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27일 수요일

디니엘 크레이그 시대 007 시리즈의 장단점

다니엘 크레이그(Daniel Craig)가 2020년 공개되는 그의 다섯 번째 제임스  본드 영화 '노 타임 투 다이(No Time to Die)'를 끝으로 007 시리즈를 떠난다.

크레이그는 미국 CBS TV의 심야 토크쇼 '레잇 나잇 위드 스티브 콜베어(The Late Night with Steve Colbert)'에 출연하여 '노 타임 투 다이'를 끝으로 007 시리즈를 떠난다고 직접 밝혔다. 토크쇼 진행자 스티브 콜베어가 "본드는 이제 그만하는가?(Are you done with Bond?)" 질문하자 크레이그는 "그렇다(Yes)", "끝났다(It's Done)"라고 답했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제임스 본드 영화 '노 타임 투 다이'가 아직 공개되지 않았으므로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에 대한 평가를 하기에 이를 수도 있다. 하지만 크레이그가 '노 타임 투 다이'를 끝으로 월터PPK를 내려놓는다고 미국 방송에 출연해 직접 밝힌 만큼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를 살짝 되돌아보기로 하자.

얼마 전 한 영화 사이트, 스크린 랜트(Screen Rant)에서 "James Bond: 5 Things the Daniel Craig Movies Get Right (& 5 Thingks They Don't)'라는 제목의 기사를 올렸다. 007 시리즈가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에 와서 제대로 한 것 다섯 가지와 잘못한 것 다섯 가지를 꼽은 글이다.

스크린 랜트는 "주인공(The Leading Man)", "주제곡(Title Songs)", "현실적인 톤(Grounded Tone)", "가젯 사용 축소(Stripped Down Gadgets)", "격투와 스턴트 연출(Fight & Stunt Choreography)" 등 다섯 가지를 긍정적으로 평가했고, "(전편과 줄거리가 연결되는) 연속성(Continuity)", "빌런(Villain)", "섹슈얼 폴리틱(Sexual Politics)", "본드의 과거 이야기(Bond's Back Story)", "(악당들이 꾸미는) 사악한 음모(Villainous Plot)" 등 다섯 가지를 부정적으로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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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 랜트와 생각이 같은 부분도 있지만 100% 일치하지는 않는다.

특히, 다니엘 크레이그의 본드 캐릭터를 평가한 부분에서는 차이가 난다.

스크린 랜트는 크레이그가 단신에 블론드라서 일부 본드팬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으나 이제는 오래 전 이야기 같다(Indeed, the furor over his lighter hair and less than imposing stature – at 5ft 10, Craig is the shortest Bond in the canonical series – seems like a distant memory!)고 썼다. 이 모든 걸 극복하고 성공적인 본드가 됐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동의할 수 있다. 크레이그의 첫 번째 본드 영화 '카지노 로얄(Casino Royale)'을 본 직후 기대와 달리 훌륭한 본드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바로 들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이후부터다. 첫인상은 기대 이상으로 좋았지만 그 이후 다니엘 크레이그만의 개성이 뚜렷한 독특한 본드 캐릭터를 탄생시켰다고  평가하지 않는다. 크레이그는 자신만의 본드 캐릭터를 창조하려 했으나 제임스 본드가 아닌 완전히 다른 캐릭터를 만들어놓았다. 크레이그 이전에 제임스 본드를 연기했던 다섯 명의 배우들과 차별화 하기 위해 그들이 하지 않았던 것을 시도해본 것까지는 평가할 수 있지만, 캐릭터의 정체를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가 된 바람에 문제가 생겼다.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의 영화를 보면 "007 시리즈다"라는 느낌이 거의 들지 않는다. 007 시리즈에 변화를 주고 차별화 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그대로 유지하고 무엇을 바꾸고 개선해야 하는가"를 선택하는 데서 실수한 결과다. 007 제작진은 전통적으로 균형을 맞추는 걸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것으로 유명했으나,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에 와서는 이런 균형 감각을 완전히 상실한 듯 했다.

바로 이것이 1세대 007 프로듀서와 2세대 007 프로듀서의 대표적인 차이점이다.

시대의 흐름과 유행에 맞춰 크고 작은 변화를 줘야 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바꿔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면 007 시리즈만의 개성과 특징을 잃어버리고 흔해빠진 "Generic"이 돼버린다. 공장에서 대량생산한 특징 없는 제품이 돼버린다는 것이다. 이 바람에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 캐릭터는 "짝퉁 제이슨 본", "짝퉁 배트맨" 정도에 그쳤을 뿐 007 브랜드가 뚜렷한 개성 있는 본드 캐릭터를 탄생시키지 못했다.

물론 이것은 크레이그의 잘못이라기 보다 007 제작진에게 책임이 있다. 그러나 크레이그가 이상하게 변한 007 시리즈에서 제임스 본드 역을 맡았으므로 크레이그의 본드 캐릭터 역시 어딘가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데가 많았다. 피어스 브로스난(Pierce Brosnan) 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본드팬들이 보다 거칠고 진지한 본드를 요구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크레이그 타잎의 본드를 요구했던 것도 아니다. 이렇다 보니 이제는 본드팬들이 크레이그에게 좀 더 부드럽고 여유있는 모습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하게 된 것이다. 무엇이든지 오버를 하면 문제가 생기는 법이다.

스크린 랜트와 의견 차이가 나는 또 한가지는 "액션과 스턴트 연출"이다.

많은 본드팬들은 로저 무어(Roger Moore)와 피어스 브로스난의 본드가 박력없는 본드라고 비판한다. 여기까지는 분명한 사실이다. 이와 반대로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에는 격렬한 맨손격투 씬이 빠지지 않고 나왔다. 액션과 스턴트 씬도 보다 격렬하고 인텐스해졌다. 여기까지도 사실이다. 이쯤됐으면 007 제작진이 왜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에 와서 격렬한 액션 씬을 많이 넣었는지 대충 설명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뛰어다니며 치고 박는 씬이 워낙 빈번하게 나오다 보니 액션 씬이 익사이팅해 보이지 않고 "또 저러는구나" 정도에 그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나중에는 "왜 자꾸 저러는거냐"로 바뀌었다. 격투 씬은 매우 격렬하고 스턴트 씬도 스케일이 상당히 커 보였으나 흥이 나지 않았다. 거창하고 요란스럽게 우당탕거렸지만 눈에 딱 띄는 씬이 없었다. "더 세게, 더 시끄럽게"가 전부였지 오래 기억에 남을 만한 액션이나 스턴트 씬이 없었다. 클래식 007 시리즈는 영화 제목만 봐도 "스키 씬", "카 체이스 씬" 등 그 영화의 대표적인 액션-스턴트 씬이 바로 떠오르지만,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의 007 시리즈에서는 그런 씬들이 거의 없다. 본드의 피지컬한 몸싸움 씬이 는 것은 평가할 수 있지만, 오래 기억에 남을 만한 스타일리쉬한 씬이 사라졌기 때문에 단지 격렬해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의 액션과 스턴트 연출을 높게 평가하기 힘들다.

여기까지는 스크린 랜트와 다소 의견 차이가 났다.

하지만 생각이 같은 점도 여럿 눈에 띄었다.

특히 "Continuity", "Bond's Back Story", "Villainous Plot"을 부정적으로 꼽은 것에서는 100% 일치한다.

"007 시리즈는 줄거리가 이어지는 속편 시리즈물이 아니라 한편씩 독립된 줄거리의 스탠드얼론(Standalone) 시리즈"라는 점은 007 시리즈에 대한 어느 정도의 기초 지식을 갖춘 사람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007 제작진이 무슨 생각에서인지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에 와서는 전편과 줄거리가 이어지는 속편 시리즈물로 변화를 줬다. 지금까지 007 시리즈가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에 도전해본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고 쳐도, 쓸데 없는 것을 시도했다고 본다. 위에서도 언급했듯 "바꿔야 할 것"과 "바꾸지 말아야 할 것"을 제대로 선택하지 못한 결과다.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 이전까지는 서로 줄거리가 연결되지 않았었는데,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에 와서 갑자기 줄거리가 연결되기 시작하자 혼란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스크린 랜트의 지적대로, '카지노 로얄'의 속편 '콴텀 오브 솔리스(Quantum of Solace)'와 '스카이폴(Skyfall)'의 속편 '스펙터(SPECTRE)' 두 편은 크레이그 시대 007 시리즈 중 흥행실적이 낮았던 영화들이다.

007 시리즈가 속편 시리즈로 바뀐 것에 대한 비판과 문제 제기는 이미 여러 차례 했으므로 반복할 필요가 없으리라 본다. 2020년 공개되는 '노 타임 투 다이' 역시도 또 줄거리가 이어지는 속편으로 알려졌는데, 그 이후부터는 속편 시리즈를 집어치우고 다시 원래대로 스탠드얼론 시리즈로 돌아가야 한다고 본다. 이 따위 쓸데 없는 변화를 줘서 007 시리즈를 보다 신선하게 보이도록 만들겠다는 생각을 한다면 생각을 바꾸거나 007 제작을 그만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스크린 랜트의 지적대로 'Bond's Back Story' 역시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 007 시리즈의 한심한 부분 중 하나다.

007 시리즈는 제임스 본드 캐릭터에 대한 드라마가 아니다. 그러나 007 제작진은 제임스 본드 캐릭터를 보다 사실적이고 인간적인 캐릭터로 묘사하기 위해 본드의 어렸을 적 과거 이야기까지 꺼내놓았다. 이런 스토리는 007 시리즈에 나올 필요가 없는 이야기다. 본드의 과거사와 복잡한 인간 관계 등을 늘어놓으면 무언가 있어 보일 것이라고 판단한 듯 하지만, 드라마틱하게 보이기 위해 쓸데 없는 글장난을 한 것 이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이런 건 제임스 본드 소설이나 코믹북 등에서 다룰 소재이지 영화 시리즈에는 부적합하다.


그렇다면 영화 시리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바로 플롯이다. 특히 악당이 꾸미는 음모가 매우 중요하다. 이것에 따라서 영화의 톤이 좌우되기 때문이다. 전인류를 몰살시키겠다는 터무니 없는 플롯이 등장하면 영화의 톤도 가볍고 우스꽝스러워지고, 제법 그럴 듯한 현실성 있는 플롯이 등장하면 영화의 톤도 이와 함께 무겁고 진지해진다. 따라서 007 시리즈에서는 "악당이 어떤 음모를 꾸미는가"가 상당히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의 악당들은 대부분 스케일이 작은 흥미없는 음모를 꾸미는 데 그쳤다. 터무니 없는 음모에서 벗어나 보다 사실적인 쪽으로 방향을 바꾸고자 노력한 것은 평가하지만, 흥미가 끌리지 않을 정도로 워낙 스케일이 작아지면서 007 시리즈 답지 않다는 비판을 받았다. 실제 첩보세계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것도 아니었고, 시간에 쫓기는 긴박한 위기상황도 없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나는 오래 전부터 007 제작진이 스파이 스릴러 소설가를 고용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던 것이다. 007 시리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플롯"과 "음모"인데, 이것 모두가 시원찮아졌기 때문이다.


이밖의 "주제곡(Title Songs)", "현실적인 톤(Grounded Tone)", "가젯 사용 축소(Stripped Down Gadgets)" 등은 나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주제곡"은 조금 아슬아슬하지만, 피어스 브로스난 시대보다 발전한 것은 사실이다.  또한, 여러 차례 후보에만 올랐을 뿐 받지 못했던 아카데미 주제곡상을 2회 연속으로 받았다는 점도 외면하기 어렵다.

"현실적인 톤"과 "가젯 사용 축소"는 나도 이곳에서 오랫동안 요구해왔던 것이라서 스크린 랜트와 마찬가지로 긍정 평가를 한다.

그러나 종합해서 결론을 내려보면 내가 평가하는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 007 시리즈는 장점보다 단점이 더 많다. '카지노 로얄' 때만 해도 가능성이 높아 보였으나 그 이후부터 방향을 잃으면서 "가장 제임스 본드답지 않은 제임스 본드", "가장 007 시리즈 같지 않은 007 시리즈"가 됐기 때문이다. 아마도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를 007 시리즈가 가장 비정상이었던 시대로 기억하게 될 듯 하다. 시리즈가 오랫동안 계속되고 제작진이 돈을 많이 벌어들이는 것도 당연히 중요하다. 그러나 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뜯어 고치면서라도 시리즈를 유지하겠다는 쪽으로 계속 나아가는 건 올바르지 않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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