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 1일 수요일

007 제작진은 적임자에 일을 맡기고 있는 걸까?

새로운 제임스 본드 영화가 2012년 11월 개봉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MGM 사태가 어느 정도 정리되면서 제작중단되었던 '본드23' 프로젝트가 곧 재개될 것이라는 반가운 소식이 있었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다니엘 크레이그(Daniel Craig)는 변함없이 제임스 본드 역으로 돌아올 것이며, 영국 영화감독 샘 맨데즈(Sam Mendes)가 연출을 맡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영국 스크린라이터 피터 모갠(Peter Morgan)은 '본드23' 프로젝트를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007 시리즈를 제작하는 EON 프로덕션이 '본드23' 스크린라이터로 공식 발표했던 피터 모갠이 도중에 떠난 것이다.

왜 떠났을까?

모갠이 인도의 한 미디어와 인터뷰한 내용을 보면 그 이유를 대충 짐작할 수 있다.

"I do think the absence of social reality in the Bond film... if they fix that, or they get that in a script, which I’m so hoping they will, where you can actually believe in him that he isn’t just a person in a dinner jacket... I just personally struggle to believe a British secret agent is still saving the world." - Peter Morgan

007 제작진이 피터 모갠을 '본드23' 스크린라이터로 공식 발표했을 때 많은 본드팬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퀸(The Queen)', '라트스 킹 오브 스코틀랜드(The Last King of Scotland)', '프로스트/닉슨(Frost/Nixon)' 등과 같은 드라마/전기영화로 유명하지 제임스 본드 시리즈와 같은 'LARGER-THAN-LIFE' 액션영화로 유명한 작가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다니엘 크레이그가 제임스 본드가 된 이후로 시리즈가 이전보다 진지하고 리얼해진 것은 사실이므로 모갠의 스크립트가 예상외로 잘 어울릴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의 인터뷰 내용을 보면 모갠이 제임스 본드 시리즈에 대한 오해가 상당하다는 점을 잘 알 수 있다.

제임스 본드는 사실상 턱시도를 입은 수퍼히어로로 봐야한다. 다니엘 크레이그로 제임스 본드가 교체된 이후 많이 사실적으로 바뀌긴 했지만, 그렇다고 시리즈의 성격이 완전히 바뀐 것으로 착각해선 안 된다. 그러나 모갠의 인터뷰 내용을 보면 그는 완전히 다른 영화를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책임은 전적으로 007 제작진에 있다. 턱시도를 입은 수퍼 스파이 이야기에 제법 그럴 듯한 줄거리를 붙여줄 작가를 찾다가 "아직도 영국 스파이가 세계를 구한다는 걸 믿기 힘들다"고 하는 작가에 '본드23' 작업을 맡기는 실수를 한 건 제작진이다. '영국 스파이가 세계를 구하지 않는다'는 건 '거미에 물린다고 스파이더맨이 되지 않는다'는 것과 다를 게 없는 얘기인데, 이런 데서 다른 생각을 하는 작가에게 일을 맡긴 것은 제작진의 실수다.

그렇다면 제작진이 왜 이런 실수를 하게 됐는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제작진부터 제임스 본드 시리즈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헷갈리고 있기 때문이다. 피터 모갠이 이언 플레밍(Ian Fleming)과 존 르 카레(John Le Carre)를 헷갈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화 제작진 역시 21세기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어떤 성격으로 만들어야 할 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듯 하다.

징후는 지난 '콴텀 오브 솔래스(Quantum of Solace)'에서부터 감지되었다. 전체적인 스토리도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제임스 본드 시리즈와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영화감독 마크 포스터(Marc Forster)에 연출을 맡겼다는 점도 미스테리 중 하나였다. 영국 연방에 속한 국가 출신 영화감독들에게만 연출을 맡긴다는 룰을 깼다는 점까지는 평가할 수 있어도, 마크 포스터는 뜻밖의 선택이었다.

제작진은 제임스 본드만 등장하면 무조건 제임스 본드 영화가 된다고 생각한 듯 보였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제임스 본드 영화처럼 보이지 않을 수 있는 지만을 연구한 듯 했다. '영화가 건배럴씬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영화에 "본드, 제임스 본드"라는 대사가 나오지 않는다', '보드카 마티니를 주문하는 씬도 나오지 않는다'는 등 007 시리즈의 전통적인 룰을 깨는 데 더욱 많은 신경을 썼기 때문이다.

이 결과 '콴텀 오브 솔래스'는 지금까지 나온 22편 중 가장 제임스 본드 영화답지 않게 보이는 영화 중 하나가 되었다.

'콴텀 오브 솔래스'에 실망한 본드팬들은 '본드23'부터는 달라지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007 제작진이 피터 모갠을 '본드23' 스크린라이터로 선택하면서 또다시 머리를 긁적여야만 했다. 제임스 본드와 피터 모갠이 서로 매치가 안 되어 보였기 때문이다. 제임스 본드를 주인공으로 하는 폴리티컬 스릴러를 만들 생각이라면 이해가 될 지 몰라도, 우리에게 친숙한 제임스 본드 시리즈엔 어울리는 인물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러더니 모갠이 '본드23' 스토리를 완성시키지도 못하고 도중에 프로젝트에서 하차했다.

Now what?

그래도 영화감독 샘 맨데즈는 괜찮지 않냐고?

그것도 아니다. 스크린플레이를 피터 모갠에 맡긴 데 이어 연출은 샘 맨데즈에 맡긴다는 소식을 듣고 또 머리를 긁지 않을 수 없었다. 제작진이 007 영화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노리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제임스 본드 시리즈는 'PURE ENTERTAINMENT'였는데, 제작진이 이를 바꾸려는 게 아니냐는 생각도 들었다. 과거 로저 무어(Roger Moore), 피어스 브로스난(Pierce Brosnan) 시대의 넌센스 액션영화 시절로 되돌아가지 않겠다는 싸인을 보낸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었지만, 제작진이 오버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앞섰다.

결국 007 제작진이 원하는 건 매우 사실적인 스릴러는 아니면서도 완전한 넌센스 판타지도 아닌 영화인 듯 하다. 물론 듣기에는 그럴싸해 보인다. 하지만 꼭 피터 모갠, 샘 맨데즈 같은 이름들을 들먹여야 할 필요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제임스 본드 영화를 멋지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적임자에 일을 맡길 생각을 하지 않고 네임밸류 높은 사람들만 찾아다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혹시 007 제작진이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완전히 다른 성격의 영화 시리즈로 바꿔놓으려 하는 건 아니냐고?

제작진이 한 물 간 과거의 007 포뮬라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은 사실이다. 여기까지는 제작진이 옳다. 똑같은 영화를 계속해서 재탕, 삼탕 하는 데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007 포뮬라에서 벗어나는 데도 한계가 있다. 앞서 말했듯이, 제임스 본드가 나온다고 무조건 제임스 본드 영화가 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007 프로듀서들도 이 문제에 대해 이미 여러 차례 답변을 한 바 있으므로, 약간 의심이 들긴 해도, 이들이 아주 엉뚱한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 듯 하다.

007 제작진이 지금부터라도 팀을 제대로 꾸려 지난 '콴텀 오브 솔래스'보다 나은 퀄리티의 제임스 본드 영화를 만들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댓글 4개 :

  1. 제작 뒷배경까지 알고 계신 오공님 Awesome~~~
    2012년이면 2년 남았네요?
    저도 기대해보겠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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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2년 약속이 지켜지는 지부터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직 확실한 게 하나도 없어서요.
    암튼 저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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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스필버그 옹이 언젠가는 해야하지 않을까요?^^
    암만 그래도 본드는 슈퍼 첩보원이죠.
    그러니 정체성을 찾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본드 23이 빨리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참 그리고 이미 아시겠지만...
    본드 주제곡에 대한 흥미로운 사이트가 있군요.
    링크하겠습니다.
    근데 이미 오공본드님은 거기 가보셨을 것 같아요.^^

    http://www.gigwise.com/photos/46997/1/The-Best-&-Worst-James-Bond-Theme-So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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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저도 스필버그는 한 번 해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요,
    한가지 걸리는 게 있다면, 나이 많은 분들이 예전만 못한 것 같더라구요.
    토니 스캇만 보더라도, 예전엔 그의 영화 재밌게 봤는데 요샌...ㅡㅡ;

    본드 주제곡 사이트는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주제곡 순위뽑기를 했군요...^^
    쉬나 이스턴의 'For Your Eyes Only'에 낮은 평가를 줬다는 걸 빼곤 뭐 비슷비슷한 듯 합니다.
    근데 '뷰투어킬'을 1등으로 뽑으면서 '골드핑거'를 2등으로 한 게 좀...ㅋㅋ
    듣기 좋은 본드 주제곡과 영화에 잘 어울리는 본드 주제곡을 저렇게 배치하면 좀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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