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와 민주당 대선 후보 힐러리 클린턴(Hillary Clinton)의 1차 대선 TV 토론회가 열렸다.
도널드 트럼프와 힐러리 클린턴의 대선 토론회는 한참 전부터 큰 화젯거리였다.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 토론회를 쇼 프로그램이 울고갈 정도로 재밌게 만들면서 시청률 돌풍을 일으키며 "정치 토론회는 따분하다"는 통념을 날려버린 도널드 트럼프가 대선에서 맞붙을 상대인 힐러리 클린턴과 최초로 맞대결 토론을 갖게 됐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트럼프가 대선 후보에 도전하면서 정치판을 리얼리티 쇼로 만들어놨다고 비판했다.
일리 있는 지적이다.
그러나 미국인들의 반응은 달랐다. 말만 뻔지르하게 할 뿐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기성 정치인에 염증을 느낀 미국인들은 정치인으로썬 덜 다듬어졌어도 진부한 정치적 멘트를 구사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말하는 트럼프에 매력을 느꼈다. 억만장자 트럼프가 예상을 깨고 블루컬러 층으로부터 뜨거운 지지를 받게 된 이유도 트럼프가 어렵고 유식하고 따분한 연설을 하지 않고 일반 미국인들과 격식 없이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는 쪽을 택했기 때문이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트럼프의 "TELL IT LIKE IT IS" 화법이 맘에 들었다고 한다.
한편에선 도널드 트럼프가 정치인처럼 보이지 않아서 대통령감으로 부적합해 보인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선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트럼프를 지지한다고 주장했다. 세련된 베테랑 정치인이 대선 후보에 보다 잘 어울려 보인다는 건 다 아는 사실이지만, 기성 정치인에 지친 미국인들은 말만 잘하는 세련된 정치인을 원하지 않았다. '아웃사이더'를 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대선 TV 토론에선 대통령다운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트럼프가 정치인이 아니고 아웃사이더라는 점은 이해해도 대통령 후보라면 대통령다운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과연 트럼프가 월요일 밤 벌어진 1차 대선 토론회에서 대통령다운 모습을 보였을까?
트럼프는 1차 토론에서 성격 문제 불식에만 올인한 것처럼 보였다.
트럼프는 점잖고 소프트한 면을 보여주려 신경쓴 듯 했다. 트럼프는 힐러리에게 맹공을 퍼붓지 않고 절제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그의 불같은 성격에 문제가 있다는 비판을 잠재움과 동시에 수시로 치고 빠지면서 토론 상대자를 조롱하는 '트럼프 스타일'을 유지했다. 다소 소프트해 보이면서도 "여전히 도널드 트럼프"라는 점을 상기시키는 양다리 전술을 편 것으로 보였다.
트럼프는 힐러리의 약점인 "이메일", "뱅가지", "클린턴 재단" 등을 전혀 또는 거의 건드리지 않았다. 트럼프가 이런 얘기를 꺼내놓으며 맹렬한 공격을 퍼부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트럼프는 그가 가장 자신있어 하는 경제 이슈를 제외한 나머지 이슈에선 힐러리를 상대로 맹공을 퍼붓지 않았다. 일각에선 트럼프가 빌 클린턴(Bill Clinton)의 과거 섹스 스캔들까지 언급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트럼프는 섹스 스캔들은 커녕 힐러리를 거의 공격하지 않았다. 여론조사 결과 힐러리와 트럼프의 격차가 사실상 없는 것으로 나오고 있는 만큼 "LOW BLOW"까지 총동원해 무리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토론에서 이기자"보다 "상승세를 유지시킬 수 있는 안전 루트를 택하자"를 택한 것 같았다.
이와 정 반대로 힐러리가 트럼프에 맹공을 퍼부었다. 힐러리는 트럼프를 "인종차별자", "여성혐오자"로 매도하고 트럼프가 납세기록을 공개하지 않는 이유가 "알려진 만큼 부자가 아니기 때문 아니냐"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트럼프를 약올리려고 미끼를 던진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는 그때 그때 반박과 해명을 하면서 수비만 했을 뿐 공격을 하지 않았다. 이 바람에 경제 이슈로 출발은 좋았으나 그 이후부턴 힐러리의 공격에 해명만 하다가 끝난 것처럼 보이게 됐다. 힐러리는 신나게 공격하고 트럼프는 허겁지겁 해명하는 데 바빴던 처럼 보이게 된 것이다. "싸이버 시큐리티"가 토픽이었을 때 트럼프는 힐러리의 이메일 서버 문제를 비판할 수 있었고, 마지막에 힐러리가 미스 유니버스 모델 얘기를 꺼내며 트럼프를 섹시스트로 몰았을 땐 빌 클린턴의 여자 관계를 걸고 넘어질 수 있었으나 트럼프는 이런 공격을 하지 않았다. 토론회 직후 트럼프는 빌 클린턴의 여자 관계 얘기를 꺼내려 했으나 클린턴의 딸이 참석한 자리에서 그런 얘기를 꺼내는 게 부적절하다고 판단돼 언급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트럼프는 몇 달 전에 빌 클린턴의 섹스 스캔들을 이용해 힐러리를 공격한 바 있지만 대선 토론에선 너그럽게(?) 비켜가기로 결정한 듯 하다.
그렇다면 힐러리가 1차 대선 토론에서 이긴 것일까?
그렇게 볼 수도 있다. 트럼프가 맹공을 자제하면서 성격 이슈를 없애려 한 것은 좋았는데, 힐러리의 공격에 해명만 하다 볼일 다 본 것처럼 보이게 된 것은 사실이다. 힐러리 측은 트럼프가 이미지를 고려해 강공을 펴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고 트럼프를 몰아붙였을 수도 있다. 어찌됐든 "대통령 이미지" 때문에 트럼프가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토론을 벌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 바람에 잃은 것도 있지만 얻은 것도 있었다고 본다. 트럼프가 거꾸로 힐러리를 향해 "저질 공격을 일삼는다"는 비난을 할 수 있게 됐으니 말이다.
이것이 트럼프 진영의 작전이었다. 힐러리가 트럼프의 성질을 건드리려고 계속 찔러댈 것이 분명했으므로, 여기에 말려들지 않는 쪽으로 방향을 정한 것이다. 힐러리의 공격에 '트럼프 스타일'로 대응은 하되 "오버킬"을 피하려 했다. 많은 사람들이 트럼프의 불같은 성격을 문제삼으며 대통령감이 아니라고 비판한 만큼, 힐러리가 계속 공격을 해와도 흥분하지 않고 묵묵하게 버티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트럼프는 토론 말미에 "나는 안티-힐러리 TV 광고를 제작하지 않았으나 힐러리는 나를 비방하는 TV 광고를 내보내고 있다"면서 오히려 힐러리가 더티 플레이를 한다는 주장을 폈다. 트럼프는 되도록이면 "LOW BLOW"를 피하려 했으나 힐러리가 이런 공격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덕분에 트럼프는 "나는 정책에 대한 토론을 하고 싶었는데 힐러리가 비방전을 벌였다"고 역공할 수 있게 됐다. 힐러리 측은 대선 토론을 지난 공화당 경선 토론처럼 진흙탕 싸움으로 몰고가면서 트럼프의 성격 문제가 드러나게끔 만들려 했으나 트럼프는 여기에 말려들지 않고 큰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
이 바람에 트럼프는 해명만 하다가 끝난 것처럼 보이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트럼프의 성격 문제 테스트에선 합격했다고 본다. 힐러리가 말하는 동안 트럼프가 수시로 끼어들면서 "No", "Wrong"이라고 하고 때로는 실없는 농담까지 던진 게 대통령 후보로써 점잖치 않아 보였을 수도 있지만, 대통령을 맡기에 부적합할 정도로 성격이 위험해 보이지 않았다. 트럼프가 대통령보다 풋볼코치 쪽에 가까워 보일 때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대통령을 하지 못할 정도로 성격이 불안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또한, 경제 메시지로 몇몇 경합 주의 유권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며 실속을 챙겼다. 현재 경합 주 중에서 상당수가 FTA에 비판적이므로 트럼프가 경합 주 유권자들에게 강한 어필을 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여성, 소수인종 유권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진 못했어도 경제 이슈에선 트럼프가 우위였다는 평을 받고 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TV 토론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는 첫 30분이라고 한다. 30분이 지나면 시청자들이 채널을 다른 데로 돌릴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TV 토론 첫 부분에서 경제 이슈를 다룬 것이 트럼프에게 도움이 됐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한편, 힐러리는 변함없이 따분했고 들을 만한 이야기가 없었다. 트럼프야 원래 그렇다지만 힐러리도 나은 게 없었다. 트럼프가 매우 위험한 인종차별, 여성혐오자라는 공격을 하는 데 올인한 게 전부였다. 오바마에 대한 문제 제기는 "인종차별"이고 힐러리에 대한 문제 제기는 "여성혐오"라는 고리타분한 전형적인 좌파-리버럴 전략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많은 미국인들이 "오바마 출생증명", "이라크 전쟁 지지 사실 공방", "납세 기록 공개" 등에 관심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미국 유권자들이 넘버 1으로 꼽는 이슈가 "경제"이며, 이 분야에선 트럼프 스타일이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자들에게까지 통하고 있다. 현재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상당수의 민주당 지지자들이 트럼프 쪽으로 기우는 추세라는 사실을 싫든 좋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캘리포니아, 뉴욕 등 민주당 지지 성향이 매우 강한 주에선 큰 변화가 감지되지 않아도 미네소타, 콜로라도 등 민주당 성향이 강한 다른 주에선 힐러리와 트럼프의 격차가 좁혀지고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콜로라도 주에선 트럼프가 앞서는 것으로 집계되기도 했고, 미네소타에서도 타이가 나왔다. 오하이오와 펜실배니아에서도 트럼프가 민주당 표를 잠식하고 있다는 뉴스가 꾸준히 나오고 있다.
또한, 힐러리가 제기한 트럼프의 문제는 대부분 트럼프 개인에 대한 사적인 문제가 대부분인 반면 힐러리 쪽 문제는 공무와 직결된 문제라서 스케일 자체가 다르다. 힐러리가 트럼프를 "사기꾼", "막말꾼", "인종차별자", "성차별자"로 몰아붙이는 게 일리가 있긴 하지만, 이런 건 타블로이드 스타일의 가십 정도에 불과해 보일 뿐이다. 그러나 힐러리의 "뱅가지 사태", "이메일 스캔들", "클린턴 재단 스캔들"은 누가 옳고 그름을 떠나 차원이 다른 문제로 들리는 게 사실이다.
거짓말도 마찬가지다. 힐러리 측과 좌파 언론은 트럼프가 거짓말과 부정확한 주장을 밥먹듯이 늘어놓는다고 비판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트럼프도 거짓말을 많이 했다. 그러나 힐러리의 거짓말처럼 스케일이 크지 않다는 게 큰 차이점이다. 대선 토론에서 힐러리와 트럼프는 이라크 전쟁 발발 직전에 트럼프가 전쟁에 찬성한다고 했나 아니면 반대한다고 했나를 놓고 사실 공방을 폈다. 그러나 힐러리가 개인 이메일 서버를 사용하면서 기밀문서를 주고받았나를 놓고 사실 공방을 펴는 것과 비교해 보면 트럼프 쪽 사실 공방은 애들 장난처럼 들릴 수밖에 없다. 토론 진행자 레스터 홀트(Lester Holt)는 지난 커맨더 인 치프 포럼(Commander-in-Chief Forum)에서 진행자 맷 라우어(Matt Lauer)가 이라크 전쟁 지지 사실 여부에 대해 트럼프를 추궁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았다는 점을 의식했는지 예상했던대로 그 질문을 트럼프에게 던졌다. 하지만 이런 걸 추궁해도 힐러리의 공무 관련 거짓말을 희석시킬 수 없다. 트럼프의 거짓말은 철없는 어린아이 수준이지만 힐러리의 거짓말은 베테랑 정치인의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힐러리의 신뢰도가 매우 낮다는 점을 의식해 트럼프의 신뢰도를 깎아내리려는 의도로 보이지만, 거짓말에도 "규모"가 있기 때문에 트럼프의 거짓말과 힐러리의 거짓말을 1대1로 비교하는 건 넌센스다.
한편, 미국 케이블 뉴스 채널 폭스 뉴스(FOX NEWS)는 도널드 트럼프와의 2003년 1월 인터뷰 동영상을 공개하면서, 다른 건 몰라도 트럼프가 이라크전 발발 이전부터 전쟁에 반대했다는 주장이 틀린 말은 아니라고 전했다. 트럼프가 2002년 라디오 토크쇼 프로그램에서 이라크전에 찬성하는지 질문을 받고 "I guess so"라고 답한 것도 사실이지만, 이라크전 발발 대략 2개월 전에 가진 폭스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부시의 이라크 군사 개입에 다소 부정적인 견해를 밝힌 것 역시도 사실이라는 것이다. 트럼프가 2002년엔 아리송한 답변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발발 2개월 전에 전쟁에 부정적인 견해를 밝힌 것 또한 사실이므로 "전쟁 발발 이전부터 반대했다"는 트럼프의 주장이 틀린 건 아니라는 얘기다.
그러나 사실여부보다도 이 따위 문제로 팩트체크나 하고 앉아있는 미국 언론들이 더욱 한심해 보인다. 팩트체크할 게 그렇게도 없나?
아무튼 이렇게 해서 힐러리와 트럼프의 1차 TV 토론이 끝났다. 첫 번째 토론은 트럼프가 이미지 개선을 위해 맹공을 자제하고 소극적이고 방어적으로 나오면서 난타전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두 번째 토론에선 어떤 스타일로 나올지 궁금해진다. 다음 번엔 날카로운 급소 공격 횟수를 늘릴지, 아니면 이번과 마찬가지로 굳이 이미지를 구겨가면서까지 토론에서 이길 필요가 없다고 판단할지 지켜보기로 하자.
두 번째 대선 TV 토론은 오는 10월9일 열린다.
도널드 트럼프와 힐러리 클린턴의 대선 토론회는 한참 전부터 큰 화젯거리였다.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 토론회를 쇼 프로그램이 울고갈 정도로 재밌게 만들면서 시청률 돌풍을 일으키며 "정치 토론회는 따분하다"는 통념을 날려버린 도널드 트럼프가 대선에서 맞붙을 상대인 힐러리 클린턴과 최초로 맞대결 토론을 갖게 됐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트럼프가 대선 후보에 도전하면서 정치판을 리얼리티 쇼로 만들어놨다고 비판했다.
일리 있는 지적이다.
그러나 미국인들의 반응은 달랐다. 말만 뻔지르하게 할 뿐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기성 정치인에 염증을 느낀 미국인들은 정치인으로썬 덜 다듬어졌어도 진부한 정치적 멘트를 구사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말하는 트럼프에 매력을 느꼈다. 억만장자 트럼프가 예상을 깨고 블루컬러 층으로부터 뜨거운 지지를 받게 된 이유도 트럼프가 어렵고 유식하고 따분한 연설을 하지 않고 일반 미국인들과 격식 없이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는 쪽을 택했기 때문이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트럼프의 "TELL IT LIKE IT IS" 화법이 맘에 들었다고 한다.
한편에선 도널드 트럼프가 정치인처럼 보이지 않아서 대통령감으로 부적합해 보인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선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트럼프를 지지한다고 주장했다. 세련된 베테랑 정치인이 대선 후보에 보다 잘 어울려 보인다는 건 다 아는 사실이지만, 기성 정치인에 지친 미국인들은 말만 잘하는 세련된 정치인을 원하지 않았다. '아웃사이더'를 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대선 TV 토론에선 대통령다운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트럼프가 정치인이 아니고 아웃사이더라는 점은 이해해도 대통령 후보라면 대통령다운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과연 트럼프가 월요일 밤 벌어진 1차 대선 토론회에서 대통령다운 모습을 보였을까?
트럼프는 1차 토론에서 성격 문제 불식에만 올인한 것처럼 보였다.
트럼프는 점잖고 소프트한 면을 보여주려 신경쓴 듯 했다. 트럼프는 힐러리에게 맹공을 퍼붓지 않고 절제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그의 불같은 성격에 문제가 있다는 비판을 잠재움과 동시에 수시로 치고 빠지면서 토론 상대자를 조롱하는 '트럼프 스타일'을 유지했다. 다소 소프트해 보이면서도 "여전히 도널드 트럼프"라는 점을 상기시키는 양다리 전술을 편 것으로 보였다.
트럼프는 힐러리의 약점인 "이메일", "뱅가지", "클린턴 재단" 등을 전혀 또는 거의 건드리지 않았다. 트럼프가 이런 얘기를 꺼내놓으며 맹렬한 공격을 퍼부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트럼프는 그가 가장 자신있어 하는 경제 이슈를 제외한 나머지 이슈에선 힐러리를 상대로 맹공을 퍼붓지 않았다. 일각에선 트럼프가 빌 클린턴(Bill Clinton)의 과거 섹스 스캔들까지 언급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트럼프는 섹스 스캔들은 커녕 힐러리를 거의 공격하지 않았다. 여론조사 결과 힐러리와 트럼프의 격차가 사실상 없는 것으로 나오고 있는 만큼 "LOW BLOW"까지 총동원해 무리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토론에서 이기자"보다 "상승세를 유지시킬 수 있는 안전 루트를 택하자"를 택한 것 같았다.
이와 정 반대로 힐러리가 트럼프에 맹공을 퍼부었다. 힐러리는 트럼프를 "인종차별자", "여성혐오자"로 매도하고 트럼프가 납세기록을 공개하지 않는 이유가 "알려진 만큼 부자가 아니기 때문 아니냐"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트럼프를 약올리려고 미끼를 던진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는 그때 그때 반박과 해명을 하면서 수비만 했을 뿐 공격을 하지 않았다. 이 바람에 경제 이슈로 출발은 좋았으나 그 이후부턴 힐러리의 공격에 해명만 하다가 끝난 것처럼 보이게 됐다. 힐러리는 신나게 공격하고 트럼프는 허겁지겁 해명하는 데 바빴던 처럼 보이게 된 것이다. "싸이버 시큐리티"가 토픽이었을 때 트럼프는 힐러리의 이메일 서버 문제를 비판할 수 있었고, 마지막에 힐러리가 미스 유니버스 모델 얘기를 꺼내며 트럼프를 섹시스트로 몰았을 땐 빌 클린턴의 여자 관계를 걸고 넘어질 수 있었으나 트럼프는 이런 공격을 하지 않았다. 토론회 직후 트럼프는 빌 클린턴의 여자 관계 얘기를 꺼내려 했으나 클린턴의 딸이 참석한 자리에서 그런 얘기를 꺼내는 게 부적절하다고 판단돼 언급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트럼프는 몇 달 전에 빌 클린턴의 섹스 스캔들을 이용해 힐러리를 공격한 바 있지만 대선 토론에선 너그럽게(?) 비켜가기로 결정한 듯 하다.
그렇다면 힐러리가 1차 대선 토론에서 이긴 것일까?
그렇게 볼 수도 있다. 트럼프가 맹공을 자제하면서 성격 이슈를 없애려 한 것은 좋았는데, 힐러리의 공격에 해명만 하다 볼일 다 본 것처럼 보이게 된 것은 사실이다. 힐러리 측은 트럼프가 이미지를 고려해 강공을 펴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고 트럼프를 몰아붙였을 수도 있다. 어찌됐든 "대통령 이미지" 때문에 트럼프가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토론을 벌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 바람에 잃은 것도 있지만 얻은 것도 있었다고 본다. 트럼프가 거꾸로 힐러리를 향해 "저질 공격을 일삼는다"는 비난을 할 수 있게 됐으니 말이다.
이것이 트럼프 진영의 작전이었다. 힐러리가 트럼프의 성질을 건드리려고 계속 찔러댈 것이 분명했으므로, 여기에 말려들지 않는 쪽으로 방향을 정한 것이다. 힐러리의 공격에 '트럼프 스타일'로 대응은 하되 "오버킬"을 피하려 했다. 많은 사람들이 트럼프의 불같은 성격을 문제삼으며 대통령감이 아니라고 비판한 만큼, 힐러리가 계속 공격을 해와도 흥분하지 않고 묵묵하게 버티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트럼프는 토론 말미에 "나는 안티-힐러리 TV 광고를 제작하지 않았으나 힐러리는 나를 비방하는 TV 광고를 내보내고 있다"면서 오히려 힐러리가 더티 플레이를 한다는 주장을 폈다. 트럼프는 되도록이면 "LOW BLOW"를 피하려 했으나 힐러리가 이런 공격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덕분에 트럼프는 "나는 정책에 대한 토론을 하고 싶었는데 힐러리가 비방전을 벌였다"고 역공할 수 있게 됐다. 힐러리 측은 대선 토론을 지난 공화당 경선 토론처럼 진흙탕 싸움으로 몰고가면서 트럼프의 성격 문제가 드러나게끔 만들려 했으나 트럼프는 여기에 말려들지 않고 큰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
이 바람에 트럼프는 해명만 하다가 끝난 것처럼 보이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트럼프의 성격 문제 테스트에선 합격했다고 본다. 힐러리가 말하는 동안 트럼프가 수시로 끼어들면서 "No", "Wrong"이라고 하고 때로는 실없는 농담까지 던진 게 대통령 후보로써 점잖치 않아 보였을 수도 있지만, 대통령을 맡기에 부적합할 정도로 성격이 위험해 보이지 않았다. 트럼프가 대통령보다 풋볼코치 쪽에 가까워 보일 때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대통령을 하지 못할 정도로 성격이 불안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또한, 경제 메시지로 몇몇 경합 주의 유권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며 실속을 챙겼다. 현재 경합 주 중에서 상당수가 FTA에 비판적이므로 트럼프가 경합 주 유권자들에게 강한 어필을 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여성, 소수인종 유권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진 못했어도 경제 이슈에선 트럼프가 우위였다는 평을 받고 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TV 토론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는 첫 30분이라고 한다. 30분이 지나면 시청자들이 채널을 다른 데로 돌릴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TV 토론 첫 부분에서 경제 이슈를 다룬 것이 트럼프에게 도움이 됐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한편, 힐러리는 변함없이 따분했고 들을 만한 이야기가 없었다. 트럼프야 원래 그렇다지만 힐러리도 나은 게 없었다. 트럼프가 매우 위험한 인종차별, 여성혐오자라는 공격을 하는 데 올인한 게 전부였다. 오바마에 대한 문제 제기는 "인종차별"이고 힐러리에 대한 문제 제기는 "여성혐오"라는 고리타분한 전형적인 좌파-리버럴 전략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많은 미국인들이 "오바마 출생증명", "이라크 전쟁 지지 사실 공방", "납세 기록 공개" 등에 관심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미국 유권자들이 넘버 1으로 꼽는 이슈가 "경제"이며, 이 분야에선 트럼프 스타일이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자들에게까지 통하고 있다. 현재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상당수의 민주당 지지자들이 트럼프 쪽으로 기우는 추세라는 사실을 싫든 좋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캘리포니아, 뉴욕 등 민주당 지지 성향이 매우 강한 주에선 큰 변화가 감지되지 않아도 미네소타, 콜로라도 등 민주당 성향이 강한 다른 주에선 힐러리와 트럼프의 격차가 좁혀지고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콜로라도 주에선 트럼프가 앞서는 것으로 집계되기도 했고, 미네소타에서도 타이가 나왔다. 오하이오와 펜실배니아에서도 트럼프가 민주당 표를 잠식하고 있다는 뉴스가 꾸준히 나오고 있다.
또한, 힐러리가 제기한 트럼프의 문제는 대부분 트럼프 개인에 대한 사적인 문제가 대부분인 반면 힐러리 쪽 문제는 공무와 직결된 문제라서 스케일 자체가 다르다. 힐러리가 트럼프를 "사기꾼", "막말꾼", "인종차별자", "성차별자"로 몰아붙이는 게 일리가 있긴 하지만, 이런 건 타블로이드 스타일의 가십 정도에 불과해 보일 뿐이다. 그러나 힐러리의 "뱅가지 사태", "이메일 스캔들", "클린턴 재단 스캔들"은 누가 옳고 그름을 떠나 차원이 다른 문제로 들리는 게 사실이다.
거짓말도 마찬가지다. 힐러리 측과 좌파 언론은 트럼프가 거짓말과 부정확한 주장을 밥먹듯이 늘어놓는다고 비판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트럼프도 거짓말을 많이 했다. 그러나 힐러리의 거짓말처럼 스케일이 크지 않다는 게 큰 차이점이다. 대선 토론에서 힐러리와 트럼프는 이라크 전쟁 발발 직전에 트럼프가 전쟁에 찬성한다고 했나 아니면 반대한다고 했나를 놓고 사실 공방을 폈다. 그러나 힐러리가 개인 이메일 서버를 사용하면서 기밀문서를 주고받았나를 놓고 사실 공방을 펴는 것과 비교해 보면 트럼프 쪽 사실 공방은 애들 장난처럼 들릴 수밖에 없다. 토론 진행자 레스터 홀트(Lester Holt)는 지난 커맨더 인 치프 포럼(Commander-in-Chief Forum)에서 진행자 맷 라우어(Matt Lauer)가 이라크 전쟁 지지 사실 여부에 대해 트럼프를 추궁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았다는 점을 의식했는지 예상했던대로 그 질문을 트럼프에게 던졌다. 하지만 이런 걸 추궁해도 힐러리의 공무 관련 거짓말을 희석시킬 수 없다. 트럼프의 거짓말은 철없는 어린아이 수준이지만 힐러리의 거짓말은 베테랑 정치인의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힐러리의 신뢰도가 매우 낮다는 점을 의식해 트럼프의 신뢰도를 깎아내리려는 의도로 보이지만, 거짓말에도 "규모"가 있기 때문에 트럼프의 거짓말과 힐러리의 거짓말을 1대1로 비교하는 건 넌센스다.
한편, 미국 케이블 뉴스 채널 폭스 뉴스(FOX NEWS)는 도널드 트럼프와의 2003년 1월 인터뷰 동영상을 공개하면서, 다른 건 몰라도 트럼프가 이라크전 발발 이전부터 전쟁에 반대했다는 주장이 틀린 말은 아니라고 전했다. 트럼프가 2002년 라디오 토크쇼 프로그램에서 이라크전에 찬성하는지 질문을 받고 "I guess so"라고 답한 것도 사실이지만, 이라크전 발발 대략 2개월 전에 가진 폭스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부시의 이라크 군사 개입에 다소 부정적인 견해를 밝힌 것 역시도 사실이라는 것이다. 트럼프가 2002년엔 아리송한 답변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발발 2개월 전에 전쟁에 부정적인 견해를 밝힌 것 또한 사실이므로 "전쟁 발발 이전부터 반대했다"는 트럼프의 주장이 틀린 건 아니라는 얘기다.
그러나 사실여부보다도 이 따위 문제로 팩트체크나 하고 앉아있는 미국 언론들이 더욱 한심해 보인다. 팩트체크할 게 그렇게도 없나?
아무튼 이렇게 해서 힐러리와 트럼프의 1차 TV 토론이 끝났다. 첫 번째 토론은 트럼프가 이미지 개선을 위해 맹공을 자제하고 소극적이고 방어적으로 나오면서 난타전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두 번째 토론에선 어떤 스타일로 나올지 궁금해진다. 다음 번엔 날카로운 급소 공격 횟수를 늘릴지, 아니면 이번과 마찬가지로 굳이 이미지를 구겨가면서까지 토론에서 이길 필요가 없다고 판단할지 지켜보기로 하자.
두 번째 대선 TV 토론은 오는 10월9일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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