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9일 목요일

'007 스펙터': 왜 요즘엔 무비 아답테이션 소설이 나오지 않는 걸까?

피어스 브로스난(Pierce Brosnan)이 제임스 본드였던 시절엔 새로운 제임스 본드 영화가 개봉할 때가 되면 빠짐없이 나오던 게 하나 있었다 ㅡ 무비 아답테이션 소설이다.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의 제임스 본드 시리즈는 제목과 플롯 등을 이언 플레밍(Ian Fleming)의 소설에서 따왔다. 내용이 원작소설과 크게 차이가 나는 영화도 많았지만 스크린플레이를 기초로 한 무비 아답테이션 소설의 필요성이 크게 느껴질 정도는 아니었다.

무비 아답테이션 소설의 필요성이 크게 느껴지기 시작한 건 007 시리즈가 이언 플레밍의 원작소설을 기초로 삼지 않은 완전히 새로운 오리지날 스크린플레이를 만들게 되면서부터다.

007 제작진이 이언 플레밍의 원작소설에서 제목을 따오지 않은 첫 번째 제임스 본드 영화는 티모시 달튼(Timothy Dalton) 주연의 1989년 영화 '라이센스 투 킬(Licence to Kill)'이다. 이언 플레밍이 남긴 제임스 본드 소설 중 '라이센스 투 킬'이라는 제목의 소설이 없으며, 줄거리 또한 마이클 G. 윌슨(Michael G. Wilson)과 베테랑 007 스크린라이터 리처드 메이밤(Richard Maibaum)이 만든 완전히 새로운 내용이다.

마이클 G. 윌슨과 리처드 메이밤이 쓴 '라이센스 투 킬' 스크린플레이는 8090년대 당시 제임스 본드 소설을 집필하던 영국 스릴러 작가 존 가드너(John Gardner)에 의해 소설로 옮겨졌다.


영화 스크린플레이를 기초로 한 무비 아답테이션 소설은 90년대에도 계속 출간되었다.

스크립트가 개판 수준이었던 지난 90년대에도 007 제작진은 스크린플레이를 기초로 한 무비 아답테이션 소설을 출간하곤 했다. 피어스 브로스난이 주연을 맡았던 네 편의 제임스 본드 시리즈 모두 존 가드너와 미국 작가 레이몬드 벤슨(Raymond Benson)에 의해 소설로 옮겨졌다.

레이몬드 벤슨은 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제임스 본드 소설을 썼던 작가다.

피어스 브로스난 시절의 무비 아답테이션 소설들은 항상 영화 개봉 전에 출간되었으며, 대부분의 본드팬들은 영화가 개봉하기 전에 책을 먼저 읽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나 다니엘 크레이그(Daniel Craig) 시대에 와선 무비 아답테이션 소설이 자취를 감췄다.

'카지노 로얄'은 이언 플레밍의 첫 번째 제임스 본드 소설을 기초로 한 영화이므로 굳이 무비 아답테이션 소설을 내놓을 필요가 없었다.

제목만 이언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 숏스토리에서 따온 '콴텀 오브 솔래스(Quantum of Solace)'가 개봉했을 당시엔 이언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 숏스토리 콜렉션 두 권을 하나로 합친 새로운 숏스토리 콜렉션을 '콴텀 오브 솔래스'라는 제목으로 출간한 적은 있다. 하지만 이것은 새로운 숏스토리 콜렉션을 출간하면서 제목만 '콴텀 오브 솔래스'로 한 것일 뿐이므로 영화 스크린플레이를 기초로 한 무비 아답테이션 소설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런데 '스카이폴(Skyfall)'부턴 무비 아답테이션 소설 소식이 완전히 끊겼다.

'스카이폴'은 제목과 줄거리 모두 이언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 소설과 무관한 영화였으므로 무비 아답테이션 소설이 나올 법 했다. 게다가 2012년은 007 시리즈 50주년을 기념하는 해이기도 했다.

그러나 무비 아답테이션 소설은 출간되지 않았다.

본드팬들은 영화 개봉시기에 맞춰 항상 나오던 무비 아답테이션 소설이 나오지 않자 궁금해했다. '카지노 로얄'과 '콴텀 오브 솔래스'는 이언 플레밍의 원작소설과 관련이 있었으므로 무비 아답테이션 소설이 나오지 않은 것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 '스카이폴'의 무비 아답테이션 소설이 나오지 않은 것은 다소 의외였다.

그렇다고 무비 아답테이션 소설이 아주 읽을 만했다는 건 아니다. 영화 스크립트를 기반으로 한 액션 소설에 많은 기대를 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제임스 본드 영화가 개봉하면 사운드트랙 앨범도 같이 발매되듯 매번 함께 출간되던 무비 아답테이션 소설이 사라지자 본드팬들의 궁금증을 끌 만했다.

무슨 이유로 무비 아답테이션 소설이 사라졌나 살짝 알아봤더니, 들리는 바에 따르면 '스카이폴' 무비 아답테이션 소설이 나오지 않은 이유는 007 제작진이 스포일러 유출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영화의 줄거리가 소설을 통해 통째로 새나가는 것을 제작진이 원치 않았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건 사실이다. 영화가 개봉도 하기 전에 먼저 출간된 소설을 통해 영화의 줄거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 공개되는 것을 제작진이 원치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007 시리즈는 원래 그런 식이었다. 007 영화 시리즈가 원작소설을 영화로 옮기면서 시작했으므로 "줄거리를 미리 알고 영화를 본다"는 건 본드팬들에겐 새삼스러운 얘기가 아니다. 이언 플레밍이 5060년대에 쓴 제임스 본드 소설 시리즈를 기초로 한 영화 시리즈가 80년대 중반까지 제작되었으므로 소설을 먼저 읽고 영화를 나중에 본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2006년 개봉한 다니엘 크레이그 주연의 '카지노 로얄'을 예로 들어도 마찬가지다. 2006년 영화 '카지노 로얄'은 이언 플레밍이 1953년 발표한 동명 소설을 기초로 한 영화였으므로, 소설이 영화로 옮겨지기까지 53년동안에 소설을 먼저 읽은 사람들이 상당히 많을 수밖에 없다.

1989년부터 2002년까지는 이언 플레밍의 원작소설에서 제목을 따오지 않은 완전히 새로운 타이틀과 줄거리의 제임스 본드 영화 시리즈가 제작되었는데, 이 당시에도 007 제작진은 새로운 제임스 본드 영화가 개봉할 때마다 빠짐없이 무비 아답테이션 소설을 출간하면서 소설 시리즈와 영화 시리즈의 관계를 이어갔다. 제임스 본드 소설 시리즈와 영화 시리즈는 각각 별개이긴 해도 새로운 제임스 본드 영화가 개봉할 때마다 소설과 영화 시리즈를 하나로 연결시켜주곤 했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이제와서 무슨 스포일러가 그렇게 많다고 스포일러 유출을 문제 삼으며 무비 아답테이션 소설 출간을 중단할 이유가 있는지 궁금하다.

'암흑기'라 불렸을 정도로 007 시리즈의 퀄리티가 기대 이하였던 90년대에도 스포일러를 감수하고 무비 아답테이션 소설을 출간했었는데, 007 제작진은 그 때보다도 더욱 자신감을 잃었다는 것인가? 아니면 더욱 커진 돈 욕심 때문인가?

007 제작진이 '스카이폴'이 개봉할 때까지 필사적으로 숨기려 했던 '비밀'이라곤 나오미 해리스(Naomie Harris)가 머니페니 역을 맡았다는 사실 정도가 전부다. 이런 비밀같지도 않은 비밀을 개봉할 때까지 지키는 것이 스포일러 유출을 막는 본 목적이었나?

그렇다면 이번 '스펙터(SPECTRE)'는 어떨까?

아직 발표는 없지만 왠지 이번에도 무비 아답테이션 소설은 나오지 않을 듯 하다. 007 제작진이 이번에도 '캐릭터 정체 밝히기 놀이'를 또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엔 '스펙터'에 프란츠 오버하우서 역으로 출연하는 것으로 전해진 크리스토프 발츠(Christoph Waltz)의 정체를 놓고 똑같은 '쇼'를 하고 있다. 이 바람에 크리스토프 발츠가 맡은 역할의 정체, '스펙터'에 블로펠드가 등장하는가에 대한 미스테리 등이 영화가 개봉할 때까지 절대 유출되어선 안 될 '극비'가 되었다. 따라서 영화 개봉 이전에 스크린플레이를 기초로 한 무비 아답테이션 소설이 출간되는 건 현재로썬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코믹하게도 이번 '스펙터'는 작년 11월 발생한 소니 픽쳐스 해킹 사건으로 스크립트 초안을 비롯한 많은 자료가 유출되었다. 비밀같지도 않은 비밀로 '생쑈'를 하던 007 제작진이 해킹 사건에 얻어맞으며 실제로 보안 유지가 철저하게 지켜져야 했던 스크립트 등 극비 문서들이 유출된 것이다.

물론 이것은 007 제작진의 책임은 아니다. 소니 픽쳐스가 해킹을 당해 경영진의 이메일 전체가 홀랑 새나가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스포일러 유출을 우려해 무비 아답테이션 소설 출간을 중단하는 등 소심하게 행동하고, 머니페니와 블로펠드의 정체 등 비밀같지도 않은 비밀로 '비밀 놀이'를 하던 007 제작진의 업보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스포일러 유출을 막기 위해 지나칠 정도로 몸을 사리다가 보다 더 치명적인 피해를 당한 꼴이 됐다는 것이다.

영화를 잘 만들기만 하면 스포일러고 나발이고 상관 없이 흥행에 성공하게 돼있다. 따라서 영화를 잘 만들 자신이 있다면 비밀이나 스포일러 누설 따위에 소심할 정도로 예민하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 007 제작진은 세월이 지날수록 이러한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다. 이름 있는 영화인들에게 영화를 맡기는 버릇부터 시작해서 유치한 비밀 놀이, 무비 아답테이션 소설 출간을 중단할 정도로 스포일러에 민감해진 점 등 모두를 자신감 결여 증상으로 보고 있다.

이러니까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의 제임스 본드 시리즈가 불안해 보인다는 것이다. 굉장히 가냘프고 연약해 보이지 제임스 본드 답지 않아 보인다.

"KILL BOND 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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