 고문하면서 '불X을 때리면 얼마나 아픈지'를 가르쳐주기도 한다. 다른 007 시리즈 악당들처럼 세계정복 야망같은 건 없는 사실적인 캐릭터인 데다 카드놀이를 하다가 수 틀리면 피눈물을 흘리며 상대방의 불X까지 때리는 친구니 얼마나 멋진가! '2 Thunbs Up'까지는 못되어도 '2 Balls Up'은 된다.
7위: 어릭 골드핑거(Auric Goldfinger) - '골드핑거(Goldfinger)'
독일배우, 거트 프로베(Gert Frobe)가 연기한 어릭 골드핑거(Auric Goldfinger)는 지금까지 나온 22편의 007 시리즈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인기가 높다고 할 수 있는 제임스 본드 영화, '골드핑거(Golfinger)'의 악당이다. 하지만, 이기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탐욕스러운 사나이가 전부가 아니다. Pussy Galore라는 멋진 이름을 가진 여성 파일럿과 함께 일하는 것만 봐도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Pussy Galore...
6위: 로자 클렙(Losa Clebb) - '위기일발(From Russia With Love)'
이언 플레밍의 소설에서 제임스 본드를 독살하는데 사실상 성공했던 캐릭터가 바로 로자 클렙(Losa Clebb)이다. 플레밍이 생각을 바꿔 제임스 본드를 죽이지 않고 치료를 받고 회복한 것으로 하면서 시리즈를 이어갔지만 로자 클렙이 제임스 본드 (거진?) 죽였던 유일한 악당인 것만은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소설에서의 이야기일 뿐 영화에서는 제임스 본드(숀 코네리)를 독살하려던 시도가 맘처럼 되지 않는다. 그래도 제임스 본드를 함정에 빠뜨린 뒤 살해하려는 비밀공작을 멋지게 수행한 것만은 사실이다.
5위: 코스코프(Koskov) - '리빙 데이라이트(The Living Daylights)'
007 시리즈에 나왔던 악당들과는 약간 다른 캐릭터다. 세계정복의 야욕에 불타지도 않고, 제임스 본드를 직접 죽이려 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코스코프가 매우 위험한 이유는 더블 에이전트이기 때문이다. 코스코프는 스파이 영화에 어울리는 몇 안 되는 007 시리즈 악당 중 하나다.
4위: 아리스 크리스타토스(Aris Kristatos) - '유어 아이스 온리(For Your Eyes Only)'
영국배우, 줄리언 글로버(Julian Glover)가 연기한 아리스 크리스타토스는 턱시도를 입고 제임스 본드(로저 무어)와 함께 카지노에 가고, 저녁식사를 함께 하는 젠틀한 더블 에이전트다. '유어 아이스 온리(For Your Eyes Only)'가 로저 무어(Roger Moore) 주연의 제임스 본드 영화 중에서 스파이 영화와 가장 가까운 작품으로 꼽히는 만큼 악당, 크리스타토스도 세계를 정복하거나 인류를 멸망시키려는 과팍스러운 야망을 갖고있지 않았다. 이것만으로도 크리스타토스가 왜 훌륭한 007 시리즈 악당으로 꼽히는지 충분히 설명이 되었으리라.
3위: 에밀리오 라고(Emilio Largo) - '썬더볼(Thunderball)'
멋진 별장과 요트에 아름다운 정부까지 두루 갖춘 에밀리오 라고(Emilio Largo)는 007 시리즈 악당 중에서 가장 스타일리쉬한 캐릭터로 꼽힌다. 에밀리오 라고는 실제로는 스펙터(SPECTRE)의 제 2인자이지만 겉으로는 부유하고 매너좋은 젠틀맨이다. 애꾸눈인 것이 '나는 악당이요'라고 하는 듯 하지만 흡잡을 데가 거의 없는 캐릭터다.
2위: 프란즈 산체스(Franz Sanchez) - '라이센스 투 킬(Licence To Kill)'
로버트 다비(Robert Davi)가 연기한 프란즈 산체스는 007 시리즈에 나온 악당들 중 가장 사실적인 캐릭터다. 산체스는 세계정복을 구상할 시간에 더욱 많은 마약을 팔 생각을 하는 비지네스맨이다. 산체스는 멋진 저택과 아름다운 정부 등 모든 걸 갖고있는 비정한 갱스터였지만 부하들에게는 인심이 후한 쿨한 보스이기도 했다. 그에 대항하기 보다 그의 조직의 멤버가 되는 게 현명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로 쿨한 캐릭터였다.
1위: 블로펠드(Blofeld) - '여왕폐하의 007(On Her Majesty's Secret Service)'
제임스 본드 시리즈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악당은 바로 언스트 스타브로 블로펠드다. 영화 시리즈에는 모두 세 차례 등장했는데, 그 중 최고는 1969년 영화 '여왕폐하의 007(On Her Majesty's Secret Service)'의 텔리 사발라스(Telly Savalas) 버전이다. 사발라스의 블로펠드는 '두 번 산다(You Only Live Twice)'의 우스꽝스럽던 도널드 플레센스의 블로펠드와는 달리 '한다면 한다'는 매우 위협적인 악당이었다. 게다가, 사발라스의 블로펠드는 갓 결혼한 제임스 본드(조지 래젠비)의 아내(다이아나 리그)를 살해하기도 했다.
아쉽게도 제임스 본드는 블로펠드를 찾아가 아내의 복수를 할 기회를 아직도 갖지 못했다. 소설에서는 마침표를 찍었지만 영화에서는 아직도 '오픈 케이스'다. 007 시리즈 전체를 모두 리메이크하지 않는 이상 영화버전 제임스 본드에게는 복수를 할 기회가 영원히 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 텔리 사발라스의 블로펠드는 제임스 본드에게 가장 큰 대미지를 준 악당이다. 게다가 지금까지 영화버전 제임스 본드는 복수를 할 기회를 잡지도 못했다. 악당이 이 정도는 돼야 넘버1이 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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