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본드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DOUBLE-O-SEVEN이 상대할 만한 적수를 찾는 게 쉽지않다는 것이다. 새로운 영화가 나올 때마다 매번 만만치 않은 적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숀 코네리(Sean Connery) 시절에 제임스 본드의 적으로 등장했던 스펙터(SPECTRE)라는 범죄조직은 법적인 문제로 인해 더이상 007 시리즈에 등장시킬 수 없게 된 데다 냉전마저 끝나는 바람에 제임스 본드와 그가 소속된 정보부(MI6)의 라이벌 역할을 맡을 만한 조직들이 모두 없어졌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이언 플레밍(Ian Fleming)이 남긴 제임스 본드 원작소설까지 바닥났다. 부분적으로 원작을 참고하는 것은 여전히 가능하지만 이전처럼 제목과 메인플롯을 원작에서 그대로 따오는 건 불가능해 진 것이다.
이로 인해 90년대 이후에 제작된 제임스 본드 시리즈는 뚜렷한 개성이 없는 악당과 별 볼 일 없는 스토리를 전통적인 007 포뮬라에 대충 끼워맞춘 게 전부인 영화가 되어갔다. 어떻게 보면 피어스 브로스난(Pierce Brosnan)은 007 시리즈가 가장 힘들 때 제임스 본드가 된 배우인 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임스 본드 역이 다니엘 크레이그(Daniel Craig)에게 넘어가면서 부터 약간 달라지기 시작했다. 전형적인 007 시리즈 포뮬라에서 벗어나 이언 플레밍의 원작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007 제작진은 여지껏 공식 007 시리즈로 제작하지 않았던 플레밍의 첫 번째 제임스 본드 소설 '카지노 로얄(Casino Royale)'을 21번째 영화로 택했고, 크레이그는 갓 00 에이전트가 된 제임스 본드를 연기했다.
007 제작진은 플레밍이 1953년에 발표한 소설을 현시대에 맞게 각색하면서 소설에서 적으로 등장하는 소련의 SMERSH를 국제 테러리스트 조직으로 대신했다. SMERSH는 고사하고 KGB도 이젠 지난 얘기가 되었으므로 007 제작진이 변화를 준 이유가 충분히 이해된다.
영화 '카지노 로얄'에 등장했던 바로 이 테로리스트 조직이 주목을 받게 된 건 2008년작 '콴텀 오브 솔래스(Quantum of Solace)'에서다. '콴텀 오브 솔래스'가 007 시리즈 사상 처음으로 전편과 줄거리가 완벽하게 이어지는 속편이기 때문이다.
007 영화 시리즈와 플레밍 원작을 보면 전편에서 벌어졌던 사건이 언급되는 경우는 간혹 있어도 전편의 엔딩에서부터 바로 시작하는 속편은 없다. 이 때문인지 '콴텀 오브 솔래스'는 "전편 줄거리와 어느 정도 관련있다는 정도만 보여주면 되었지 '카지노 로얄'의 엔딩에서부터 바로 시작할 필요는 없지 않았나. 이 바람에 '카지노 로얄 1.5'가 되었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물론 이 부분은 007 제작진이 실수한 것으로 보인다. 구태여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콴텀(Quantum)'이라는 테러조직을 소개하는 것에는 성공했다. '콴텀 오브 솔래스'에서 '콴텀'이라 불리는 조직이 전편(카지노 로얄)에서 베스퍼(에바 그린)를 더블에이전트로 만들어 결국 자살로 몰고 간 배후조직으로 밝혀지는 것.
물론 '콴텀'은 플레밍이 창조한 조직이 아니다. 플레밍의 1953년 소설에서는 '콴텀'이 아니라 SMERSH가 적으로 나오며, 제임스 본드는 베스퍼의 자살로 인해 소련의 SMERSH를 향한 증오와 복수심에 사로잡히게 된다. SMERSH가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 시리즈에서 007의 숙적이 되는 순간이다. SMERSH는 '카지노 로얄' 이후로 여러 편의 제임스 본드 소설에서 본드의 적수로 등장한다.
여기에서 힌트를 얻은 007 제작진은 SMERSH를 '콴텀'으로 바꿔치기 한 것으로 보인다. 베스퍼의 죽음으로 인한 본드의 증오와 복수심이 '콴텀'이라는 조직에 쏠리도록 하면서 SMERSH에 비견할 만한 최고의 적수를 탄생시킬 계산이었던 듯 하다.
이 아이디어는 사실 그다지 나쁘지는 않다. 더이상 SMERSH, KGB, 스펙터 등을 사용할 수 없게 된 만큼 이들을 대신해 007 시리즈에 단골로 등장시킬 수 있는 새로운 본드의 적수를 만들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잘만 다듬든다면 한편으로는 SMERSH/KGB와 같은 첩보조직처럼 보이다가도 다른 한편으로는 스펙터를 연상시키는 범죄/테러조직처럼 둔갑시킬 수도 있다. 그러므로 SMERSH와 스펙터를 한데 합친 듯한 새로운 조직을 만든다는 것 까지는 문제될 게 없어 보인다.
그런데...
이름이 '콴텀'? 영화 제목(콴텀 오브 솔래스)에 맞춰 급조된 게 분명해 보인다.
보다 쿨한 이름들이 많은데도 굳이 '콴텀'을 선택한 것은 007 제작진이 범한 또하나의 실수다. SMERSH/KGB나 스펙터를 대신하려면 일단 이룸에서부터 어딘가 위협적인 분위기가 풍겨야 하지만 '콴텀'에선 그런 느낌이 전혀 들지 않기 때문이다. 조직의 명칭이 '콴텀 오브 솔래스'를 위해 급조한 1회용처럼 보일 뿐만 아니라 제임스 본드의 숙적이 될 조직의 명칭으로 그다지 쿨하게 들리지도 않는다는 게 문제다.
그럼 이름을 바꾸면 되는 것 아니냐고?
'콴텀'을 이전의 SMERSH, 스펙터처럼 007 시리즈에 단골로 등장하는 제임스 본드의 숙적으로 만들 생각이 없다면 바꾸고 자시고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당장 '본드23'에도 '콴텀'이라는 조직을 등장시킬 생각을 하고있다면 이름을 바꿀 필요성이 있다.
잠깐! 만약 '본드23'로 '콴텀'이라는 조직이 돌아온다면 줄거리가 또 이어질 가능성도 있는 것이냐고?
그런 건 아니다. '본드23'에 '콴텀'이란 조직이 또 나온다고 해서 줄거리가 또 이어져야 한다는 법은 없다. '제임스 본드 vs 콴텀'이라는 대결구도를 만들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 매번마다 기차놀이하듯 꼬리를 이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콴텀 오브 솔래스'에서 조직의 이름이 '콴텀'인 것으로 이미 밝혀졌는데 이제 와서 다른 것으로 바꾸기는 늦지 않았냐고?
갑자기 새로운 이름으로 바뀌면 이상하겠지만 이렇게 하지 않고도 명칭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된다. 예를 들어, '콴텀'이라는 조직이 끝이 아니라 그들의 배후에 또다른 거대조직이 있다고 하는 방법이 있다.
투명자동차까지 만드는 판인데 이 정도야 스크린라이터들에겐 식은 죽 먹기일 것 같지 않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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