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들이 갑자기 한데 모였다.
실베스터 스탤론이 주연, 연출, 각본을 맡은 2010년 액션영화 '익스펜더블(The Expendables)'에서다.
그렇다. 왕년의 액션스타들이 돌아온 것이다.
여기에 한동안 보이지 않다가 최근들어 왕성한 활동을 하고있는 미키 루크(Mickey Rourke), 줄리아 로버츠(Julia Roberts)의 오빠로 유명한 에릭 로버츠(Eric Roberts) 등도 가세했다.
그렇다고 과거의 스타들만 나오는 건 아니다. 이연걸(Jet Li), 제이슨 스테이텀(Jason Statham), 프로 레슬러 스티브 어스틴(Steve Austin), 전 NFL 선수 출신 테리 크루즈(Terry Crews) 등 '신세대' 액션스타들도 나온다.
람보, 록키, 존 맥클레인, 소림사, 여기에 현직 캘리포니아 주지사까지 출연하는 만큼 이 정도라면 초호화 캐스팅이라고 할 만 하다.
슈왈츠네거가 캘리포니아 주지사라는 건 어지간한 사람들은 다들 알고있는 사실일 것이다.
그렇다. 캘리포니아는 싸이보그의 통치를 받는 주다. 미국의 49개 주에선 제임스 카메론(James Cameron) 감독의 80년대 히트작 '터미네이터(The Terminator)'를 공상과학 영화라고 부르지만, 캘리포니아 주에서만은 예외다. 실제로 터미네이터가 주지사가 되었으니까.
하지만 현직 주지사가 기관총을 들고 액션영화에 출연하는 건 약간 곤란했던 것일까?
아놀드 슈왈츠네거는 '익스펜더블'에서 잠깐 얼굴만 내밀고 대사 몇 마디 중얼거리고 사라지는 게 전부였다. 슈왈츠네거가 뚜걱뚜벅 걸어 들어오는 장면에서 관객들이 크게 웃긴 했지만 '캘리포니아 주지사 슈왈츠네거가 오랜만에 영화배우로 다시 돌아온 영화'라고 떠들 만한 수준은 되지 않았다.
슈왈츠네거는 현직 주지사이기 때문이라고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다고 하지만, 브루스 윌리스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윌리스는 좀 더 비중있는 역할을 맡을 수도 있었을 것 같았지만, 그 역시도 슈왈츠네거와 마찬가지로 대사 몇 마디를 끝으로 사라지는 역할을 맡았다. 예고편엔 아놀드 슈왈츠네거와 브루스 윌리스의 모습이 빠지지 않고 나오지만 이들이 영화에서 실제로 차지한 비중은 생각보다 무척 적었다. 그저 게스트로 우정출연한 정도가 전부였다. 그래도 비싼 얼굴 한 번 비춰줬으면 됐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플래닛 헐리우드(Planet Hollywood) 3총사'가 제대로 뭉쳐서 만든 영화라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유머를 빼놓지는 않았다. 세 명의 터프가이들이 모여 수다를 떨면서 코믹한 대사를 주고받았다.
특히 스탤론이 먼저 자리를 뜨는 슈왈츠네거를 바라보며 "He wants to be president."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크게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또 하나 눈에 띈 배우는 돌프 룬드그렌이다. 키가 거의 2미터에 달하는 룬드그렌은 과거엔 스탤론과 함께 '록키 4(Rocky IV)'에 출연하는 등 여러 편의 액션영화에 출연했지만 최근엔 자주 보기 어려운 얼굴이다. 영화관에서 그가 출연한 영화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으며, 무엇이었는지 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슈왈츠네거는 비록 영화엔 오랜만에 출연했어도 신문과 TV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얼굴이므로 크게 반갑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룬드그렌은 달랐다. 진짜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룬드그렌도 그리 비중이 큰 역할을 맡지 않았다. 슈왈츠네거, 윌리스보다는 나았지만 메인 그룹에 포함되지 않는 바람에 다른 배우들에 비해 출연시간이 짧았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을 좀 오래 보고 싶었는데 맘처럼 되지 않더라.
한가지 재미있는 건, 룬드그렌이 007 시리즈의 죠스(Jaws)를 떠올리는 역할을 맡았다는 점이다.
죠스는 '나를 사랑한 스파이(The Spy Who Loved Me)'와 '문레이커(Moonraker)'에 강철이빨을 한 거구의 헨치맨으로, 키가 2미터가 넘는 리처드 킬(Richard Kiel)이 그 역할을 맡았었다.
007 시리즈를 본 사람들이라면 죠스가 덩치만 산만할 뿐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코믹한 캐릭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무섭다'가 아니라 '귀엽다'에 더 가까운 괴짜 캐릭터로 꼽히는 게 바로 죠스다.
룬드그렌이 '익스펜더블'에서 맡은 거너는 007 시리즈의 죠스처럼 덩치는 큰데 약간 띨해(?) 보이는 캐릭터 였다. 영화가 R 레이팅을 받은 과격한 액션으로 가득찬 영화였던 만큼 아무래도 죠스보다는 위협적인 캐릭터였다고 해야겠지만, 한 인상 하는 거구의 사나이가 바보스러운 실수를 자꾸 하면서 관객들에게 웃음을 주는 게 마치 007 시리즈의 죠스를 보는 것 같았다.
사실 아무런 이유 없이 죠스가 떠올랐던 건 아니다. 룬드그렌도 007 시리즈에 출연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로저 무어(Roger Moore)의 마지막 제임스 본드 영화였던 1985년작 '뷰투어킬(A View to a Kill)'에 KGB 에이전트로 잠깐 출연한 바 있다. 비록 대사도 없는 단역이었지만 룬드그렌도 007 시리즈와 인연이 있는 배우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가 어디에 나오냐고?
여기있네...
그래서 였을까?
룬드그렌이 이연걸을 머리 위로 들어올린 장면 역시 '뷰투어킬'의 오마쥬처럼 보였다.
룬드그렌이 잠깐 출연했던 '뷰투어킬'의 바로 그 장면에서 메이데이(그레이스 존스)가 다른 KGB 에이전트를 머리 위로 번쩍 들어올리는 씬이 있었다.
참고로, 아래 사진에서 왼쪽 아래 코너에서 권총을 들고 있는 게 룬드그렌이다.
그러고 보니, 브루스 윌리스도 제임스 본드 시리즈와 인연이 있다.
80년대에 발표했던 그의 앨범 'The Return of Bruno'에 'Secret Agent Man/James Bond is Back'이라는 곡이 있다. 제임스 본드 팬이라면 당시 헐리우드 액션스타였던 브루스 윌리스가 부른 'James Bond is Back'이라는 노래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을 것이다.
자 그렇다면 브루스 윌리스가 부른 'Secret Agent Man/James Bond is Back'을 들어보자. 비디오는 노래와 상관없는 '다이 하드 2(Die Hard 2)'다.
여기서 잠깐!
왜 영화 얘기는 없고 영화배우 얘기만 하냐고?
영화 얘기는 할 게 없어서다. '익스펜더블'의 줄거리는 우람한 체격의 터프가이들로 구성된 용병들이 남아메리카 독재자와 그의 주변에 있는 범죄집단을 소탕한다는 내용이 전부다. 아마도 헐리우드 액션영화에 수백만 번은 나온 스토리일 것이다. 이렇게 있으나 마나 한 스토리를 제외하고 나면 치고 박고 쏘고 때려부수는 'Shoot'em up, blow'em up, fuck'em up' 액션이 전부다. 최근들어 보기 드물어진 단순무식한 80년대식 액션영화가 돌아왔다고 보면 된다.
그러나 스탤론을 비롯한 터프가이들이 검은색 베레모까지 쓰고 폼을 잡고 돌아다니는 꼬락서니를 보니 아무래도 유치해서 도저히 볼 수 없을 영화처럼 보였다. 터프가이 용병들의 이야기라는 것까지는 잘 알겠는데 베레모부터가 좀 웃기게 보였던 것이다.
사실 나는 마초무비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어느 정도까지는 받아들일 수 있어도 지나치게 오버하는 마초무비는 눈뜨고 보지 못한다. 바디빌더, 프로 레슬러 등 '고릴라'들이 붐붐거리는 힙합이나 징징거리는 락음악에 맞춰 정신없이 치고 박고 쏘는 바보스럽게 보이는 액션영화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고릴라들이 설치는 영화를 보느니 차라리 '트와일라잇(Twilight)'을 보고 만다.
'익스펜더블'은 '고릴라 영화' 카테고리에 속하는 영화였다. 머리가 터지고, 팔, 다리, 허리 등이 잘려나가고, 여기저기 꺾어져 부러지는 등의 무식한 액션을 빼면 남는 게 없는 영화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만큼 폭력수위도 높은 편이었다. 그런데 전혀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퀘이크(Quake)', '언리얼(Unreal)' 등과 같은 폭력수위가 높은 1인칭 슈터 비디오게임을 보는 것 같았을 뿐 별다른 느낌이 들지 않았다. 총에 맞아 머리가 완전히 터져나가고, 허리가 잘려나가고, 칼로 목을 따는 등 별 오만가지 씬이 다 나오지만 모든 게 코믹하게 보였을 뿐 잔인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아마도 그 이유는 이러한 스타일의 무식한 액션영화에 어느 정도 단련이 된 상태인 데다, 이런 잔인한 씬들이 실감나게 느껴질 만큼 영화가 진지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다면 출연한 영화배우들을 제외하고 나면 볼 게 하나도 없는 영화였다는 얘기냐고?
그런데 묘하게도 그런 건 아니었다.
이런 액션영화를 하도 오랜만에 봐서 였을까? 무엇으로 보나 내 취향엔 전혀 맞지 않는 영화이었어야 했는데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전혀 기대를 걸지 않은 상태로 영화관을 찾았을 정도로 기대치가 최저 수준이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나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사실 이 영화를 보기로 결심한 이유도 '얼마나 유치하고 우스꽝스러운지 직접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에서 였다.
그렇다고 실베스터 스탤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스탤론의 영화들을 보면서 자랐는데 어찌 그를 싫어할 수 있겠는지 생각해 보시구랴. 스탤론은 날이 갈수록 젊어지는지 60대로 보이지도 않는다. '내가 저 나이가 되었을 때 과연 스탤론 만큼 건강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무한한 존경심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하지만 스탤론은 스탤론이고 영화는 영화다. 아무리 스탤론 영화를 보면서 자랐다고 해도 액션스타들을 한데 모아놓은 영화를 만든다는 아이디어 자체부터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유치한 '고릴라 쇼'가 될 게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익스펜더블'은 생각했던 만큼 심각하지 않았다. 그런대로 볼 만했다. 고릴라들이 붐붐, 징징대는 음악에 맞춰 설치는 영화를 무척 싫어하는 내가 별다른 거부감 없이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주 잘 만든 영화는 절대 아니었지만 생각했던 것처럼 유치해서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액션은 예상했던 대로 시원, 화끈했고, 유머는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풍부한 편이었다.
그렇다. 유머도 빼놓을 수 없다. '익스펜더블'은 액션은 무식했어도 반발짝만 옆으로 디디면 액션/코메디로 보였을 정도로 유머가 풍부했다. 이런 스타일의 '고릴라 영화'가 지나치게 진지하기까지 하면 더더욱 유치하게 되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유머가 풍부했던 덕분에 썰렁한 '고릴라 쇼'가 되는 걸 피할 수 있었다. 바로 이것이 '익스펜더블'을 아무런 거부감 없이 볼 수 있게 해준 가장 큰 이유가 아니었나 싶다.
이 영화를 보면서 무엇보다도 놀란 건, 이런 류의 액션영화에 열광하는 관객들이 아직도 많다는 사실이었다. 영화의 재미에 흠뻑 빠져 박수를 치고, 소리를 지르고, 발까지 구르는 관객들을 보면서 솔직히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릴라들이 서로 치고 박고 뒹굴 때마다, 기관총을 쏴대며 적들을 싹쓸이 할 때마다 관객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자지러지는 소리를 질러댔다. 마치 이런 액션영화를 생전 처음 보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관은 제법 꽉 찼었고, 관객들도 백인, 흑인, 히스패닉이 골고루 섞여있었는데 모두들 영화를 무척이나 재미있게 보는 것 같았다. 이런 스타일의 액션영화가 흑인과 히스패닉에게 인기가 높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 '익스펜더블'은 모두가 다 좋아하는 것 같았다.
얼마나 반응이 좋았냐면, 영화가 끝나니까 객석에서 박수까지 터져나왔다. 이런 액션영화를 보고 관객들이 박수를 치는 것을 이전에도 본 적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영화가 끝나자 나도 모르게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혼자 실실 웃어대는 게 자칫하다간 살짝 물이 간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싶어서 계속 손바닥으로 얼굴을 다림질했지만 웃음이 번져나오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 봐도 그 때 왜 웃음이 나왔는지 잘 모르겠다. 영화가 생각보다 만족스러웠기 때문이었을까? 관객들의 반응이 재미있어서 였을까? 아니면 둘 다?
결국 결론은 이렇다: '익스펜더블'은 스트레스 버스터로써는 왔다라는 것이다. 프로 레슬링에 열광하는 남성관객들을 겨냥한 유치한 마초무비일 것으로 예상했었는데 생각했던 만큼 썰렁하지 않았다. 영화가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아무 생각없이 웃고 즐기기에 별 무리가 없는 영화였다. 고릴라들이 터프한 척 똥폼잡는 게 여전히 우습게 보이는 건 사실이지만, 지금 보고 있는 영화가 액션/코메디라고 생각하면 모든 문제가 사라질 것이다. 고릴라들이 웃기려고 카메라 앞에서 재롱떨고 있다고 생각하면 썰렁함, 유치함 등이 많이 가셔진다는 것이다. 일부러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익스펜더블'을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될 테니까...
마지막은 '익스펜더블'의 엔딩 타이틀 곡으로 사용된 Thin Lizzy의 'The Boys are Back in Town'으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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