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의 공통점은 제임스 본드 소설을 쓴 작가라는 점이다.
지난 50년대 초 영국 작가 이언 플레밍이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탄생시킨 이래 지금까지 여러 명의 소설가들이 007 시리즈를 계속 이어가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 나온 제임스 본드 소설들이 모두 만족스럽지 않았다. 2000년대 초 레이몬드 벤슨이 007 시리즈를 떠난 이후부터 새로운 소설이 나올 때마다 매번 작가가 교체되고 있는데, 세바스챤 폭스, 제프리 디버 등 제법 이름 있는 작가에 기회가 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대단히 실망스러웠다. 이언 플레밍 100주년 기념으로 60년대를 시대 배경으로 삼았던 세바스챤 폭스의 '데블 메이 케어(Devil May Care)', 21세기의 젊은 제임스 본드를 소개했던 제프리 디버의 '카르트 블랑쉬(Carte Blanche)' 모두 페이지를 넘기는 게 고통스러울 정도로 한심한 제임스 본드 소설이었다.
이번엔 윌리엄 보이드(William Boyd)의 차례.
이언 플레밍의 첫 번째 제임스 본드 소설 '카지노 로얄(Casino Royale)' 출간 60주년을 맞은 2013년 윌리엄 보이드가 쓴 새로운 제임스 본드 소설이 출간됐다.
제목은 '솔로(Solo)'.
우선 줄거리를 살짝 훑어보기로 하자.
1969년 45회 생일을 맞은 제임스 본드는 잔자림(Zanzarim)이라 불리는 가상의 서아프리카 국가에서 진행 중인 내전을 끝내기 위해 반군 지도자를 무력화 시키라는 임무를 띠고 프랑스 언론사 기자로 신분을 위장한 채 잔자림에 들어간다. 본드는 잔자림에서 만난 여성 에이전트, 블레싱의 도움으로 반군 거점에 도착하는 데 성공하지만 단순히 반군 지도자를 제거하는 게 전부가 아닐 만큼 내전이 복잡하게 얽혀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정체가 탄로나며 죽을 고비를 넘긴 본드는 그를 배신한 자와 그를 죽이려 한 브리드라 불리는 백인 용병을 찾아가 복수하기 위해 M과 영국 정보부 모르게 홀로 그들의 뒤를 쫓기 시작한다...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윌리엄 보이드의 '솔로'는 세바스챤 폭스의 '데블 메이 케어', 제프리 디버의 '카르트 블랑쉬'보다는 훨씬 나은 퀄리티의 제임스 본드 소설이었다. '데블 메이 케어'와 '카르트 블랑쉬'는 형편없는 제임스 본드 소설이었을 뿐만 아니라 평범한 액션 스릴러 소설로써도 후한 점수를 도저히 줄 수 없었던 소설이었지만, 윌리엄 보이드의 '솔로'는 그 정도로 한심하진 않았다.
그러나 '솔로'가 훌륭한 제임스 본드 소설이었다고 하진 않았다.
'솔로'는 제법 읽을 만했지만 훌륭한 제임스 본드 소설은 아니었다. 007 소설이라는 점을 잊고 평범한 스릴러 소설로써 보면 그럭저럭 읽은 만한 책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007 소설로써는 후한 점수를 주기 힘들었다. 사실, '솔로'를 읽으면서 제임스 본드 소설을 읽는다는 느낌이 거의 들지 않았다. 주인공 이름이 공교롭게도 '제임스 본드'였던 게 전부로 보였을 뿐 그레이햄 그린(Graham Greene), 존 르 카레(John Le Carre) 등의 영향을 크게 받은 또하나의 비슷비슷한 스파이 스릴러 소설 중 하나로 보였다. 그레이햄 그린, 존 르 카레 스타일을 모방한 스파이 스릴러 소설로써는 그럭저럭 읽을 만했지만 제임스 본드 소설로써는 부족하고 실망스러운 데가 많았다.
'솔로'는 이언 플레밍의 오리지날 제임스 본드 소설처럼 뚜렷하고 간단명료한 스토리라인을 따라가는 스파이-액션-어드벤쳐 소설이 아니라 겉으로는 그런 뉘앙스를 풍기면서도 배경으로 너무 많은 것을 늘어놓는 욕심을 부린 다소 산만한 소설이었다. 2차대전 당시 영국 특수부대원들이 펼쳤던 비밀작전의 영향을 크게 받은 이언 플레밍의 밀리터리 스타일 제임스 본드의 세계와 그레이햄 그린과 존 르 카레의 민간 정보부 세계의 중간에 어색하게 걸터앉은 듯한 엉거주춤한 느낌이 드는 소설이었다. '솔로'에서 본드가 그레이햄 그린의 책을 읽는 것도 절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플레밍 스타일과 그레이햄 그린, 존 르 카레 스타일을 믹스하는 건 아주 나쁜 아이디어는 아니었다. 하지만 깔끔하고 자연스럽게 믹스된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시대 배경이 1969년?
시대와 제임스 본드의 나이 등에 자꾸 얽매이면서 한 번은 60년대 한 번은 21세기로 오락가락하는 모습이 몹시 맘에 들지 않았지만, 보이드가 '솔로'의 시대 배경을 60년대로 설정한 것까진 넘어갈 수 있었다. 보이드가 원래 시대물을 많이 쓴 작가로 알려졌으므로 인터넷과 아이폰을 사용하는 21세기 007보다 지금은 찾아보기 어려운 영국의 젠슨(Jensen) 자동차를 모는 60년대 007이 더욱 잘 어울려 보이는 게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이언 플레밍 100주년 기념 소설이던 '데블 메이 케어'가 60년대를 시대 배경으로 삼았던 것처럼 '카지노 로얄' 60주년 기념인 셈인 '솔로' 역시 60년대를 배경으로 삼은 걸 보면 '기념'할 때마다 60년대로 돌아가는 우스꽝스러운 습관이 하나 새로 생긴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007 시리즈가 영화와 소설 모두 휘젓고 우왕좌왕하는 것밖에 남은 옵션이 없는 듯 하므로 제임스 본드 소설 시리즈가 '타임머신 007'이 된 것도 최대한 이해하려고 노력 중이다. 하지만 이제와서 플레밍이 지난 50년대에 창조한 오리지날 제임스 본드로 돌아가 그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려 한다는 자체가 약간 우스꽝스럽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아무리 '기념'할 일이 있다지만 굳이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서 먼지 묻은 오리지날 본드 캐릭터를 새 소설에 다시 꺼내놓을 필요는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도 60년대를 배경으로 삼은 값어치를 했다면 또 다른 얘기다.
그러나 이것도 아니었다. '솔로'는 분명히 시대 배경이 60년대였음에도 60년대 느낌이 전혀 오지 않았다. 1969년 45회 생일을 맞은 본드가 툭하면 2차대전 당시를 회상하고 요즘엔 찾아 보기 어려운 영국의 클래식 스포츠카 젠슨을 몰았지만 이런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이번 소설의 제임스 본드는 이언 플레밍의 오리지날 제임스 본드 캐릭터다', '이번 소설의 시대 배경은 60년대다'라는 사실을 계속 상기시키려 노력하면서 플레밍의 오리지날 제임스 본드와의 연결까지 시도했으나 작가가 억지를 부리는 것 같았을 뿐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본드가 툭하면 2차대전 당시를 회상하는 플래시백 파트를 읽으면서 시대물을 즐겨 썼다던 윌리엄 보이드의 장기가 무엇인지는 알 수 있었지만, 제임스 본드 소설의 시대 배경을 60년대로 삼았으면 됐지 그것만으로 모자라서 2차대전 얘기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 하는 생각에 고개를 젓게 됐다.
'솔로'에서 가장 실망스러웠던 점은 시대 배경을 60년대로 삼았으면서도 서아프리카의 가상 국가의 내전 이야기가 전부였다는 것이었다. 캐릭터만 플레밍의 오리지날 제임스 본드를 원했을 뿐 줄거리는 60년대와 별로 상관이 없었다. 지하자원 등을 둘러싼 부족간의 갈등으로 인한 아프리카 국가의 내전은 60년대 시대물에 적합한 소잿감으로 보이지 않았다. 보이드가 아프리카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인연 때문에 제임스 본드 어드벤쳐를 아프리카로 가져갔다는 덴 문제될 것이 없지만, 아프리카 내전과 지하자원에 얽힌 이야기는 60년대를 시대 배경으로 한 제임스 본드 소설에 적합해 보이지 않았다.
윌리엄 보이드가 60년대 배경의 제임스 본드 소설을 쓴다는 뉴스를 처음 접했을 때엔 냉전을 소재로 한 리얼하고 어두운 분위기의 스파이 어드벤쳐 소설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다.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스파이 소설로 봐야하느냐에 대한 논란이 있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007 시리즈가 아무래도 그 쪽에 가까운 것만은 사실이므로 시대 배경을 60년대로 옮겼다면 냉전 소재가 아니겠나 하는 생각을 제일 먼저 했던 것이다. 냉전이 한창이던 60년대는 스파이물 소잿감이 풍부하던 시절이었으므로 지난 '데블 메이 케어'처럼 우스꽝스럽게 007 영화 시리즈 패로디를 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이번엔 냉전시대 스파이 스릴러 분위기가 제법 느껴지는 007 어드벤쳐가 나오지 않겠나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썩 만족스럽지 않았다. 시대 배경은 60년대였다지만 60년대 느낌이 오지 않는 가상의 아프리카 국가 이야기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믿어지지 않았다. 60년대를 배경으로 한 제임스 본드 소설을 쓰면서 냉전을 소재로 삼은 리얼한 스타일의 스파이 스릴러 소설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 말이다. 굳이 시대 배경까지 60년대로 바꾼 만큼 냉전시대로 돌아간 제임스 본드의 '프롬 러시아 위드 러브(From Russia With Love)' 스타일의 클래식 스파이 어드벤쳐일 것으로 기대했는데 알고 보니 가상의 아프리카 국가에서 지하자원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별 흥미없는 음모 타령이 전부였다.
어떻게 보면 시대 배경이 60년대이면서도 현재진행형인 듯한 느낌이 드는 소잿감을 고른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무엇하러 시대 배경을 굳이 60년대로 설정할 필요가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솔로'에 등장하는 아프리카 이야기는 21세기를 배경으로 삼았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보이드가 굳이 60년대를 고집한 이유는 플레밍의 오리지날 제임스 본드 캐릭터를 원했던 것 하나 때문이라는 것을 제외하곤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보이드의 제임스 본드 캐릭터는 어땠을까?
보이드의 제임스 본드는 틈만 나면 술을 마시는 술고래였다. 이언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도 술을 자주 마시긴 했지만 윌리엄 보이드의 제임스 본드처럼 특별하게 눈에 띌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보이드는 본드가 술을 굉장히 자주, 많이 마신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처럼 보였다.
본드가 술과 담배를 많이 하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인데 굳이 이 점을 눈에 띄게 강조하려 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과한 술, 담배 버릇을 제외하곤 흠잡을 데가 거의 없는 모범생 타잎 제임스 본드를 소개했기 때문인 듯 하다.
이는 단지 보이드의 제임스 본드만의 문제 뿐만 아니라 007 영화 시리즈에서도 신경에 몹시 거슬리는 문제점 중 하나이기도 하다. 영화 제작진이나 007 소설가 모두 제임스 본드를 완벽하지 않은 캐릭터로 묘사하고자 하면서도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는 항상 올바른 모범적인 캐릭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니엘 크레이그(Daniel Craig)의 영화 버전 제임스 본드만 봐도 이러한 문제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거칠고 완벽하지 않은 제임스 본드 캐릭터를 보여주려는 제작진의 의도는 잘 알겠는데, 고작 보여주는 것이라곤 피 흘리고 얻어 터지고 덤벙거리며 실수하는 것이 전부일 뿐이라서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항상 올바른 착한 정의의 사나이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제임스 본드를 평범한 사나이로 묘사하고 싶다면 겉으로 풍기는 이미지와 달리 비틀어진 성격을 드러내도록 하거나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행동을 하거나 그런 성향을 드러내는 말을 하면서 '아, 제임스 본드도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올바른 친구는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도록 만들어야 한다.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는 그러한 하자가 많은 캐릭터였다. 단지 피를 흘리고 얻어터지는 것 뿐만 아니라 플레밍의 본드는 여성과의 관계를 쾌락 정도로 생각할 뿐 진지한 교제에 관심을 거의 보이지 않았으며, 50년대 당시에는 어땠는지 몰라도 요새 기준으로 따지면 인종차별주의자로 몰릴 만한 사나이였다. 플레밍은 소설 '리브 앤 렛 다이(Live and Let Die)'의 한 챕터 제목을 'Nigger Heaven'이라고 붙였으며, 소설 '골드핑거(Goldfinger)'에선 한국인 악당을 누런 피부의 털없는 원숭이(Ape)로 묘사하기도 했다. 영화 시리즈에선 원작소설의 다소 거친(?) 제임스 본드 세계를 느끼기 어렵지만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는 'Bigoted Bastard'에 가까운 친구였다. 플레밍의 모든 제임스 본드 소설이 전부 다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원작소설의 제임스 본드는 절대 모범적인 캐릭터가 아니었다. 물론 요즘 소설과 영화에서 챕터 제목을 'Nigger Heaven'이라고 붙이거나 아시안을 누런 원숭이로 부르거나 묘사하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일 것이다. 특히 과거의 플레밍 소설처럼 인종편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바로 이런 게 불완전한 제임스 본드의 모습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올바르고 깔끔한 것이 아니라 옆으로 샐 때도 있는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옳고 그름을 떠나 이런 점들이 제임스 본드 캐릭터를 더욱 흥미진진하게 만든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보다 복잡하고 흥미로운 제임스 본드 캐릭터를 탄생시키고자 한다면 지나치게 불쾌하거나 감정을 상하게 만드는 것은 피하되 'Guilty Pleasure'를 만끽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다소 거칠고 상대를 불쾌하게 만들거나 괴롭힐 때도 있으며 때로는 비열한 면도 보여줘야 제임스 본드지 항상 올바른 행동만 하는 모범생 타잎은 진정한 제임스 본드가 아니다. 그렇다고 본드를 악당으로 보일 정도로 만들 필요까진 없겠지만, 악당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와 TV 시리즈가 요새 인기있는 것도 사실이란 점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보이드의 제임스 본드는 플레밍의 본드와는 달리 흠잡을 데가 거의 없는 지루하고 특징이 없는 모범 캐릭터였다. 보이드의 본드는 여성과의 교제를 진지하게 생각했으며 흑인들의 땅인 아프리카에서도 인종편견 또는 불편함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 아이들을 보면서 훌쩍이기까지 했다. 보이드의 본드는 술과 담배를 많이 즐긴다는 것 하나를 제외하곤 문제 삼을 게 거의 없어 보이는 사나이였던 것이다. 결국 음주문제가 본드의 유일한 결점이었으며, 이렇다 보니 보이드는 본드가 술을 퍼붓다시피 마시는 음주문제가 있는 캐릭터로 묘사하면서 '퍼펙트'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려 한 것으로 보였다.
플레밍의 먼지 묻은 오리지날 제임스 본드를 다시 소설로 불러내 인종편견을 드러내지 않는 캐릭터로 굳이 바꿔놓을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하지만 잘못된 것을 고친 것으로도 볼 수 있으므로 그것에 대해서 크게 문제 삼을 건 없었다. 하지만 보이드가 플레밍의 오리지날 본드를 아프리카로 보내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흑인 본드걸과 어울리도록 설정한 진정한 이유가 모두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냔 의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보이드는 크고 작은 문제가 있던 플레밍의 본드를 'Politically Correct 007'으로 바꾸려 한 듯 했으나 왠지 제임스 본드와 위스키를 혼동한 것 같았다. 물에 희석해서 마시는 건 위스키지 제임스 본드가 아니다.
또 한가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보이드가 왜 제임스 본드의 나이를 45세로 설정했는가다.
이미 이곳에서 여러 차례 설명한 바 있지만, 이언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 세계에서 45세는 매우 중요한 나이다. 소설 '문레이커'에서 플레밍은 00 에이전트가 45세가 되면 필드직에서 데스크직으로 옮기게 된다고 썼기 때문이다.
"On these things he spent all his money and it was his ambition to have as little as possible in his banking account when he was killed, as, when he was depressed, he knew he would be, before the statutory age of forty-five.
Eight years to go before he was automatically taken off the 00 list and given a staff job at Headquaters. At least eight tough assignments. Probably sixteen. Perhaps twenty-four. Too many." - Moonraker (1955)
그런데 보이드는 하필이면 본드의 나이를 45세로 정했다. 본드가 45회 생일을 맞으면서 소설이 시작하는데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문레이커'에서 언급됐던 '데스크직' 이야기가 분명히 나왔을 것 같다고?
놀랍게도 나오지 않았다.
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 이언 플레밍의 오리지날 제임스 본드 캐릭터의 어드벤쳐를 이어간 소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보이드는 플레밍이 설정한 '00 에이전트가 45세가 되면 오피스에서 근무하게 된다'는 룰을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솔로'가 출간되기 이전부터 45세의 본드가 나오는 것으로 알려졌던 만큼 45세가 되어 필드를 떠나게 된 것에 대한 아쉬움, 이미 그런 나이가 됐다는 것에 대한 낙담, 계속 필드직에 머물 방법이 없나 연구하는 모습, M과의 대화에서도 '45세 데스크직' 문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서로 커브볼을 던지며 신경전을 벌이는 모습 등이 분명히 나올 것으로 기대했으나 놀랍게도 보이드는 이 점을 단 한 차례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 뿐만 아니라 보이드는 본드가 계속해서 필드 근무를 할 것임을 암시하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문레이커'에서 플레밍이 정한 '45세 데스크직' 룰은 어디로 간 것일까?
보이드가 40대의 베테랑 제임스 본드를 원했다 해도 굳이 45세를 고를 필요가 없었다는 점, 45세 생일을 맞은 본드를 시작부터 등장시켰다는 점 모두가 우연처럼 보이지 않았다. 보이드가 플레밍이 만든 '00 에이전트 45세 제한' 룰을 어떻게든 없애려 한 게 분명해 보였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원작자가 오래 전에 정해 놓은 룰을 이제 와서 보이드가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무시하고 마음대로 바꾸려 한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플레밍의 본드가 섹시스트(Sexist)에 인종편견이 있었다는 문제점을 고치려 한 것까지는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이건 또 다른 문제다. '솔로'는 시대와 나이 등에서 자유로운 독립된 제임스 본드 소설이 아니라 플레밍의 클래식 제임스 본드 시리즈의 세계를 연장한 'CONTINUATION' 소설이다. 따라서 시대에 맞춰 바꿔야 할 건 바꿨다고 해도 지켜야 할 것 또한 지켜줬어야 했다. 그러나 보이드는 플레밍의 소설 '문레이커'에 00 에이전트가 45세가 되면 자동으로 필드직에서 데스크직으로 옮기게 돼있다고 나와있는데도 불구하고 '솔로'에 45세 본드를 등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45세 룰'을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노골적으로 '45세 룰'을 없애버리겠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보이드의 의도가 정확하게 무엇이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클래식 제임스 본드 소설의 문제점을 수정하려는 순수한 의도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뭔가 다른 꿍꿍이가 더 숨어있는 게 분명해 보여서다.
물론, 기회가 또 온다면 '솔로'의 후속편을 쓰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하필이면 왜 본드의 나이를 45세로 정했는지부터 시작해서 모든 게 순수하게 보이지 않는다. 보이드가 '문레이커'의 '45세 룰' 사실을 몰랐을 리는 더더욱 없다. 무슨 이유에서였던 간에 보이드가 제임스 본드의 00 에이전트 수명을 45세 이상으로 연장시키고 싶었다고 하더라도 '문레이커'에 나왔던 '45세 룰'부터 시작해서 납득이 가도록 설명하는 게 순리다. 더군다나 '솔로'는 이언 플레밍의 오리지날 제임스 본드의 세계를 연장시킨 소설이 아닌가!
이런 식으로 제 멋대로 바꿔가면서 소설을 쓸 것이면 무엇하러 굳이 60년대 플레밍의 오리지날 제임스 본드 캐릭터를 이어받으려 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윌리엄 보이드가 시대물을 많이 쓴 작가로 알고 있는데, 그런 소설을 많이 쓰다 보니 역사를 뜯어고치려는 습관이 생긴 게 아닌가 싶다.
이쯤 됐으면 '솔로'가 왜 훌륭한 제임스 본드 소설이 될 수 없는지 어느 정도 설명이 되었다고 본다. 더군다나 'CONTINUATION' 소설로써는 더더욱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래도 여전히 요근래 나온 제임스 본드 소설 중에서 가장 나았다. 지난 소설들처럼 제임스 본드 소설로써도 꽝이고 일반 액션 스릴러 소설로써도 꽝일 정도로 한심하진 않았다. '솔로'는 제임스 본드 소설이라는 사실을 머리에서 밀어내고 읽으면 그럭저럭 읽을 만했다. 시작은 훌륭했으나 갈수록 스토리가 시원찮아졌으며, 플롯 뿐만 아니라 제임스 본드가 암살자 시늉을 내고 '본드걸'을 비롯한 등장 캐릭터들도 플레밍의 클래식 제임스 본드 세계보다 헐리우드 007 시리즈의 영향을 더욱 강하게 받은 것처럼 보이는 등 맘에 드는 부분보다 맘에 들지 않는 부분이 더 많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지난 '데블 메이 케어'를 읽을 때처럼 '도대체 이게 뭐냐?'는 생각은 들지 않았으며 지난 '카르트 블랑쉬'처럼 '도저히 더이상 읽지 못하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만족보다 불만과 아쉬움이 훨씬 많이 남은 건 분명했지만, 피눈물을 흘리면서 페이지를 넘겨야 할 정도로 독서인지 고문인지 분간이 안 되는 책은 절대 아니었다. '솔로'는 페이지가 잘 넘어가는 책이었다.
윌리엄 보이드의 '솔로'도 하드코어 본드팬들을 만족시킬 만한 제임스 본드 소설은 못 되는 듯 했다. 하지만 제임스 본드 소설이라는 사실을 잊고 심심풀이로 읽을 만한 책으로는 나쁘지 않았다. '솔로'는 제임스 본드 소설로써는 맘에 들지 않았지만 일반 스릴러 소설로써는 아주 맘에 들진 않아도 그럭저럭 읽을 만했다.
절반의 성공이었다고 할까?
윌리엄 보이드는 훌륭한 작가다. 이 양반이 이전에 쓴 '레슬리스(Restless)'를 재밌게 읽었던 기억도 있다. 그래서 보이드의 제임스 본드 소설에 기대를 좀 했었다. 하지만 '솔로'에선 약간 욕심이 컸던 것 같았다. 두 개의 숏 스토리를 하나로 합쳐놓은 듯한 것부터 시작해서 상당한 양의 007 소설과 영화 시리즈 하미지(Homage)를 집어넣는 등 너무 무리한 듯 했다. 007 시리즈에 대한 애정이 이전 작가들보다 좀 더 강하게 느껴졌지만, 책 한 권에 너무 많은 걸 우겨넣으려 한 것 같았다.
보이드가 제임스 본드 시리즈에 알맞은 작가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하지만 만약 '솔로'가 메인 플롯부터 시작해서 기초 공사가 제대로 된 007 소설이었다면 의외로 걸작이 됐을지도 모른다는 'IF'는 열어놓고 싶다.
만약, 어디까지나 만약이지만, 보이드가 년도와 본드의 나이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냉전시대를 배경으로 한 제임스 본드 소설을 쓴다면 말리지 않겠다. 년도와 본드의 나이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는다는 전제가 붙는다면 보이드가 21세기 배경의 제임스 본드 소설을 쓴다고 해도 말리지 않겠다. 다음 번엔 제임스 본드와 위스키를 혼동하지 않겠다는 전제도 함께 붙어야만 말리지 않겠다.
그러나 만약 보이드가 '솔로'와 스토리가 이어지는 속편을 쓰겠다고 하면 반대를 할 수밖에 없을 듯 하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왠지 당분간은 만족스러운 제임스 본드 소설이 나오지 않을 것 같다. 문제가 있든 없든 어찌됐든 간에 플레밍의 오리지날 시리즈를 능가하는 제임스 본드 소설이 나오는 건 '미션 임파서블'인 듯 하다. 플레밍이 타고난 천재적인 작가가 아니었으며 플레밍보다 더 훌륭한 스토리텔러가 많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딱 맞아 떨어지는 새로운 제임스 본드 소설이 나오지 않는 걸 보면...
간만에 장문의 글을. ㅋㅋ
답글삭제아쉬움의 분노가 여기까지 전해지네요 ㅋ
전 원작은 카지노로얄밖에 안읽어서 뭐라 덧붙일 말은 없지만. 뭔가 원작이 제대로된 소설들을 써야 그게 영화에도 영향을 주고
그 사람이 영화각본으로라도 참여한다면 더 시너지가 일것 같은데. 소설부분에서는 영화보다 지지부진하다는점이 아쉽네요
유명한 작가에 번갈아가며 맡기면서 수준높은 작품을 선보이려 애쓰는 것 같습니다만,
삭제제임스 본드 어드벤쳐를 잘 쓸 것 같은 작가는 각자의 프로젝트에 더 관심있는 것 같습니다.
작가가 매번 바뀌고 시대도 오락가락하는 덕분에 좀 더 시선을 끌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지난 존 가드너, 레이몬드 벤슨 시절처럼 한 작가에 시리즈를 맡기는 게 더 나을 것 같습니다.
한 작가가 계속 쓰면 그 중에 재밌는 것도 있고 재미없는 것도 있을테니 그런가부다 하겠는데,
매번 작가가 바뀌니 좀 정신이 없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