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널 판타지' 전세계 1억 개 출하했으면 뭐하나

일본 게임회사 스퀘어 에닉스(Square Enix)는 인기 RPG 시리즈 '파이널 판타지(Final Fantasy)'의 전세계 누계 출하 갯수가 1억 개를 넘어섰다고 밝혔다. 1987년 1탄이 발매된 이래 24년 만에 1억 개 출하를 달성한 것이다.

'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는 현재 14탄까지 제작되었으며, 스퀘어 에닉스는 지난 2009년 플레이스테이션 3와 Xbox 360 포맷으로 발매한 '파이널 판타지 XIII(Final Fantasy XIII)'의 속편 '파이널 판타지 XIII-2(Final Fantasy XIII-2)'를 금년 말 발매할 예정이다.

이렇듯 '파이널 판타지'가 지금도 변함없이 인기있는 게임 시리즈 중 하나인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시리즈가 갈수록 잘못된 방향으로 간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PlayStation) 포맷으로 발매됐던 '파이날 판타지 VII(Final Fantasy VII)'으로 90년대 말 인기가 절정에 달했던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는 2000년대로 넘어오면서 온라인화를 시도하고, 배틀 시스템 등을 뜯어 고치기 시작하면서 제목만 '파이널 판타지'인 게임 시리즈가 되어가고 있다.

플레이스테이션 2 포맷으로 발매된 첫 번째 타이틀이었던 '파이널 판타지 X(Final Fantasy X)'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그래픽 등 모든 면에서 업그레이드되었지만 게임 자체는 클래식 '파이널 판타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스퀘어 에닉스는 '파이널 판타지 XI(Final Fantasy XI)'을 온라인 RPG로 만들었고, 이어진 '파이널 판타지 XII(Final Fantasy XII)'도 온라인 RPG를 오프라인으로 플레이하는 듯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1탄이 나온지 세월이 많이 지난 만큼 시리즈에 어느 정도 변화를 주는 것은 문제될 게 없었다. 하지만 '파이널 판타지 XI'과 '파이널 판타지 XII'은 너무 지나치지 않냐는 생각이 들 정도로 변해버렸다.

나는 '파이널 판타지' 1탄부터 '파이널 판타지 X-2(Final Fantasy X-2)'까지 모든 '파이널 판타지' 게임을 다 플레이 했다. 그런데도 E3에서 '파이널 판타지 XII' 데모를 처음으로 플레이하면서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아 고생을 했다. '파이널 판타지 XI'이야 온라인 RPG인 만큼 무시하고 넘어갔는데 오프라인 버전인 '파이널 판타지 XII'까지 이렇게 이상하게 변했을 줄은 몰랐다.

혹자는 "이젠 과거의 턴방식(Turn-Based) RPG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고 말한다. 리얼타임 액션의 보다 익사이팅한 RPG를 만들 수 있는데 굳이 8~90년대의 턴방식 스타일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틀린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턴방식이 아무리 오래되었다고 해도 이것 또한 게임의 한 쟝르 중 하나다. 리얼타임이 턴방식보다 훨씬 익사이팅한 것은 두 말 할 필요도 없지만, 3인칭 시점 액션게임은 쌔고 쌨다. '메탈기어 솔리드(Metal Gear Solid)', '툼 레이더(Tomb Raider)' 등 3인칭 시점 액션 어드벤쳐, 액션 RPG, 액션 플랫폼 쟝르에 속하는 게임들은 무지하게 많다.

그런데 요즘 나오는 게임들을 보면 턴방식 RPG는 아예 씨가 말랐다. 일본산 RPG의 수가 부쩍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신작들은 전부 리얼타임 배틀로 바뀌었다. 요샌 오래 전에 나왔던 클래식 게임들이 PSP, DS, 아이폰 등 휴대용 게임으로 재발매된 것을 제외하곤 턴방식 RPG를 찾아보기 힘들다.

아래 이미지는 아이폰 용으로 발매된 '파이널 판타지' 1탄 스크린샷.

이제는 액션 RPG를 하고 싶으면 액션 RPG를 하고, 턴방식 RPG를 하고 싶으면 그러한 게임을 하던 시절은 지나간 것일까?

한 때 일본산 비디오게임을 대표했던 쟝르 중 하나인 턴방식 RPG가 사라지고 있다. 한 때는 '일본산 게임은 전부 다 턴방식 RPG냐'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흔해빠진 쟝르였는데, 요새는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이렇게 된 이유로는 여러 가지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1인용, 오프라인, 직선형의 스토리 진행형 게임에서 멀티 플레이어, 온라인, 스토리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도 높은 게임 쪽으로 유행이 옮겨가면서 문제가 발생한 것일 수도 있고, 새로 나온 성능 좋은 게임 시스템에 걸맞은 게임을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에 자꾸 무언가를 뜯어고치며 변화를 주려 하다가 말아먹기 시작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턴방식 RPG를 이런 식으로 완전히 없애버리다시피 하는 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턴방식 RPG가 아무리 레트로 스타일이라고 해도 여전히 그 쟝르만의 특징과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턴방식이 아무리 시대와 유행에 뒤처지는 구닥다리 스타일이고 익사이팅한 맛도 리얼타임에 비해 덜하다고 해도 그것 만의 독특한 재미가 분명히 있다. 그러므로 제대로만 만들면 과거의 전형적인 턴방식을 유지하면서도 여전히 재미있는 콘솔 RPG가 나올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지금은 올드스쿨 카탈로그나 뒤져야 턴방식 RPG를 찾아볼 수 있다. 이 덕분에 요즘엔 플레이스테이션 3, Xbox 360 등 섹시한 게임 콘솔용으로 발매되는 RPG엔 관심이 없고 게임기로 보기 힘든 아이폰용 게임에 더 끌리게 됐다.

아이폰을 붙잡고 40시간 넘게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를 하고 앉아있는 것을 보면 비디오게임 자체에서 관심이 멀어진 건 아닌 듯 하다. 그러나 요샌 '파이널 판타지 XIII', '파이널 판타지 XIII-2' 이야기를 들어도 감흥이 없다. 예전엔 '파이널 판타지'라고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는데, 요샌 '파이널 판타지'고 닝기미 판타지고 관심이 없다. '파이널 판타지'가 지금까지 전세계 출하 1억 개를 돌파했다지만, 이젠 더이상 시리즈에 흥미가 끌리지 않는다. 내가 기억하고 있던 시리즈가 더이상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새로운 RPG 시리즈는 상관하지 않겠다. 새로 시작하는 RPG 시리즈는 최신 유행에 맞추든 무엇에 맞추든 상관하지 않고 그려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파이널 판타지' 처럼 턴방식 RPG로 유명세를 얻게 된 시리즈는 전통적인 게임 시스템을 최대한 그대로 유지하는 게 팬들에 대한 예의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나 스퀘어 에닉스는 '파이널 판타지 XI'과 '파이널 판타지 XIV'로 이미 두 차례나 온라인 RPG를 시도하면서 오랜 '파이널 판타지' 팬들을 실망시켰다. 오프라인 버전인 '파이널 판타지 XII'와 '파이널 판타지 XIII'도 실망스럽긴 마찬가지다. 장점 또한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도대체 언제까지 배틀 시스템 뜯어고치기로 쓸데없어 보이는 장난을 계속 할 것인지 궁금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