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6월 10일 금요일

'수퍼 에이트', 신선도 제로의 클래식 패밀리 영화 복사판

80년대엔 'E.T', '구니스(The Goonies)', '그렘린(Gremlins)', '백 투 더 퓨쳐(Back to the Future)' 등등 온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패밀리 어드벤쳐 영화들이 많았다. 이런 영화들을 보면서 자랐다 보니 지금도 '여름철 패밀리 영화'라고 하면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의 80년대 영화들이 떠오른다.

그러나 요샌 이런 영화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여름철이 되면 방학을 맞이한 청소년들을 겨냥한 영화들이 쏟아지는 건 예전과 다를 바 없지만, 온통 코믹북 수퍼히어로와 그 사촌들에 대한 영화 천지일 뿐이다. 여름철 패밀리 영화답게 보이는 영화들이 사라진 것이다.

최근에 본 여름철 영화 중에서 그나마 여름철 패밀리 영화다워 보인 영화는 파라마운트의 '트랜스포머스(Transformers)' 시리즈가 거진 유일하다. '수퍼히어로 영화구나', 'SF-판타지 영화구나' 이전에 '아, 여름철 영화구나'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던 영화가 바로 '트랜스포머스' 시리즈다. 어리버리해 보이는 틴에이저 남자 주인공과 섹시한 여자 친구, 유머러스한 부모, 흥겨운 배경음악, 그리고 SF 어드벤쳐 등등 과거의 여름철 패밀리 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친숙한 구성요소들이 모두 들어가 있다는 게 눈에 띄었던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향수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역시 스티븐 스필버그처럼 여름철 블록버스터 제작에 노우하우가 있는 양반이 만들어야 제 맛이 난다는 생각도 들었다. 여름철 블록버스터는 '완성도'보다 '맛'과 '느낌'이 중요한데, 스필버그가 프로듀싱한 '트랜스포머스' 시리즈는 이것을 갖추고 있었다.

여름철 영화에 일가견이 있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2011년에도 '수퍼 에이트(Super 8)'이라는 영화를 들고 여름철 극장가로 돌아왔다. TV 시리즈 '에일리어스(Alias)', '로스트(Lost)', 극장용 영화 '클로버필드(Cloverfiled)', '스타 트렉(Star Trek)' 등으로 유명한 J.J. 에이브람스(J.J. Abrams)와 스티븐 스필버그가 함께 제작한 영화로 주목받았던 그 영화가 바로 이 '수퍼 에이트'다.

그렇다면 60대의 올드스쿨 프로듀서 스필버그와 40대의 뉴스쿨 프로듀서 에이브람스가 함께 어떤 스타일의 영화를 만들었을까?

놀랍게도 옛 추억이 되살아나게 하는 올드스쿨 여름철 패밀리 영화였다. '수퍼 에이트'는 70년대에 수퍼 8 카메라로 영화를 만든다고 설치던 동네 조무래기들이 미스테리한 열차 사고 이후 벌어지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는 전형적인 패밀리 SF 어드벤쳐 영화였다.



그렇다면 이 영화도 '아, 여름철 영화구나' 하는 생각이 바로 드는 영화였냐고?

그걸 노린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수퍼 에이트'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노스탈지아'였다. 지난 80년대 스타일의 패밀리 영화 포뮬라를 그대로 따라했다는 사실을 한 번에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맛이 제대로 나지 않았다. 향수를 자극하는 데 필요한 요소들을 기계적으로 조립한 티가 너무 심하게 났기 때문이다. 클래식 여름철 패밀리 영화처럼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들은 모두 있었지만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았으며 보여주기 위해 준비해 놓은 게 전부로 보였다.

사실, '수퍼 에이트'를 보면서 수시로 떠올랐던 생각은 '아, 80년대 여름철 패밀리 영화 같구나'가 아니라 '아, 참으로 '로스트'스럽구나' 였다.

여기서 '로스트'란, 얼마 전 막을 내린 ABC의 인기 TV 시리즈 '로스트'를 의미한 것이다.

물론 '수퍼 에이트'는 열대지역 섬의 해안가 경치와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스트'와 겹치는 점들이 상당히 자주, 많이 눈에 띄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을 몇 가지 예로 들자면 대중교통 사고, 70년대 배경, 필름 영사기, 미스테리한 비디오, 자석, 메탈릭 소리를 내는 몬스터를 비롯한 음향 효과 등을 꼽을 수 있다.

말이 나온 김에 살짝 비교를 해보자.

TV 시리즈 '로스트'를 본 사람들이라면 여객기가 미스테리한 섬에 추락하면서 시작했다는 사실을 잘 알 것이다. '수퍼 에이트'는 여객기 대신 열차 사고가 난다. 열차 사고 직후 아이들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사고 지점을 서성이는 씬은 '로스트'에서 여객기 추락 직후 생존자들이 바닷가에서 혼란스러워하던 씬과 겹쳐졌다. 70년대 배경도 빼놓을 수 없는 공통점이다. '로스트'는 70년대와 2000년대를 오갔으며, 영사기를 이용해 필름을 보면서 미스테리를 풀어나가는 씬도 있었다. '수퍼 에이트'도 시대배경이 70년대일 뿐만 아니라 오래된 필름을 영사기로 돌리며 미스테리 퍼즐을 맞추는 씬까지 나온다. 또, 주위에 있는 모든 쇠붙이들을 끌어당기는 어마어마한 자기력 에너지가 등장하는 것도 '로스트'와의 공통점 중 하나이며, 정체불명의 몬스터가 메탈릭 소음을 내면서 마을 주민을 공격하는 씬은 '로스트'에서 검은 연기(일명: 스모키)가 사람들을 공격하던 씬과 거의 똑같았다.

여기에 'E.T', '그렘린(Gremlins)', '구니스(Goonies) 등을 섞으면 '수퍼 에이트'가 완성된다.

그렇다. '수퍼 에이트'는 J.J. 에이브람스의 인기 TV 시리즈 '로스트'와 스티븐 스필버그의 80년대 여름철 패밀리 영화를 어색하게 섞어놓은 신선도 제로의 클래식 여름철 패밀리 영화 복사판이었다. '수퍼 에이트'가 믿은 것이라곤 80년대 패밀리 영화들과 얼마 전 종영된 '로스트'에 대한 향수가 전부였다. 뻔할 뻔자 스토리에 흥미를 끌 만한 장치도 없이 향수 하나에만 매달렸다. 이렇다 보니 '수퍼 에이트'는 80년대 패밀리 영화 시늉만 하다가 그친 지극히도 평범한 SF 영화에 그치고 말았다.

그래도 과거의 향수에 빠져 재미있게 즐겨보려고 노력했다. 있어야 할 것은 다 있었고, 영화도 그럭저럭 볼 만한 수준은 됐으니 이것 저것 따지지 말고 과거로 시간여행을 했다고 상상하면서 최대한 즐겨보려고 노력했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참 재미있게 봤다", "옛날 생각이 팍팍 났다"고 크게 떠들고 싶었다. 하지만 맘처럼 되지 않았다.

역시 J.J. 에이브람스는 2000년대의 스티븐 스필버그가 아니었다. 스필버그와 에이브람스의 연합에 혹시나 하는 기대를 했었는데, 결과는 역시나 였다. 스필버그에게도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거의 경험을 살려 멋진 노스탈직 패밀리 영화를 선보일 것으로 기대했었는데 포뮬라만 무성의하게 울궈먹는 데 그쳤기 때문이다.

80년대 올드스쿨 패밀리 영화처럼 만들고자 했다는 아이디어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수퍼히어로가 판치는 요즘 여름철 영화에 식상한 영화관객들에겐 나름 새롭게 보였을 수도 있다. 앞으로도 이러한 시도를 계속해서 이어나갔으면 하는 바램도 있다. 하지만 다음 번엔 그저 시늉내기 수준에서 그치지 말고 좀 더 제대로 만들었으면 좋겠다. 포뮬라만 가지고 장난칠 생각을 하지 말고 똑바로 만들어 볼 생각을 해보기 바란다.

아, 그리고... J.J. 아브람스는 이런 영화를 만들지 말고 차라리 '로스트'를 빅스크린으로 옮기는 게 나을 듯.

댓글 8개 :

  1. 저도 별로 안 땡기는 영화였는데,
    리뷰를 보니, 더더욱....
    그렇지만 모든 영화를 섭렵하시는... 존경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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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그래도 좀 궁금했던 영화였는데 별로더라구요.
    J.J 에이브람스의 영화는 아직 볼 만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 그대신 전 TV를 안 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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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썩어도 준치 정도도 안되나 보군요.^^

    스필버그 옹도 확실히 노쇄한 것 같습니다.
    JJ 에이브럼스는 어떨때는 굉장히 기대 되다가 어떨때는 굉장히 실망스럽고,
    결국 한계가 분명한 사람 같기도 합니다.

    한때 차기 본드 영화는 에이브럼스나 크리스토퍼 놀란 둘중의 한명이 맡아주길 내심 기대했었는데요.
    두 사람 모두 영국 사람이잖아요.^^

    에이브럼스는 포기해야할듯 합니다.~

    그리고 카르트 블랑슈 지금 막 한국어판이 배송되어 왔군요.
    어차피 영문판도 살 계획이니 두 번은 읽겠네요.

    또 한국 독자들한테 반가운 소식은 한 국내 출판사에서 이언 플레밍 제임스 본드 시리즈 전 편을 번역출간한다고 합니다.
    1차분으로 CR, LaLD, TSWLM, QoS 이렇게 발매되었는데, 따끈따끈하게 새책 냄새를 풍기면서 배송되어 왔습니다.^^

    본드에 관한 지름은 언제나 즐겁네요~
    이러다가 다음 차로 카르트 블랑슈의 본드카인 컨티넨탈 쥐티 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요. 물론 돈은 없지만요. 대신 레플리카 라도...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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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에이브람스가 영국인이었나요?
    아무튼 J.J는 007 시리즈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아 한국어판 드디어 나왔나요?^^
    왜 여태 안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늦어도 한참 늦었죠.
    근데 가장 본드 소설 답지 않은 TSWLM가 1차분에 들어갔군요.

    아, 존 가드너 소설도 30주년 기념으로 재출간된다고 하더라구요.
    아직 안 나온 것 같지만 이것도 읽을 만 할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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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앗 제가 잠시 착각했네요.
    놀란이 영국 사람이고 JJ는 미국 사람이네요~^^
    나이가 들면서 기억이 점점 가물가물해집니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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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스필버그 울궈먹기식의(?) 영화일 수도 있겠습니다. 스필버그의 슬럼프입니까... 그래도 스필버그라서 한번 보게 되는 그런 경향이 많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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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CJ:
    사실 리즈 테일러가 영국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도 많거든요...^^
    요샌 크리스챤 베일도 이 그룹에 드는 것 같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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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마법루시퍼†:
    잘만 하면 울궈먹기도 재미있을 수 있지만...
    수퍼 에이트는 아니더라구요.
    이것저것 짬봉시켜서 무성의하게 시늉만 낸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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