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14일 일요일

'퍼시픽 림', 독창성은 떨어져도 만족감은 기대 이상

"거대한 로봇과 거대한 몬스터의 전투를 그린 영화"라고 하면 피식 웃음이 먼저 나오는 게 사실이다. 거대한 로봇이 등장하는 영화 또는 애니메이션이 수두룩하고, 거대한 몬스터가 등장하는 괴수 영화도 한 두 편이 아니라서 이젠 식상하다 못해 코믹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2013년 여름 바로 그러한 영화가 개봉했다. 바로 워너 브러더스의 '퍼시픽 림(Pacific Rim)'이다.

멕시코 영화감독 기예모 델 토로(Gillermo del Toro)가 연출을 맡은 워너 브러더스의 여릉철 영화 '퍼시픽 림'은 FX의 TV 시리즈 '썬스 오브 애너키(Sons of Anarchy)'의 영국 배우 찰리 허냄(Charlie Hunnam), '바벨(Babel)'의 일본 여배우 린코 키쿠치(Rinko Kikuchi), 흑인 제임스 본드 후보 1순위로 꼽히고 있는 영국 배우 이드리스 엘바(Idris Elba) 주연의 SF-몬스터 영화로, 바다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외계 몬스터와 인간이 조종하는 거대한 로봇 간의 전투를 그렸다.

'퍼시픽 림'의 스토리는 단순하다.

카이주(Kaiju)라는 거대한 외계 몬스터가 태평양에서 튀어나와 전세계의 대도시들을 파괴하자 인간들은 이들과 맞서 싸울 거대한 로봇 얘거(Jaeger)를 개발한다. 얘거는 특수 장치를 통해 마음과 기억이 서로 연결된 두 조종사가 한마음으로 조종하는 거대한 전투용 로봇이다.

5년 전 조종 파트너를 잃은 뒤 직업을 바꾼 전직 로봇 조종사 롤리(찰리 허냄)는 얘거 프로젝트 지휘관 스태커(이드리스 엘바)로부터 복귀 요청을 받고 다시 로봇 조종사로 돌아와 새로운 파트너 조종사 마코(린코 키쿠치)와 함께 거대한 로봇을 함께 조종하며 카이주 퇴치 미션을 시작한다...


'퍼시픽 림'을 보면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여러 다른 SF 영화들의 흔적이었다.

도시를 파괴하는 거대한 몬스터는 '고질라(Godzilla)', 바다에서 튀어나온 외계인은 '배틀 쉽(Battle Ship)', 거대한 로봇은 '트랜스포머스(Transformers)', 조종사들의 로봇 조종 방법은 '리얼 스틸(Real Steel)'을 연상케 했다. 또한, 90년대 SF 영화 '스트레인지 데이(Strange Days)'에서 머리 위에 올려놓고 기억을 저장시키는 장치친 SQUID와 아주 흡사하게 생긴 장치가 눈에 띄었으며, 롤리와 마코의 마음이 서로 연결되면서 롤리가 마코의 과거 기억을 보는 씬은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 감독의 '인셉션(Inception)'과 비슷해 보였다.

여기에 클래식 제임스 본드 영화를 연상케 하는 엔딩도 빼놓을 수 없다.

이렇듯 '퍼시픽 림'은 한마디로 독창성 제로의 영화였다. '거대한 로봇 vs 거대한 몬스터'라는 식상한 소재부터 그다지 흥미가 끌리지 않았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여러 다른 SF 영화들을 짜깁기해 놓은 것이 전부였을 뿐 '퍼시픽 림'만의 독창적인 부분이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나 영화는 기대 이상으로 볼 만했다. '트랜스포머스를 흉내낸 또 하나의 영화', '고질라 vs 트랜스포머스'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영화였는데, 예상처럼 아주 한심한 영화는 아니었다. '고질라 vs 트랜스포머스' 영화로 이미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액션과 CGI 비쥬얼 효과는 그다지 새롭거나 대단해 보이지 않았지만 영화 내내 지루할 틈을 주지 않았다.

등장 캐릭터들도 인상적이었다. 주연을 맡은 찰리 허냄은 헐리우드 액션 블록버스터 프랜챠이스 리딩맨으로 손색이 없어 보였고, 여주인공을 맡은 린코 키쿠치도 일본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은 '퍼시픽 림'과 아주 잘 어울려 보였다. 실현될 가능성은 제로이지만 꾸준히 흑인 제임스 본드 후보로 꼽히는 이드리스 엘바는 카리스마틱한 리더 역에 아주 잘 어울렸고, 코믹 릴리프 역을 맡은 과학자 역의 찰리 데이(Charlie Day)와 번 고맨(Burn Gorman)도 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렇다. '퍼시픽 림'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잘 만들어진 영화였다. 이 정도라면 여름철 영화로써 흠잡을 데가 많지 않아 보였다. 현란한 비쥬얼과 요란스러운 사운드로 관객들을 압도하려는 것이 전부인 시시하고 흔해 빠진 로봇 vs 몬스터 영화일 것으로 생각했는데, 만족감은 기대 이상이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퍼시픽 림'이 아시아-프렌들리 영화라는 점이었다. 일본 애니메를 그대로 영화로 옮긴 듯한 느낌이었으며, 거대한 로봇과 몬스터가 등장하는 만화, 애니메이션 등에 친숙한 아시아 지역을 겨냥한 영화가 분명해 보였다. 로봇 디자인이 약간 썰렁하고 조종석이 마치 체육관에 있는 운동기계처럼 불편해 보인다는 점 등 몇 가지가 신경에 거슬리긴 했어도, 로봇이 나오는 일본산 메카(Mecha) 애니메이션과 '고질라' 등과 같은 몬스터 영화에 친숙한 아시아 지역 관객들은 재밌게 볼 수 있을 만한 영화 같았다.

그.러.나...

식상한 소재, 독창성 부재가 '퍼시픽 림'의 가장 큰 약점이다. 트레일러만 봐도 '또 이런 영화구나'라는 생각이 바로 드는 영화라는 게 문제다. 스토리 뿐만 아니라 액션 씬과 비쥬얼 효과 등 영화 전체가 안 봐도 비디오 수준이다 보니 관객들이 흥미를 못 느끼기에 딱 알맞아 보이는 영화다. 요새 겉으로만 그럴싸해 보이는 실속 없는 SF 영화들이 워낙 많이 나오다 보니 관객들이 또 그런 영화 중 하나인 줄 알고 관심을 갖지 않고 피하기 딱 알맞은 영화다. 그리 끌리는 영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류작 정도로 비쳤을 뿐 관객들의 뜨거운 관심을 모으는 데 실패한 것도 사실이다. 막상 영화를 보고 나면 생각이 많이 달라질 수도 있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퍼시픽 림'을 보러 갈 지 모르겠다.

댓글 6개 :

  1. 처음 두 전투는 흥분하면서 봤는데 한 세번째쯤전투되니 감흥이 떨어지고 네번째 전투는 그러려니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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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런 영화는 액션 파트가 뻔할 뻔자이다 보니 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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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기사를 보니, 마케팅의 실패라는 이야기가 있네요. 오프닝 주말에 $40밀리언 보다 조금 적게 $38밀리언 정도 벌었는데, analyst들은 이보다 적은 $25밀리언 예상했었다고. 영화를 본 사람들의 반응이 생각보다 훨씬 나은 걸보니 '아차! 광고 좀 더 할껄' 그랬나 싶은가 보죠.

    그나저나, IMAX 3D로 봐야한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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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마케팅 실패가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거대한 로봇과 몬스터가 나오는 영화에 흥미를 못느낀 사람들이 많다는 게 근본적인 문제겠죠.
      진부한 소재를 홍보로 커버하는 데 한계가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퍼시픽 림은 뻔할 뻔자 영화라는 점을 극복하고 볼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한 영화라고 봅니다.
      일단 보고나면 만족스럽지만 식상한 소재에 흥미를 못느끼는 사람들은 외면하기 딱 알맞죠.
      포스터와 트레일러만 봐도 어떤 영화라는 감이 딱 잡혔으니 기대가 별로 안 됐습니다.

      전 잘 만든 영화는 아이맥스가 아니라 아이폰으로 봐도 재밌다고 생각합니다.
      비쥬얼밖에 볼 것 없는 영화를 20불 내고 아이맥스로 볼 가치가 있는지 모르겠고,
      그것밖에 볼 게 없으니 아이맥스로 본다고 해도 스크린 크기가 사기라서...^^
      3D도 그걸로 본다고 대단한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것도 좀 과장된 사기죠.
      얼마 전에 보니 금년에 미국서 3D 수익이 크게 떨어졌다고 하더군요. 이것도 해외용인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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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저도 같은 선입견으로 볼 생각접고 패스 했거든요. 그래서, 마케팅 부재 때문에 흥행이 부진하다고 보진 않았어요. 다만, 그 가능성에 대해서는 일리가 있다고 생각을 했었거든요. 트레일러에서 큰 로봇이 나와 때려부수고 싸우는 단순한 모습만이 아니라, 예를 들어 일본 에니메이션 evangelion이나 다른 소재에 대해서 힌트를 좀 줬더라면, 놓친 관객들을 잡을 수 있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봤거든요. 오공본드님이랑 사람들 리뷰를 보고서야 '이제라도 볼까?' 라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말이죠.:)

      3D 나 아이맥스에 대한 미련이 있어요. 몇번 트라이 해보고 영 아니다 싶어 안본지 꽤 되었는데요. 가끔씩 궁금하긴 할 때가 있네요. 예를 들어, 혹시 이 영화는 정말 3D아니면 아이맥스 용이 아니지 않을까 하고..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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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퍼시픽 림의 경우엔 홍보비용에서 미리 세이브한 것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흥행실패 낌새를 미리 채고 손액을 줄이기 위해 홍보를 살살했을 수도 있다고 보거든요.
      제 생각엔 로봇 vs 몬스터 영화라는 식상한 세팅을 극복하기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또, 여름철 영화는 내용보다 스케일이다보니 VFX 홍보에 초점을 맞춘 듯 하구요.
      그것 이외로 보여줄 게 많은 영화도 아니고... 그래도 영화는 볼 만합니다.

      전 아이맥스 3D로 관객 호기심 자극하는 영화가 나오게 됐다는 자체가 별로 맘에 안듭니다.
      많은 영화들이 큰 돈을 들여 만든 VFX 쇼가 되었죠.
      TV를 별로 안 좋아하던 제가 요새 TV 쪽 관심이 부쩍 는 이유도 저런 것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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