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1일 일요일

이언 플레밍의 007 vs 케빈 맥클로리의 007

제임스 본드가 이언 플레밍(Ian Fleming)이라는 영국 소설가에 의해 탄생했다는 것은 어지간한 사람들은 다들 알고있는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 소설버전 이외로 또다른 제임스 본드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영화버전 제임스 본드다.

소설버전 제임스 본드와 영화버전 제임스 본드가 다르다는 얘기냐고?

그렇다. 다르다. 이언 플레밍은 소설버전 제임스 본드만을 만들었을 뿐 전세계 영화팬들에게 친숙한 실버스크린 버전 제임스 본드는 다른 사람에 의해 탄생되었기 때문이다.

그럼 영화버전 제임스 본드는 누가 만들었냐고?

아일랜드 출신 영화 프로듀서, 케빈 맥클로리(Kevin McClory)다.

케빈 맥클로리와 이언 플레밍은 50년대 후반 제임스 본드를 주인공으로 한 액션영화의 제작을 함께 준비했었다. 그런데 문제는 케빈 맥클로리가 이언 플레밍의 원작소설을 그대로 영화화한다는 아이디어에 난색을 표한 것. 고리타분한 냉전테마의 첩보영화가 아닌 현실에서 벗어난 줄거리의 어드벤쳐 영화를 구상중이었던 맥클로리는 플레밍의 소설을 영화로 각색하는 대신 영화용으로 새로운 스토리를 만드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이 과정에서 '썬더볼(Thunderball)', '옥토퍼시(Octopussy)' 등 이후 제임스 본드 영화에 사용된 스토리들이 탄생했다.

스펙터(SPECTRE)라 불리는 범죄집단도 바로 이 때 탄생했다. 스펙터라는 명칭은 플레밍이 이전 소설에서 사용한 바 있으므로 플레밍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지만, 범죄집단 아이디어는 맥클로리의 것이다. 냉전구도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치성을 띄지 않은 범죄집단을 제임스 본드의 적으로 삼으려 한 것은 맥클로리의 아이디어였기 때문이다.

플레밍은 맥클로리와의 공동작업이 흐지부지되자 그와 함께 준비했던 스크린플레이를 기초로 한 소설을 발표했다. 이것이 바로 '썬더볼'이다. 이 문제로 플레밍을 고발한 맥클로리는 '썬더볼'의 영화제작권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그 이후 맥클로리는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제작하던 알버트 R. 브로콜리(Albert R. Broccoli), 해리 살츠맨(Harry Salzman)과 공동으로 영화 '썬더볼'을 제작했다. 숀 코네리(Sean Connery) 주연의 '썬더볼'은 EON 프로덕션이 제작한 007 시리즈 제 4탄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7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맥클로리가 그만의 제임스 본드 영화 시리즈를 만들고자 했기 때문이다. 결국 맥클로리는 1983년 숀 코네리를 제임스 본드로 세운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Never Say Never Again)'을 선보였다. 그러나 한때 파트너였던 EON 프로덕션과는 사이가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맥클로리와 EON 프로덕션은 90년대말까지 제임스 본드 법정싸움을 벌였으며, 맥클로리는 '썬더볼' 뿐만 아니라 영화버전 제임스 본드 또한 그의 창조물이라면서 EON 프로덕션을 압박했다. 50년대 후반으로 되돌아가 제임스 본드 영화가 탄생하기까지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맥클로리의 주장에 일리가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수십년 동안 제임스 본드 영화 시리즈를 제작해 온 EON 프로덕션을 이런 식으로 꺾을 수는 없었다. 결국 또다른 제임스 본드 영화 시리즈를 만들려던 맥클로리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재미있는 건, 90년대말에 EON 프로덕션과 MGM을 상대로 '007 싸움'을 벌였던 영화 스튜디오가 바로 소 픽쳐스였다는 사실. 더욱 재미있는 건, 2006년작 '카지노 로얄(Casino Royale)'과 2008년작 '콴텀 오브 솔래스(Quantum of Solace)' 두 편의 제임스 본드 영화를 소니 픽쳐스/콜롬비아 픽쳐스가 배급했다는 사실이다.

소니 픽쳐스가 007 시리즈 배급을 맡게된 순간 EON 프로덕션의 마이클 G. 윌슨(Michael G. Wilson)과 바바라 브로콜리(Barbara Broccoli)의 심경이 참 복잡했을 듯 하다.

그래서 였을까? 소니 픽쳐스/콜롬비아 픽쳐스가 배급을 맡은 두 편의 제임스 본드는 영화는 이전의 007 시리즈와 어딘가 다른 데가 있었다. '카지노 로얄'을 예로 들어보자. 오프닝 건배럴씬이 사라지고, 프리타이틀 시퀀스가 흑백인 007 영화는 지금까지 '카지노 로얄'이 유일하다. 다니엘 크레이그(Daniel Craig)가 연기한 제임스 본드 캐릭터도 이전과 달랐다. 숀 코네리, 로저 무어(Roger Moore), 피어스 브로스난(Pierce Brosnan) 버전 제임스 본드와는 달리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는 영화버전보다 이언 플레밍 원작의 제임스 본드에 보다 가까워진 듯 했다.

그저 우연일 뿐인 것일까?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리부팅한다는 순수한 의미가 전부였을까? 007 시리즈의 분위기를 바꿀 때가 되었으니 한 번 화끈하게 바꿔본 게 전부였을까?

아니면 케빈 맥클로리와 같은 편에 서서 EON 프로덕션과 MGM을 상대로 법정싸움을 벌였던 소니 픽쳐스에게 '이언 플레밍의 007'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었을까? 영화버전 제임스 본드를 창조하는 데 케빈 맥클로리가 큰 역할을 한 것만은 사실이라지만 EON 프로덕션은 '케빈 맥클로리의 007'에 별다른 미련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었을까? 1탄부터 20탄까지 40년동안 007 시리즈에 거의 매번 등장했다고 할 수 있는 '케빈 맥클로리의 007'에서 벗어나도 멋진 제임스 본드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었을까? '이언 플레밍의 007'의 제대로 된 오리지날 제임스 본드 영화를 보여주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까?

소니 픽쳐스가 배급을 맡았던 두 편의 제임스 본드 영화 모두 흥행에 성공했다. '카지노 로얄'은 007 시리즈 역대 최고 흥행작이 되었으며, '콴텀 오브 솔래스'가 넘버2가 되었다. '케빈 맥클로리의 007'이 아닌 '이언 플레밍의 007'의 제임스 본드 영화 두 편이 역대 넘버1과 넘버2를 나란히 차지한 것이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면 케빈 맥클로리가 EON 프로덕션과 공동으로 제작했던 1965년작 '썬더볼'이 여전히 007 시리즈 역대 최고 흥행작이다. '카지노 로얄'과 '콴텀 오브 솔래스' 모두 북미 흥행수익 1억7천만불을 넘지 못했으나 인플레이션 조절을 한 '썬더볼' 북미 흥행수익은 무려 5억불이 넘는다. '카지노 로얄'과 '콴텀 오브 솔래스' 북미 흥행수익을 합해도 모자라는 액수다.

비록 '썬더볼'과는 경쟁이 안 된다 해도 '카지노 로얄'과 '콴텀 오브 솔래스'가 '케빈 맥클로리의 007' 영화였던 90년대 피어스 브로스난의 영화들보다는 높은 수익을 기록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본드23'는 어떻게 되는 걸까?

또다시 '이언 플레밍의 007' 스타일로 가는 걸까?

그런데 '본드23'는 소니 픽쳐스가 배급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본드23'에서는 '케빈 맥클로리의 007'에 앨러지 반응을 보일 필요가 없을 지도 모른다. 다니엘 크레이그만의 본드 스타일이 나름 만들어진 만큼 파격적인 변화를 기대하기는 힘들겠지만 '케빈 맥클로리의 007', 다시 말하자면 '본드, 씨네마 본드' 쪽으로 한발짝 정도 다가갈 수는 있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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