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5일 수요일

'킹 스피치', 상을 받을 만한 자격 있다

영국 영화/TV 시리즈 중엔 시대물이 많다. 영국이 역사가 깊은 나라이기 때문이겠지만, 다른 한편으론 늙은 나라라서 그런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영국'이라고 하면 '현재', '미래'보다 '과거'가 먼저 떠오른다는 점도 이런 생각을 뒷받침해준다. 그래서 인지, '영국 시대물'이라고 하면 이제는 좀 지겨운 감이 든다. 툭하면 이나라 시대, 저나라 시대 타령을 반복하는 중국영화에 물린 것과 비슷한 케이스라고 할까?

영국 영화 중엔 일반 역사/시대극 뿐만 아니라 영국 왕가를 소재로 한 영화들도 많다. 최근에 개봉한 영화들 중에도 '디 아더 불린 걸(The Other Boleyn Girl)', '퀸(The Queen)', '영 빅토리아(Young Victoria)' 등 여러 편이 있다.

여기에 또 하나가 추가됐다. 이번엔 현재 영국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아버지, 조지 6세(George VI)의 차례였다.

제목은 '킹 스피치(King's Speech)'.

그런데 왜 영화제목이 '킹 스피치(왕의 연설)'일까? 조지 6세가 엄청난 명언을 남기기라도 한 것일까?

그것보다는 조지 6세가 언어장애를 가진 왕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였나?

이상하게도 영화관에서 표를 사는데 제목 '킹 스피치'가 입에서 쉽게 나오지 않았다. 비디오게임을 몹시 좋아했던 과거가 있어서 인지 '킹 스피치'보다 '킹스 필드(King's Field)'라는 제목이 자꾸 입에서 맴돌았다. 그래도 설마 '킹 스피치'와 '킹스 필드'를 헷갈리겠나 싶었다. 그런데 웬걸, 입장표를 구입하려는 순간 갑자기 혼란이 밀려왔다. '킹스' 다음이 무엇이었는지 갑자기 생각이 안 나더라니까! 이 바람에 매표소 앞에서 "키, 키, 키, 키..." 하며 말을 더듬게 됐다.

이 모습을 본 매표소 여직원의 표정은 '이 자식은 왜 혼자서 키키거려?' 였다.

그런데, 기적같게도, 그녀의 얼굴을 본 순간 제목이 생각났다.

'아, 'King's Bitch'였지...'

자, 그렇다면 줄거리를 살짝 훑어보기로 하자.

영화의 주인공은 조지 5세의 둘 째 아들 알버트/요크 공작(Duke of York)이다. 그의 아버지는 영국왕 조지 5세였고, 위로 형이 하나 있었다. 알버트(콜린 퍼스)는 엘리자베스 왕비(헬레나 본햄 카터)와 결혼해 두 딸을 두고 있었는데, 이 중 큰 딸이 지금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다. 이후 조지 6세 영국왕이 되는 알버트는 지금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바로 이전 왕이다.

그렇다면 둘 째 아들이던 알버트가 어떻게 왕이 되었을까?

조지 5세가 사망하자 처음에는 큰아들 에드워드(가이 피어스)가 왕위를 넘겨받고 에드워드 8세가 됐다. 그러나 그가 이혼 경력이 있는 미국 여자와 결혼하기로 결심하면서 동생 알버트(콜린 퍼스)에 왕위를 넘겨주고 물러난다.

이렇게 해서 알버트가 조지 6세 영국왕이 됐다.

그런데 알버트에 큰 문제가 하나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언어장애에 시달려왔던 것. 알버트는 연설은 고사하고 평상시에 대화를 할 때에도 말을 심하게 더듬었다.

엘리자베스 왕비는 남편, 조지 6세의 언어장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치료 전문가들을 찾아다니며 동분서주한다. 그러던 중 만난 게 호주 태생의 라이오넬 로그(제프리 러시)였다. 조지 6세의 언어장애 치료를 맡을 '임자'를 만난 것이다.


결국 '말을 심하게 더듬던 조지 6세가 로그의 도움으로 연설을 성공적으로 하게 된다'는 줄거리냐고?

그렇다. '킹 스피치'의 줄거리는 어떻게 전개되다가 어떻게 결말을 맺을 지 예측하기 쉬운 뻔한 내용이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을 기초로 한 영화였기 때문에 이는 당연한 결과였다.

그럼에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대개 역사/시대극은 자칫하면 따분해지기 쉽지만, '킹 스피치'는 그렇지 않았다. 영화가 늘어지는 것 같다는 기분이 전혀 들지 않았다. 이런 쟝르의 영화 치고 짧은 2시간이 채 안 되는 런타임도 어느 정도 역할을 했을 듯 싶다. 굵고 짧게 만들어 영화 도중에 지루하다는 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았다.

줄거리도 흥미진진했다. 스토리 구조는 뻔했고, 결말도 이미 알고 있는 상태였는데도 여전히 흥미진진했다. 개인적으로 역사/시대물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편이고, 영국왕조에도 별 관심이 없는데도 재미있게 볼 수 있었다. 말이 잘 안 나와 답답해 하는 알버트/조지 6세를 볼 때 마다 그를 응원하게 되었으며, 알버트와 로그의 흔치 않아 보이는 프렌드십도 재미있었다.

유머도 생각보다 풍부했다. 왕이 연설을 제대로 못할 정도로 말을 더듬는다는 것부터 생각보다 코믹했다. 또한, 알렉스/조지 6세가 언어장애를 고치기 위해 로그와 함께 피나는 연습을 하는 과정도 재미있었으며, 곳곳에 자리 잡은 코믹한 대사들도 달콤했다.

알버트/조지 6세를 연기한 영국배우 콜린 퍼스(Colin Firth)와 라이오넬 로그 역의 제프리 러시의 호연도 한몫 했다. 작품상도 유력해 보이지만 남자 연기상 쪽에서도 좋은 소식이 있지 않을까 기대된다.

알버트/조지 6세와 결혼한 엘리자베스 왕비도 빼놓을 수 없다. 에드워드는 여자를 잘못 선택하는 바람에 왕위에서 물러났지만, 언어장애에 시달리던 알버트의 곁엔 그를 보다 훌륭한 왕으로 만들기 위해 헌신하는 엘리자베스 왕비가 있었다. 언어장애 치료 전문가 라이오넬 로그를 찾아내 남편에 소개시킨 것도 그녀였다. 엘리자베스 왕비는 현재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이렇게 중요한 엘리자베스 왕비 역을 맡은 영국배우 헬레나 본햄 카터(Helena Bonham Carter)도 여우조연상 수상 유력 후보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한가지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었다: 도대체 이 영화가 왜 R 레이팅을 받았을까?

'킹 스피치'는 섹스와 폭력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영화다. 영화 도중에 잠깐 욕설이 나오긴 하지만, 욕설을 서로 주고받는 거친 씬에서 나온 게 아니라 조지 6세가 말 더듬는 습관을 고치기 위해 욕설까지 동원해 가며 연습을 하는 씬에서 나온 게 전부였다. 그저 웃자는 씬에서 잠깐 나온 것이었지, 누군가에 모욕을 주거나 위협을 하는 씬에서 나온 게 아니었다는 것이다. 아주 잠깐 나오는 욕설들만 제외하면 '킹 스피치'는 거진 G 레이팅에 가까운 패밀리 영화 수준이었다.

게다가, 요즘엔 PG-13 영화에도 F-Word 욕설이 자주 나오곤 한다. 폭력과 섹스가 난무하는 오락영화에선 욕설이 나와도 PG-13 레이팅을 받는데 20세기초 영국왕실을 그린 영화에서는 왕이 욕을 몇마디 했다고 R 레이팅을 받은 것이다. 요새 미국의 MPAA 레이팅에 대해 말이 많은데, '킹 스피치'를 보고 나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대충 이해가 갈 것이다.

'킹 스피치'가 합리적이지 않은 레이팅을 받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그래도 한가지 분명한 건, 내가 지금까지 본 2010년 영화 중에서 상을 받을 만한 자격이 가장 있어 보이는 영화였다는 점이다.

사실 나는 상을 받으려고 만든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잘 만든 영화에 상을 주는 게 아니라 예술영화다 닝기미다 하는 상을 받으려고 작정하고 만든 영화에게만 상을 주는 것처럼 보여서다. 그렇다고 수퍼히어로 영화에 작품상을 안길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아주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상을 받기 위해 만든 티가 나는 영화들을 보면 냉소적으로 돌변하곤 한다. 그런데 2010년 영화 중엔 상을 받을 만한 영화가 눈에 잘 띄지 않는 것 같았다. 볼 만한 영화, 재미있는 영화도 몹시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상을 받을 만한 영화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런데 '킹 스피치'가 있었다. 비록 스토리는 단순했고, 진한 감동의 여운 같은 것도 부족한 영화였지만 지금까지 내가 본 2010년 영화 중에서 '킹 스피치' 만큼 상을 받을 만한 조건과 자격을 갖춘 영화는 없는 것 같다. '킹 스피치'가 앞으로 열릴 영화제에서 상복이 터질 지는 앞으로 두고봐야 겠지만, 굵직한 부문에서 트로피를 들어올리지 않으면 섭섭할 것 같다.

그건 그렇고...

마지막은 이 영화를 보면서 문득 생각난 노래로 하자. 알버트/조지 6세가 이 노래를 들으면 몹시 불쾌해 할 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댓글 2개 :

  1. 무척이나 재밌게 본 듯 싶군요.. ㅎㅎㅎ
    여직원 king's bitch ㅋㅋㅋ
    역시 오공님은 뭔가 다르거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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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역시 기대를 저버리진 않더군요.
    아, 그리고...
    KING'S SPEECH와 KING'S BITCH가 발음이 좀 비슷하더라구요...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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