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리우드의 몇 안 되는 여자 액션스타, 안젤리나 졸리(Angelina Jolie) 주연의 스파이 스릴러 영화 '살트(Salt)'가 얼마 전 개봉했다. '툼 레이더(Tomb Raider)' 시리즈에서 쌍권총을 들고 뛰어다녔던 졸리가 이번엔 CIA 에이전트로 변신해 액션영화 주인공으로 돌아왔다.
소니 픽쳐스가 '살트'를 제작하게 된 이유는 소니 픽쳐스를 떠난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대신할 액션 스릴러 프랜챠이스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고 할 수 있다. 두 편의 제임스 본드 영화 '카지노 로얄(Casino Royale)'과 '콴텀 오브 솔래스(Quantum of Solace)'로 짭짤한 재미를 본 데다, 유니버설의 제이슨 본(Jason Bourne) 트릴로지의 흥행성공을 지켜보면서 소니 픽쳐스도 이와 비슷한 액션 스릴러 프랜챠이스를 원했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자배우를 주연으로 세운 스파이 스릴러를 만들면 지나치게 따라한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려운 만큼 액션이 되는 졸리를 리딩 걸로 세워 여자판 제임스 본드 프랜챠이스를 만드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듯 했다. 더군다나 졸리가 본드걸 후보로도 여러 차례 오르내렸던 여배우인 만큼 그녀를 주인공으로 하는 스파이 시리즈를 만든다는 건 결코 나쁘지 않은 아이디어였다.
그러나 최근 개봉한 '살트'를 보고 솔직히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젤리나 졸리만 있을 뿐 캐릭터는 없었다. 졸리가 총을 들고 뛰어다니는 것 하나로 모든 게 다 해결된다는 식으로 만든 무성의한 영화였을 뿐 가능성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영화개봉 이전부터 계속해서 졸리와 본드걸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게 혹시 제대로 된 여자판 제임스 본드 캐릭터가 탄생하는 것인가 기대했지만 '살트'도 스타 파워에만 의존한 별 볼일 없는 영화일 뿐이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였던 것이다.
물론 백지 상태에서 제임스 본드에 버금가는 AA급 캐릭터를 만든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건 아니다. 조금만 신경을 쓰면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나 요즘 헐리우드 영화들을 보면 이러한 AA급 캐릭터를 새로 만들어 낼 생각 자체가 있는 지 의심스러울 뿐이다. 굵직한 캐릭터 중심의 액션 프랜챠이스를 너도 나도 원하는 듯 하면서도 새로운 캐릭터를 탄생시킬 생각은 꿈도 꾸지 못하고 코믹북이나 뒤적이고 있기 때문이다.
'트렌드'라는 것도 방해꾼이다. '이러이러한 스타일이 요새 뜬다'고 하면 개나 소나 전부 다 거기로 쏠리기 때문이다. 이 바람에 요새 나오는 헐리우드 영화들은 카피캣 무비 천지가 됐다. 비디오게임도 그렇게 되더니 영화도 트렌디한 쟝르와 스타일 한쪽으로 쏠리면서 비슷비슷한 영화들만 나오고 있다. 망조가 든 것이다.
최근 개봉한 워너 브러더스의 SF영화 '인셉션(Inception)'을 예로 들어보자. 이 영화가 쇼비즈 옵저버들로부터 좋은 평를 받은 이유는 상상력과 아이디어가 대단해서가 아니다. SF, 판타지, 호러 등은 현실세계의 바운더리를 벗어나는 상상력과 아이디어로 승부하는 쟝르이므로 새삼스럽게 크게 감탄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평을 받은 이유는 '소설이나 코믹북을 기초로 하지 않은 오리지날 스토리다', '속편이나 리메이크가 아니다'라는 점 때문이다. 스토리가 탄탄해서, 상상력과 아이디어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요새 보기드문 오리지날 타이틀이라서 라는 것이다. 요즘 헐리우드 영화에서 오리지날 타이틀을 찾아보기가 이 정도로 힘들다는 얘기다.
그러므로 눈에 띄는 오리지날 캐릭터를 찾아보기란 더더욱 힘들 수밖에 없다.
어떻게 보면 소니 픽쳐스가 안젤리나 졸리로 AA급 캐릭터를 탄생시키길 기대했던 것 자체가 지나치게 야무진 바람이었는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떻게 했더라면 에블린 살트가 더욱 멋진 캐릭터가 될 수 있었을까?
일단 코믹북에서 튀어나온 듯한 캐릭터는 피하는 게 좋았다. 최근 들어 코믹북 수퍼히어로를 기초로 한 영화들이 흥행성공하고 있고, 헐리우드가 너도 나도 코믹북 영화를 내놓고 있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지만, 완전히 새로운 오리지날 캐릭터를 만들면서 비디오게임이나 코믹북에서 튀어나온 듯한 캐릭터처럼 보이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그 대신 미남들로 가득찬 카지노에서 우아한 이브닝 드레스 차림으로 카드게임을 하면서 마티니로 여유있게 목을 축이다가 두툼한 입술로 키스를 날리며 방아쇠를 당기는 스타일리쉬한 섹시 킬러로 만들었어야 했다. 숀 코네리(Sean Connery) 시절의 클래식 제임스 본드 캐릭터를 베이스로 했어야 옳았다는 것이다.
졸리의 스파이 캐릭터로는 지나치게 어둡고 진지한 쪽보다는 과거의 제임스 본드처럼 술과 섹스를 좋아하고 눈썹을 찡긋거리며 농담을 던지는 유머감각도 갖춘 멋쟁이 스타일이 더욱 잘 어울린다. 사실위주의 딱딱한 영화보다는 제임스 본드 시리즈처럼 전세계의 관광명소들을 두루 방문하는 화려한 스타일의 영화에 더욱 잘 어울리는 것도 사실이다. 자칫하다간 '툼 레이더'의 라라 크로프트와 겹쳐질 수도 있지만, 거기서 조금 차분해진다면 크게 문제될 것도 없다. 비디오게임 캐릭터 라라 크로프트가 원래 인디아나 존스를 모델로 한 '여자판 인디아나 존스' 캐릭터이고, 인디아나 존스가 제임스 본드를 모델로 한 캐릭터이므로 이들 간에 서로 비슷한 데가 있다고 해서 크게 놀랄 일은 아니다.
'여자판 인디아나 존스'든 '여자판 제임스 본드'든 간에 이들 모두 어지간한 다른 여배우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역할인 지도 모른다. 그러나 안젤리나 졸리는 이런 캐릭터에 딱 어울리는 몇 안 되는 여배우 중 하나다. 여성스러운 우아함과 섹시미 뿐만 아니라 남자 액션배우 못지 않은 터프함과 카리스마까지 두루 갖춘 여배우이기 때문이다.
장난끼로 가득하다가도 살기 가득한 표정으로 한순간에 바뀌는 것도 숀 코네리 못지 않다. 한없이 상냥하고 부드러워 보이다가도 인상 한 번 쓰면 후달리게 만드는 게 과거의 제임스 본드, 숀 코네리와 너무나도 비슷해 보인다는 것이다. 숀 코네리가 지금까지 최고의 제임스 본드로 불리는 이유 중 하나는 하드 & 소프트 제임스 본드를 모두 보여준 유일한 배우이기 때문이다. 로저 무어(Roger Moore)와 피어스 브로스난(Pierce Brosnan)은 '소프트' 쪽으로 치우쳤고, 티모시 달튼(Timothy Dalton)과 다니엘 크레이그(Daniel Craig)는 '하드' 쪽으로 쏠린 반면 코네리는 하드 & 소프트를 모두 갖춘 균형잡힌 에이전트 007을 연기했다.
그렇다면 안젤리나 졸리에게서 코네리의 제임스 본드를 봤다는 얘기냐고?
그렇다. 졸리는 숀 코네리의 제임스 본드를 연상케 하는 여자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한 콘템프러리 세팅의 스파이 스릴러에 아주 잘 어울리는 배우다. 본드걸보다 제임스 본드 역에 더욱 잘 어울리는 여배우 또한 그녀다. 한마디로 말해, 졸리는 몇 안 되는 정말로 멋진 여자다.
그러나 '살트'에서 졸리가 맡았던 캐릭터는 그녀가 아닌 다른 여배우가 맡았더라도 별 문제가 없었을 정도로 지극히 평범한 캐릭터 였다. 검은 옷을 입고 머리까지 검은색으로 염색한 뒤 수류탄을 던지던 모습도 그녀의 지난 영화 '원티드'에서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므로 새로울 게 없었다. '졸리 스테레오타잎'만 있었을 뿐 '살트' 만의 개성있는 캐릭터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제외하고 나면 제임스 본드와 제이슨 본 시리즈를 어설프게 짜깁기 한 것밖에 남는 게 없었다. 나름 스타일리쉬한 액션 히어로 타잎의 캐릭터와 핵미사일을 발사한다는 둥의 'LARGER-THAN-LIFE' 스토리라인 등은 제임스 본드 스타일을 따라가면서 액션은 제이슨 본 탬플릿을 사용한 게 전부인 영화였다. 다시 말하자면, '살트'만의 개성을 살리기 보다 유명한 것, 트렌디한 것 위주로 짜깁기해 만든 영화였다는 것이다. 여자판 제임스 본드 역할 0순위로 꼽히는 안젤리나 졸리를 캐스팅해 놓고도 영화를 이렇게 밖에 만들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였을까? 영화가 끝나자 마자 'What a waste'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돈, 시간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안젤리나 졸리의 가능성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는 아쉬움 때문이었다.
그렇다. 이번에도 아니었다. 쓸만 한 캐릭터가 하나 새로 나오나 했더니 역시나 였다.
그렇다면 요새는 왜 새로운 AA급 영화 캐릭터가 나오지 못하는 것일까?
80년대엔 인디아나 존스(Indiana Jones), '다이 하드(Die Hard)' 시리즈의 존 맥클레인(John McClane), 터미네이터(Terminator), 로보캅(Robocop) 등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유명한 영화 캐릭터들이 여럿 탄생했다. 그러나 요즘엔 아이디어 고갈에 허덕이는 헐리우드가 80년대 영화를 리메이크하는 데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아이디어가 바닥났기 때문이냐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헐리우드가 캐릭터 작업에 예전 만큼 공을 들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제임스 본드를 모델로 한 인디아나 존스가 007 부럽지 않은 장수 캐릭터가 되었 듯이 지금도 조금만 정성을 기울이면 새로운 무비 아이콘을 탄생시킬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않는 것 같기 때문이다.
아마도 코믹북, 비디오게임 등에서 그럴싸해 보이는 캐릭터들을 손쉽게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코믹북 영화 = 블록버스터'라는 공식이 생겨난 이후부터 헐리우드가 코믹북 카탈로그만 뒤지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최근들어 코믹북을 기초로 한 영화가 개봉하지 않는 해가 없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해 준다. 코믹북-비디오게임-영화가 올바르지 않은 쪽으로 연결되면서 영화까지 갈수록 'NERDY'해 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영화들이 흥행성공을 하고 있으니 영화 제작자들도 굳이 골치 아프게 머리 굴려가면서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 낼 궁리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듯 하다. 캐릭터는 코믹북이나 비디오게임에서 대충 끌어오고 나머지는 CGI로 때우면 되니까. 이게 바로 요즘 여름철 영화들이다.
이런 판국에 제임스 본드 시리즈가 끝난나고? 50여년간 꾸준히 흥행수익을 안겨주고 있는 007 시리즈는 모든 영화 스튜디오들이 목표로 삼는 모델 프랜챠이스다. 제임스 본드 시리즈처럼 꾸준히 울궈먹을 수 있는 장수 시리즈를 너도 나도 원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헐리우드는 90년대부터 지금까지 제임스 본드의 반의 반도 안 되는 캐릭터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50년 전통의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내버려둔다고? 한마디로 개불X 터지는 소리다. 지금의 헐리우드는 제임스 본드를 못본 체 할 만큼 풍요롭지 못하다.
소니 픽쳐스의 '살트'가 그 증거 중 하나다.
소니 픽쳐스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소니 픽쳐스는 '콴텀 오브 솔래스'를 끝으로 007 시리즈와 헤어지긴 했지만 아직도 서로를 원하는 사이로 남아있다. 재결합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소니 픽쳐스는 가능하다면 어떠한 식으로든 '본드23'에도 간여하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살트'를 보니 소니 픽쳐스는 다시 '미스터 본드'로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괜히 애쓰지 말고 돈을 쓰라고, 돈을...!
2010년 7월 30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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