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포스트 칼럼니스트 데이빗 이그내시어스의 스파이 소설을 영화로 옮긴 '바디 오브 라이스(Body of Lies)'가 드디어 개봉했다.
손 꼽아 기다렸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레오나도 디카프리오, 러셀 크로우 주연에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인 만큼 '리스트'에 올려놓았던 것은 사실이다. 게다가 이그내시어스의 소설까지 읽었다 보니 영화로 어떻게 옮겨졌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바디 오브 라이스'는 CIA 에이전트 로저 페리스(레오나도 디카프리오)와 에드 호프맨(러셀 크로우)이 요르단 정보부와 서로 속고 속여가면서 유럽 곳곳에서 폭탄테러 공격을 하는 중동 테러리스트를 함께 추적한다는 줄거리의 스파이 스릴러다. 최근에 나오는 미국산 스파이 스릴러가 다 그렇듯이 '바디 오브 라이스' 역시 중동문제를 다룬 작품이다.
이런 성격의 스파이 영화는 미사일 나가는 자동차를 탄 수퍼 에이전트가 세계정복 야욕에 불타는 해괴한 테러리스트를 때려잡는 식의 스파이 영화와는 분위기부터 크게 다르다. '중동 테러리스트'와 '폭탄테러'가 반복되는 게 약간 지겨운 감이 있고, 스파이 스릴러에 잘 어울리는 소재도 아닌 것 같지만 21세기 미국산 스파이 스릴러에서 '테러리즘'을 뺀 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실적인 스파이 스릴러의 소잿감으로 왔다이기 때문이다.
'바디 오브 라이스'의 최대 무기 역시 '리얼리티'다. 지금 현재 중동지역에서 실제로 진행중인 첩보전을 최대한 비슷하게 보여주는 게 '미션 넘버1'이다. 허무맹랑한 플롯과 액션으로 가득한 '가짜(?) 스파이 영화'에 식상한 관객들이 '오랜 만에 제법 그럴 듯한 스파이 영화를 본 것 같다'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게 미션인 것.
이를 위해선 액션이 너무 과해도 안되고, 그렇다고 대화량이 너무 많아도 곤란하며, 중동문제를 다룬다고 정치영화처럼 만들어도 안된다. 그럴싸 한 냄새만 풍기는 선에서 그쳐야지 오버하면 곤란하다.
여기까지는 별 문제될 게 없었다. '바디 오브 라이스'도 제법 분위기 나는 스파이 스릴러처럼 보였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바로 스토리다.
소설을 읽으면서 '이 소설을 어떻게 재미있는 영화 스크립트로 옮길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테러리스트를 혼란에 빠뜨리는 작전을 진행한다는 것은 그런대로 흥미진진했지만 그 '작전'이 개시하기 까지의 과정과 그 사이에 자꾸 끼어드는 삼각관계 스토리가 부드럽게 맞물려 돌아가는 것 처럼 보이지 않았다.
다 좋은데 삼각관계?
1차원적인 어드벤쳐 스릴러 소설로 비춰지는 걸 피하기 위해 CIA 에이전트의 내면을 비추고, 이 과정에서 주인공 로저 페리스와 미국에 있는 그의 아내, 요르단에서 만난 여인의 삼각관계까지 집어넣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스파이 스릴러에 무슨 얼어죽을 삼각관계난 생각이 들었다. CIA 에이전트의 평범한 삶을 사실적으로 그리려 한 것 까진 좋은데 그 방법으로 엉뚱한 것을 택한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영화에선 '삼각관계' 스토리는 완전히 날아갔다. 구질구질한 삼각관계 이야기와 테러리스트 추적 이야기를 오락가락하는 것을 인내할 영화관객들이 많지 않다는 것을 제작진도 알고있었는 듯.
테러리스트 추적과 관련없는 삼각관계 스토리를 완전히 걷어낸 덕분에 영화버전은 소설보다 전개가 스피디하다. 쓸 데 없는 이야기로 처지게 만들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또다른 문제가 있었다. 소설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던 삼각관계를 빼고 나니까 남는 게 얼마 없었던 것. 너저분한 스토리를 떼어내고 깔끔해진 것 까진 좋은데 나머지만 가지고 영화를 만들다 보니 맹탕이 되고 말았다.
실제 CIA 에이전트의 작전을 보는 듯 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문제는 무조건 리얼하다고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제일 중요한 건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분위기는 제법 나고 사실적으로 보여도 재미가 없으면 다 소용없다. 무조건 리얼하고 사실적인 것만을 원한다면 다큐멘타리나 CNN 뉴스를 보면 되지 굳이 영화를 볼 필요가 있겠는지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
'바디 오브 라이스'는 바로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서로 속고 속이는 비정한 첩보세계를 그렸다지만 이것만으론 부족했다. 분위기만 그럴싸 할 뿐 건질 게 별로 없었다. 컴퓨터 전문가 등과 함께 멀쩡한 사람을 테러리스트로 둔갑시키는 부분은 흥미진진했지만 영화 후반부에 '마지막 작전'을 개시하면서 반짝하는 게 전부였을 뿐 영화 내내 액션, 스토리, 유머, 스릴 어느 한가지도 제대로 눈에 띄는 게 없었다.
기억에 남는 것이라곤 스파이 위성으로 필드 에이전트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게 전부.
'바디 오브 라이스'는 소설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주는 영화였다. 기자 출신 작가가 매우 사실적인 스파이 스릴러를 쓰고자 했다는 것 까진 인정하더라도 픽션으로써는 '글쎄올시다'로 보였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다 보니 소설에서의 문제가 영화에서도 읽혔다. '디파티드(The Departed)'로 아카데미상을 받은 윌리엄 모나한이 각색을 맡았지만 별 수 없었다.
데이빗 이그내시어스의 '바디 오브 라이스'는 CIA에 대한 전문지식을 갖고있는 작가가 실제 CIA 오퍼레이션을 문자중계하듯 밋밋하게 적어 내려가면서 쓸 데 없는 삼각관계와 별 볼일 없는 스릴러 플롯을 섞은 소설이다. 중동을 배경으로 한 다른 스파이 스릴러 소설보다 다소 전문적이고 정확해 보일 지 모르지만 이것을 제외하곤 별다를 게 없었다. 영화버전 '바디 오브 라이스'는 여기에서 삼각관계만 걷어내고 약간의 액션을 보탠 정도가 전부일 뿐이므로 '밋밋하고 별 볼일 없는' 것은 소설과 별 차이 없었다.
물론, 레오나도 디카프리오와 러셀 크로우를 잊은 것은 아니다. 잊고싶어도 잊을 수도 없다. 이들 두 수퍼스타 배우들마저 빼고 나면 진짜로 남는 게 없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이것이 중동 테러리즘을 배경으로 한 스파이 스릴러의 한계인지도 모른다. 현재진행형인 문제인 만큼 현실감이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폭탄 터뜨리기를 좋아하는 테러리스트들의 꽁무니를 쫓는 게 전부다 보니 별볼일 없어지기 십상이다. 중동, 이슬람, 폭탄테러 등을 다룬 비슷한 내용의 스파이 픽션이 많은 데다 스토리도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대부분 뻔하기 때문에 신선도도 떨어진다.
영화 '바디 오브 라이스'도 이런 문제를 제대로 극복하지 못했다. 제법 사실적이고 리얼하고 그럴싸 해 보였지만 그게 전부였을 뿐 영화 내내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분위기만 거창하지 아무 것도 없는 맹탕인 영화를 보고있다는 생각만 들 뿐 영화에 빠져들지도, 즐기지도 못했다. 리들리 스콧 감독, 레오나도 디카프리오, 러셀 크로우 등 헐리우드에서 내노라 하는 스타들이 만든 영화가 이 정도밖에 안되냐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실망스럽기만 했다.
간만에 스파이 영화다운 영화가 나오길 기대하면서도 이그내시어스의 원작을 어떻게 영화로 옮기냐에 좌우된다는 걱정이 앞서곤 했는데 아쉽게도 '기대'가 아닌 '걱정'이 맞아떨어졌다.
그렇다고 영화가 끝나자 마자 좌석을 박차고 일어서진 않았다.
건스 앤 로지스(Guns N' Roses)의 '이프 더 월드(If the World)'를 듣고싶어서 였다. 전통적인 건스 앤 로지스 스타일이 묻어나는 곡은 아니었지만 귀에 착 붙더라. 그 바람에 궁뎅이 들다가 일단 정지...
영화 '바디 오브 라이스'에서 가장 맘에 들었던 파트를 한 군데 꼽으라고 하면 주저없이 '여기'라고 하겠다.
다음 달에 발매되는 건스 앤 로지스의 새로운 앨범 'Chinese Democracy'에 수록된 곡이라서 아직은 '합법적'으로 들을 수 없다는 게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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