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19일 일요일

본드걸, 지나 카라노, 그리고 익스펜더블

007 시리즈 23탄 'SKYFALL'에 등장하는 본드걸에도 '총잡이'가 있다. 영국 여배우 나오미 해리스(Naomie Harris)가 맡은 캐릭터, 이브가 바로 그녀다. 나오미 해리스는 이전부터 "요가와 킥복싱을 하고 있다", "사격훈련을 받았다", "본드걸 이브는 킥-애스(kick-ass) 캐릭터"라면서 '액션걸' 캐릭터를 맡았다는 힌트를 던지더니, 영국 영화 매거진 토탈 필름(Total Film)과의 인터뷰에선 그녀가 맡은 캐릭터를 여자 버전 제임스 본드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렇다. 007 시리즈에서 더이상 보고 싶지 않았던 본드걸 캐릭터가 'SKYFALL'로 또 돌아오는 모양이다.

본드걸 캐릭터가 매력을 잃고 거칠어지기 시작한 것은 90년대부터다. 이러한 변화는 시대의 흐름에 맞춰 과거의 섹스인형 본드걸 이미지에서 벗어나 '강한 여성상'을 보여주고자 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 '강한 여성상'의 묘사 방법에 있다.

007 제작진은 강한 여성 캐릭터를 묘사하는 방법을 액션에서 찾으려 했다. 본드걸에게 총을 쥐어주고 제임스 본드 못지 않은 액션 씬을 요구하면서 '본드걸도 강하고 다재다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1997년작 '투모로 네버 다이스(Tomorrow Never Dies)'의 본드걸 와이 린(양자경)과 2002년작 '다이 어나더 데이(Die Another Day)'의 본드걸 징크스(할리 베리)가 여기에 해당하는 본드걸들이다.


물론 총질, 주먹질, 발길질을 잘하는 터프한 액션걸 캐릭터로 '강한 여성상'을 어느 정도 보여줄 수는 있을 것이다. 과거 60년대의 섹스인형 본드걸과는 분명히 다르다는 점을 보여주려던 것이 목적이었다면 성공적으로 목적을 달성했다고 본다.

하지만 여기서 007 제작진이 간과한 점이 있다: 과연 영화관객들이 007 시리즈에서 '쉬-본드(She-Bond)'를 보고싶어 할까?

당연히 아니다. 강한 본드걸 캐릭터까지는 문제가 없어도 여전사 타잎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007 제작진은 여전사 타잎 본드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60년대의 섹스인형 본드걸은 곤란한 만큼 시대에 맞는 강인하고 활동적인 본드걸 캐릭터를 선보이고 싶다는 것은 알겠는데, 문제는 그 방법을 여전사에서밖에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90년대 이후에 나온 여섯 편의 제임스 본드 영화 본드걸 중 단 2명을 제외하곤 모두 실패한 본드걸 리스트에 오르게 됐다. 양자경(Michelle Yeoh), 테리 해처(Teri Hatcher), 소피 마르소(Sophie Marceau), 드니스 리처드(Denise Richards), 할리 베리(Halle Berry)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여배우들이 본드걸로 연달아 출연했음에도 불구하고 질 낮은 본드걸 캐릭터의 레벨을 끌어올리지 못했다.

그렇다면 1995년작 '골든아이(GoldenEye)'서부터 2008년작 '콴텀 오브 솔래스(Quantum of Solace)'까지의 90년대 이후 리딩 본드걸 중에서 성공한 2명의 캐릭터는 누구일까?

당연한 얘기겠지만, '골든아이'의 나탈랴(이자벨라 스커롭코)와 '카지노 로얄(Casino Royale)'의 베스퍼(에바 그린)이다.

그 이유는? 여배우를 잘 골라서?

아니다.

'골든아이'의 나탈랴와 '카지노 로얄'의 베스퍼 모두 여전사와는 거리가 먼 캐릭터였지만 강하고 당찬 현대 여성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줬기 때문이다. 나탈랴와 베스퍼는 전문직을 가진 성공한 커리어 우먼이므로 어떻게 보면 평범한 캐릭터로 보일 수도 있지만, 이들의 도움 없이는 제임스 본드가 사건을 해결할 수 없도록 되어있었다. 총칼을 휘두르는 피지컬한 여전사에 비하면 만만해 보일지 모르지만, 이들이 한 번 "NO" 하면 천하의 제임스 본드도 "누님" 타령을 해야만 하는 캐릭터였다.

바로 이런 것이 우먼 파워를 제대로 묘사한 게 아닐까?


그러나 007 시리즈 23탄 'SKYFALL'에 본드걸로 캐스팅된 영국 여배우 나오미 해리스는 총질과 발길질을 하는 액션걸 역할을 맡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물론 다니엘 크레이그(Daniel Craig) 시대의 제임스 본드 시리즈는 과거 피어스 브로스난(Pierce Brosnan) 시절과 차이가 있는 만큼 지난 와이 린, 징크스처럼 지나치게 과장된 여전사 캐릭터까지는 아닐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지난 '콴텀 오브 솔래스'의 본드걸, 카밀(올가 쿠릴렌코)이 거진 피어스 브로스난 시대의 본드걸로 보이는 등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에 와서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으므로, 이번에도 어찌 될 지 두고봐야 알 수 있을 듯 하다.

많은 사람들은 다니엘 크레이그가 제임스 본드를 맡으면서 007 시리즈에 대단히 엄청난 변화가 온 것으로 착각하지만, 눈에 바로 띄는 몇 가지 큰 차이점들만 살짝 걷어내면 달라진 점보다 과거의 것이 그대로 남아있거나 반복되는 점이 더 많다는 사실이 보인다. 007 제작진은 "달라졌다", "바뀌었다"는 표현을 입버릇처럼 사용하지만, 바뀐 것 대부분이 쓸데 없는 것이거나 바꿔야 할 것을 그냥 놔둔 경우가 더 많다.

제작진이 시급하게 수정해야 할 점 중 하나가 바로 본드걸이다. 본드걸로 캐스팅된 여배우가 "여자 버전 제임스 본드" 타령을 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됐다.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본드걸을 우스꽝스러운 여전사 흉내내기 캐릭터로 만들면 나중엔 지나 카라노(Gina Carano) 같은 여배우를 본드걸로 캐스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MMA 선수 출신 영화배우 지나 카라노는 최근 개봉한 액션영화 '헤이와이어(Haywire)'에서 화끈한 액션을 선보인 바 있다. 연기는 모르겠어도 일단 치고 받고 때려부수는 파트엔 자신이 있어 보였다. 다른 영화는 아직 잘 모르겠어도 액션영화 시리즈 '익스펜더블(The Expendable)'의 새 멤버로 아주 잘 어울릴 듯 보였다.

아마도 007 제작진이 선호하는 가장 이상적인 현대 여성상이 아닐까 싶다.

'익스펜더블'에나 어울림직한 여배우가 미래의 본드걸이 되지 말란 법은 없다. 본드걸 뿐만 아니라 제임스 본드도 그쪽으로 이동할 지 모른다. 불필요할 정도로 근육을 키운 다니엘 크레이그가 쓸데 없는 주먹질을 하는 것을 보니 "내 이름은 람보, 존 람보..."라고 할 날이 머지 않은 지도 모른다. 이런 식으로 하면 다니엘 크레이그도 지나 카라노와 함께 '익스펜더블' 시리즈의 새 멤버로 아주 잘 어울릴 듯 하다.

007 시리즈가 원래 이랬던가?

'익스펜더블 2' 스틸

물론 제작진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상하게도 방법이 하나같이 잘못된 것 같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임스 본드 캐릭터는 영화배우가 바뀌면서 조금씩 성격이 달라지는 만큼 크게 걱정할 문제가 아니다. 반면 본드걸은 제임스 본드의 얼굴과 성격이 달라져도 그대로라는 게 문제다. 피어스 브로스난 시절부터 한심해진 본드걸 캐릭터가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로 이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007 제작진은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된 본드걸 캐릭터를 준비해야 한다. 90년대 이후 007 제작진이 선보인 대부분의 본드걸 캐릭터들은 페미니스트 단체의 '섹스인형' 비판만 일단 면하면 된다는 식의 성의가 부족해 보이는 캐릭터들이었다. 이젠 바뀔 때가 됐다. 다시 섹스인형 시절로 화끈하게 돌아가든지, 아니면 액션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 제임스 본드를 서포트하는 개성있는 본드걸 캐릭터를 준비하든지 변화를 줘야 한다. 어설픈 여전사 타잎의 본드걸 캐릭터에 대한 미련도 버려야 한다. 007 시리즈의 액션은 제임스 본드 하나만으로 충분하다. 본드걸까지 총을 들고 설칠 이유가 없다.

어떻게든 손을 보지 않는 한 현재 상태로는 본드걸은 과거와 같은 인기를 누리기 힘들다. 007 시리즈에서 본드걸이 차지하는 비중이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인데, 본드걸이 갈수록 매력을 잃는다면 007 시리즈의 인기 또한 함께 떨어질 수밖에 없다. 007 시리즈의 대표적인 볼거리 중 하나가 시원찮아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007 제작진이 과연 어떤 방법으로 해답을 찾을 지 지켜보기로 하자.

댓글 4개 :

  1.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느낌을 주길 원하긴 합니다만,
    여전사 스타일의 본드걸은 이미 과거에 시도했고,
    지금도 많은 영화가 시도하고 있지만, 한 번도 마음에 든 적이 없습니다.

    부탁이니 자제해주면 고맙겠어요.
    특히 나오미 해리스는 여전사 역을 하기엔 외모도 안 어울리죠.

    왜 프로페셔널한 캐릭터로 강한 여성상을 표현하는 걸
    여전사로만 생각하는 지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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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아무래도 그게 가장 쉽기 때문이 아니겠나 싶습니다.
    눈에 바로 띄는 특징만을 좋아하는 것 같거든요.
    사실 이건 007 시리즈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헐리우드에 액션이 되는 여배우가 많지 않다 보니,
    마초맨 시늉에 어울리는 배우를 여자 액션스타로 내놓는 것 같습니다.
    제가 아는 한 미국인 여성들은 밝고 깜찍한 것 보다 어둡고 터프한 쪽을 선호하므로 크게 놀랄 건 없죠.
    하지만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액션물을 만드는 방법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요샌 코믹북 수퍼히어로물이 헐리우드를 주름잡는 세상이니 더욱 그런 쪽으로 가는 지도...
    하지만 007 시리즈는 제임스 본드가 주인공이므로 이런 걸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죠.
    그런데도 저런 본드걸 캐릭터를 내놓고 있는 건 분명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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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제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굳이 안해도 될 걸 가지고, 제작진들은 최선인양 포장하는데, 아주 질려버렸습니다.^^
    푸시 갈로어 같은 강하지만 여성스러운 캐릭터라면 언제든지 환영입니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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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007 시리즈의 세계에선 아무리 시대가 변했다 해도 지킬 건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007 시리즈를 칙 플릭으로 만들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죠.
    제임스 본드는 항상 올바른 행동만 하는 캐릭터가 아니므로,
    여자를 좀 거칠게 다뤄도 007 시리즈 세계에선 전혀 문제될 게 없습니다.
    그런데 본드걸이 되레 갈수록 거칠어지니 문젭니다.

    맞습니다. 말씀대로 푸씨 갈로어와 같은 여걸형은 괜찮을 듯 합니다.
    문제는 네이비실이 울고갈만한 여전사 본드걸들이죠.
    본드걸은 사실 핸드건 등 무기를 만지는 씬이 한 번도 안 나와도 문제 없거든요.
    근데 요새 본드걸들은 무기를 내려놓지 않죠. 짜증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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