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클래식 제임스 본드 영화를 기억하는 영화팬들은 "007 시리즈는 숀 코네리 이후 끝났다"거나 "로저 무어(Roger Moore) 이후 끝났다"고 한다. 다시 말하자면, 007 시리즈는 6~70년대에 한창이었고 80년대 이후부터는 볼 게 없다는 얘기다.
틀린 말은 아니다. 007 시리즈의 인기가 가장 높았던 시절도 그 때 였고, 어린이/청소년들에 인기가 높았던 시절 또한 마찬가지 였다. 그러나 요새는 제임스 본드 시리즈의 인기가 예전만 못하다. 워낙 유명한 프랜챠이스인 만큼 모르는 사람은 없어도, 과거처럼 어린이/청소년들이 시리즈에 열광하지 않는다. 다니엘 크레이그(Daniel Craig)가 제임스 본드가 된 이후 시리즈가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는 평을 받기도 하지만, 과거 6~70년대와 비교하기엔 여전히 부족한 수준이다.
그 이유로는 여러 가지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수십 년 동안 같은 포뮬라를 반복한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식상했고, 최근엔 제임스 본드보다 훨씬 멋지고, 화려하고, 현대적인 액션 어드벤쳐 영화들이 많이 나왔다는 점 정도를 대표로 들 수 있을 듯 하다.
청소년팬의 감소는 007 시리즈 제작진의 골칫거리 중 하나다. 턱시도 차림으로 마티니를 마시는 올드스쿨 캐릭터로 어떻게 청소년들로부터 인기를 끌 수 있느냐가 그들이 풀어야 할 숙제다. 007 시리즈를 완전히 뜯어고치지 않으면서도 청소년들에 어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007 제작진이 해답을 찾을 때까지 경쟁사들이 얌전히 기다리진 않는다.
2000년대초 소니 픽쳐스는 빈 디젤(Vin Diesel) 주연의 'xXx'를 통해 제임스 본드의 시대는 지났고 이제는 스파이도 '플레이스테이션 제너레이션'의 시대라는 메시지를 던졌다. '플레이스테이션 제너레이션' 스파이는 제임스 본드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모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제임스 본드가 절대 따라할 수 없는 것들까지 가능했다.
유니버설의 제이슨 본(Jason Bourne) 시리즈도 마찬가지다. 제이슨 본 시리즈도 제임스 본드 시리즈에서 모방할 수 있는 것은 죄다 끌어오면서도 제임스 본드가 따라할 수 없는 몇가지를 들며 차별화를 노렸다. 고가의 스포츠카부터 수퍼모델급 본드걸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소유한 제임스 본드와 기억을 잃고 쫓기는 신세가 된 모든 것을 잃은 제이슨 본이라는 캐릭터 설정부터 대조적이었다.
그렇다고 스파이 액션영화들만 제임스 본드의 경쟁상대인 것은 아니다. 2000년대 들어 쏟아져 나오는 코믹북 수퍼히어로 영화들도 빼놓을 수 없다.
코믹북 수퍼히어로 영화들이 지금처럼 성행하지 않았던 6~70년대에는 제임스 본드 영화가 있었다. 하지만 요새는 다르다. 과거엔 수퍼히어로 영화가 많지 않았지만 요샌 천지다. 매년마다 여름철이 되면 제목이 '맨'으로 끝나는 코믹북 수퍼히어로 영화들이 빠지지 않고 개봉한다.
물론 제임스 본드 시리즈와 코믹북 수퍼히어로 영화들이 서로 비슷한 데가 있어 보이면서도 완전히 다른 쟝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포뮬라는 서로 비슷하다. '심하게 과장된 범죄집단이 꾸미는 터무니 없어 보이는 테러 플롯을 히어로가 저지한다'는 스토리라인은 크게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제임스 본드도 영화 시리즈에선 평범한 스파이 캐릭터가 아니라 '지구를 지키는 스파이'가 되었으므로, 코믹북 수퍼히어로와 큰 차이가 없는 캐릭터다.
그러나 수퍼히어로 영화들은 쟝르가 SF/판타지이기 때문에 제임스 본드 시리즈 처럼 과장에 한계가 없다. 제임스 본드 시리즈도 황당무계하긴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지만, 그래도 넘을 수 없는 한계선이 있다. 제임스 본드를 우주로 내보냈던 '문레이커(Moonraker)'와 같은 영화는 거진 SF영화처럼 보였지만, 제작진은 "싸이언스 픽션이 아닌 싸이언스 팩트"라면서 007 시리즈가 SF쟝르로 오해받는 걸 경계한 바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코믹북 수퍼히어로 영화들은 이런 걱정을 하지 않는다. 영화관객들도 수퍼히어로가 하늘을 날아도, 우주로 나가도, 현대 과학으로는 제작이 불가능한 여러 장치들이 등장해도 "말이 안 된다", "터무니 없다"고 지적하지 않는다. '까놓고 SF/판타지'라는 걸 다들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덕분에 코믹북 수퍼히어로 영화들은 비주얼을 비롯한 모든 부분에서 제임스 본드 시리즈보다 훨씬 쿨하고 화려하고 스타일리쉬하게 만들 수 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과거 로저 무어시절 영화처럼 만들 수도 없다. 요샌 '에이전트 코디 뱅스(Agent Cody Banks)', '알렉스 라이더(Alex Rider)' 등 어린이용 스파이 영화들이 과거 007 시리즈 포뮬라를 모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007 시리즈는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 계속 달라지는 환경에 맞춰 007 시리즈도 변화를 줘야 할 것 같은데, 어디를 어떻게 바꿔야 하는 걸까?
007 제작진은 2002년작 '다이 어나더 데이(Die Another Day)'를 끝으로 6~70년대 포뮬라를 접고 새로운 21세기형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탄생시키고자 했다. 이언 플레밍(Ian Fleming)의 원작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면서, 보다 거칠고 리얼한 액션 스릴러 영화로 재단장을 시도했던 것이다. 물론 흥행엔 성공했다. 2006년작 '카지노 로얄(Casino Royale)'은 007 시리즈 역대 베스트 5에 속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 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또다른 문제점을 2008년작 '콴텀 오브 솔래스(Quantum of Solace)'가 잘 보여줬다. 제임스 본드 영화엔 클래식 포뮬라가 싫든 좋든 빠져선 안 된다는 점도 다시 한 번 잘 보여줬다. 너무 판박이같아도 곤란했겠지만, 친숙한 요소들을 완전히 빼버리는 것도 곤란했다.
그러므로 제작진은 어떻게 해야 철지난 포뮬라를 계속 반복 사용만 한다는 지적을 슬쩍 피하면서도 클래식 본드팬들과 요즘 영화관객들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90년대 제임스 본드 시리즈는 '다시 70년대' 였고, 2000년대 시리즈는 '다시 60년대' 였다. 그렇다면 2010년대에는 '다시 80년대'로 가는 게 어떨까 싶다. 80년대에 제작된 다섯 편의 제임스 본드 영화 중에 가장 밸런스가 잘 잡힌 영화들이 더러 있으므로, 모델로 삼을 만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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