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번째 제임스 본드 영화 '콴텀 오브 솔래스(Quantum of Solace)'의 스크린플레이를 썼던 폴 해기스(Paul Haggis)는 이언 플레밍(Ian Fleming)의 제임스 본드와 존 르 카레(John Le Carre)의 첩보소설을 섞었다고 했다. 어지간해선 섞이지 않을 것 같은 플레밍과 르 카레의 스타일을 한데 섞어보려 한 것이다.
공식제목이 정해지지 않아 '본드22'로 불리던 때 폴 해기스는 작업중이던 제임스 본드 스크립트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The new script] is an odd mix between his[Fleming's] stuff and [English espionage writer John] le Carré's stuff that I'm channeling; I'm mixing them both up"
폴 해기스는 왜 제임스 본드 영화 스크립트에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존 르 카레의 스타일을 집어넣으려 한 것일까?
제임스 본드를 맡은 영화배우가 교체될 때마다 영화의 분위기도 같이 바꿔왔던 007 제작진은 다니엘 크레이그(Daniel Craig)가 피어스 브로스난(Pierce Brosnan)에 이어 제 6대 제임스 본드로 확정되자 투명자동차까지 나왔던 007 시리즈를 다시 이언 플레밍의 원작으로 되돌려 놓았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첫 번째 제임스 본드 영화 '카지노 로얄(Casino Royale)'이 플레밍이 1953년에 발표한 첫 번째 제임스 본드 소설을 기초로 했다는 것만 보더라도 007 제작진의 의중을 엿볼 수 있었다.
폴 해기스가 '본드22 aka 콴텀 오브 솔래스' 스크립트에 존 르 카레 스타일을 넣으려 했던 이유도 007 시리즈의 변화에 맞춰 영화에 보다 어둡고 진지하고 사실적인 분위기를 집어넣기 위해서 였다.
그렇다면 '본드23'는 어떻게 될까?
일단 '프로스트/닉슨(Frost/Nixon)', '퀸(The Queen)'과 같은 영화로 알려진 영국 스크린라이터, 피터 모갠(Peter Morgan)이 '본드23' 스크린플레이를 맡았으니 세계정복의 야욕에 불타는 황당무계한 스토리는 나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어찌된 게 007 시리즈의 분위기가 갈수록 어두워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꼭 그런 건 아니다. 다니엘 크레이그가 로저 무어(Roger Moore)의 '나를 사랑한 스파이(The Spy Who Loved Me)'와 같은 세팅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 영화는 Q, 머니페니, 가젯, 유머 등이 모두 돌아온다고 해도 스토리는 무겁고 진지한 톤을 유지해야 어울린다. 미사일이 나가는 본드카가 나왔어도 스토리는 진지한 편이었던 티모시 달튼(Timothy Dalton) 주연의 1987년 영화 '리빙 데이라이트(The Living Daylights)'처럼 크레이그의 영화도 밸런스를 잡아주는 게 최선의 방법이다. 그러므로, 피터 모갠이 '본드23'팀에 합류한 건 긍정적인 뉴스다. '본드23'가 과거의 포뮬라로 되돌아가더라도 스토리까지 만화영화 수준이 되는 일은 없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한가지 재미있는 건, '본드23' 스크린라이터 3명 모두 존 르 카레의 소설을 각색한 경력이 있다는 점이다. 007 시리즈 베테랑이라 할 수 있는 닐 퍼비스(Neil Purvis)와 로버트 웨이드(Robert Wade)는 르 카레의 소설 '미션 송(The Mission Song)'을 함께 각색했으며, 피터 모갠은 르 카레의 'Tinker, Tailor, Soldier, Spy'를 스크린플레이로 옮겼다. 'Tinker, Tailor, Soldier, Spy'는 영국 정보부에 침투한 소련 몰(Mole)을 색출하는 내용의 냉전시대 배경의 첩보소설이다.
스크린라이터들 뿐만 아니라 프로듀서도 존 르 카레를 좋아한다. 007 시리즈 프로듀서, 마이클 G. 윌슨(Michael G. Wilson)도 르 카레의 소설을 높게 평가한 바 있다.
기왕 이렇게 된 김에 존 르 카레에게 제임스 본드 소설을 맡겨보는 건 어떨까?
이언 플레밍 이후에 나온 제임스 본드 소설들이 대체적으로 기대에 못 미쳤고, 작년에 출판된 '데블 메이 케어(Devil May Care)'도 마찬가지였는데 존 르 카레에게 맡겨보는 것도 느쁘지 않을 것 같다. 게다가 007 시리즈 프로듀서와 스크린라이터들이 존 르 카레의 소설을 좋아하고, 그 영향이 영화로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으니 존 르 카레가 제임스 본드 소설을 쓴다고 해서 크게 놀랄 사람들도 이젠 많지 않을 지 모른다.
존 르 카레는 액션 스릴러 소설 작가가 아니라는 문제가 있지만 '데블 메이 케어'를 쓴 세바스찬 펄크스(Sebastian Faulks)도 아니긴 마찬가지 였다. 그러니 조지 스마일리(George Smiley)는 잊고 제임스 본드 소설을 한 번 써보는 건 어떨까? '이언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 뿐만 아니라 '존 르 카레의 제임스 본드'까지 나오면 아주 멋지지 않을까?
GO FOR IT, JO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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