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제프리 디버는 어떻게 제임스 본드 소설가가 될 수 있었을까?
디버의 대표작 '본 콜렉터(The Bone Collector)'를 비롯한 링컨 라임(Lincoln Rhyme) 시리즈만 놓고 보면 그와 제임스 본드 시리즈가 서로 매치가 되지 않아 보인다. 제임스 본드는 시리얼 킬러를 쫓는 형사와는 거리가 있는 캐릭터기 때문이다. 제임스 본드에게도 수사관의 면이 있긴 하지만 'Homicide' 쪽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면 이언 플레밍 퍼블리케이션(Ian Fleming Publications)은 제프리 디버에게서 어떠한 가능성을 보고 그에게 시리즈를 맡기기로 결정한 것일까?
제프리 디버가 항상 범죄소설만 쓴 건 아니다. 그가 2004년에 발표한 '가든 오브 비스트(Garden of Beasts)가 그 중 하나다. 정확하게 스파이 소설이라고 하긴 힘들지만 '가든 오브 비스트'는 그쪽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스릴러 소설이다.
'가든 오브 비스트'는 2004년 영국 CWA(Crime Writers Association)가 그 해 출간된 최고의 스릴러에 주는 CWA Ian Fleming Steel Dagger 상을 받았다.
잠깐! 'Ian Fleming'이라고?
그렇다.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탄생시킨 바로 그 이언 플레밍이다. CWA 이언 플레밍 스틸 대거 어워드는 이언 플레밍 퍼블리케이션이 후원하는 상이다.
제프리 디버와 이언 플레밍 퍼블리케이션의 인연은 이렇게 맺어졌다.
따라서, '가든 오브 비스트'는 제프리 디버를 제임스 본드 소설가로 만든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 번 읽어봐야 겠지?
'가든 오브 비스트'는 1936년 하계 올림픽이 열리기 직전의 독일 베를린에 체격이 좋은 독일계 미국인이 도착하면서 시작한다. 그의 이름은 폴 슈맨. 직업은 뉴욕에서 활동하는 프로페셔널 킬러. 그가 베를린으로 향하게 된 이유는 독일의 재무장을 꾀하는 나치 정권의 두뇌인 라인하드 언스트를 암살하기 위해서다. 슈맨은 나치 요인암살에 성공하면 그의 모든 범죄기록을 없애주겠다는 미국 정부의 제의를 수락하고 스포츠 기자로 신분을 위장한 뒤 미국 올림픽 팀과 함께 독일행 배에 오른다.
그런데 라인하드 언스트가 누구냐고?
라인하드 언스트는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이 아니라 디버가 만들어낸 소설상의 캐릭터다. 소설엔 히틀러, 괴벨스, 괴링 등 당시 실존했던 인물들도 다수 등장하지만 라인하드 언스트를 비롯한 메인 캘릭터들과 암살플롯 등은 모두 허구다. 그러므로 '가든 오브 비스트'는 역사적 사실에 허구를 섞은 히스토리컬 픽션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스타트는 그런대로 좋았다. 하지만 주인공 폴 슈맨이 독일에 도착하면서 부터 시간의 흐름을 놓치게 만들었다. 하루 사이에 워낙 많은 일이 생기고, 너무 많은 곳으로 이동하는 바람에 이 모두가 하루에 벌어졌다는 게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소설 중간에 계속해서 '불과 몇 시간 전에...', '불과 하루 전에...'라고 나오긴 했지만, 이 모두가 하루 동안 일어난 일이라는 사실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였을까? 얼마 전 종영한 FOX의 TV 시리즈 '24'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24' 시리즈를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시즌 첫 에피소드부터 마지막까지가 모두 하루 동안에 벌어지는 사건들이다. 하루 24시간동안 벌어지는 사건들을 1시간씩 나눠서 24개의 에피소드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1주에 1회 방송하는 시리즈였기 때문에 몇 회를 보고 나면 시간의 흐름을 잃어버리곤 했다. 몇 주 전에 봤던 에피소드가 드라마상에선 몇 시간 전의 일이라는 게 잘 와닿지 않을 때가 있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이유에서 "몇 시간 전에 이러한 일이 있었다"는 대사를 드라마에 종종 넣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래도 주인공 폴 슈맨을 비롯한 등장 캐릭터들은 모두 휼륭했다. 약간 헐리우드 스타일의 캐릭터들이라서 였는지 개성이 뚜렷했고, 친숙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서로 알게 된 지 불과 몇 시간밖에 되지 않은 사람들이 마치 오랫 동안 알고 지낸 사이처럼 말하고 행동한다는 점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못해도 며칠 동안 서로 알고 지낸 사이처럼 보였지만 소설상에선 불과 몇 시간 동안의 인연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전혀 모르던 외국인 캐릭터가 바람같이 나타나 주인공과 금세 친해진다는 설정은 진지한 스릴러 소설보다 RPG 비디오게임에 가깝게 보였다. 작가도 이 점을 의식했는지 주인공 역시 짧은 시간 동안 금세 친해졌다는 데 놀랐다는 설명을 덧붙이기도 했으나 오히려 더 어색하게 만들기만 했다. 나름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것으로 보였지만, 어색함을 잠시 잊고 있었는데 이 기억을 작가가 굳이 되살려줄 필요는 없었다.
이 모든 문제점들의 원인은 주인공이 독일에 도착해서 암살작전을 준비하는 과정이 사실상 없다시피 하다는데 있다. 만약 주인공이 작전일 보다 1~2주 정도 먼저 베를린에 도착해서 차근차근 준비를 하면서 여러 캐릭터들을 만나게 되는 식으로 줄거리가 전개되었다면 어색함이 덜했을 것이다. 그러나 '가든 오브 비스트'에선 주인공이 작전일 바로 이틀 전에 베를린에 도착해서 서둘러 준비를 해야 하는 바람에 시간 여유가 없었는데, 그 짧은 사이에 여러 가지 사건들이 발생하고, 여러 캐릭터들을 만날 뿐만 아니라 믿음직한 동지가 생기고, 독일 여성과 사랑에까지 빠졌다. 며칠 간에 걸쳐 벌어졌어야 할 일들이 이틀 동안 다 벌어진 것이다.
왜 이렇게 빡빡하게 했을까? 시간에 쫓기는 듯한 기분을 주기 위해서?
하지만 그 작전이 성공적이었는지 모르겠다. '가든 오브 비스트'는 페이지 터너(Page Turner) 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그랬더라면 여러 어색한 부분들을 그냥 지나칠 수 있었을 지 모른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게 만드는 책이었다면 베를린에서의 하루가 너무 길게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란 얘기다. 그러나 '가든 오브 비스트'는 나름 흥미로운 2차대전 발발 직전 독일의 풍경을 제외하곤 특별하다고 할 만한 게 많지 않았다. 독일 수사관이 슈맨 일행의 동선을 따라 추적하며 수사망을 좁혀 오는 파트에선 그런대로 긴박감이 느껴졌지만 자꾸 맥이 끊어지면서 기나긴 하루의 한부분이 되어갔다.
반전? 물론 있었다. 하지만 전혀 놀랍지 않았다. 이런 류의 소설에선 언젠가 한 번쯤은 반전이 있다는 걸 알고있었으므로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뒤집을 지 여러 가능성을 생각해 가면서 읽었기 때문이다.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준비를 하는 버릇이 생기면 반전으로 독자 또는 관객을 감탄시켜보려 하는 소설이나 영화를 좋아하지 않게 된다. '쇼킹한 엔딩'으로 알려진 작품들은 자연스레 피하게 된다. 대부분 감탄할 만 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든 오브 비스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책을 읽으면서 '이것' 아니면 '저것' 둘 중 하나가 뒤집어질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는데 역시 그대로 였다. 그만큼 예측하기 쉬운 것이었다. '차라리 이 부분을 이렇게 했더라면 더욱 재미있어졌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기도 했다.
그렇다고 재미가 없었던 건 아니다. 그런대로 읽을 만은 했다. 300 페이지 미만의 굵고 짧은 스릴러 소설이었다면 더욱 좋았을 것이란 아쉬움이 남았지만, 읽는 내내 따분하진 않았다. 하지만 기대했던 만큼은 아니었다. CWA 이언 플레밍 스틸 대거 어워드까지 받은 데다 제프리 디버가 새로운 제임스 본드 소설 작가가 된 만큼 무언가 대단한 게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읽어 보니 크게 특별할 것이 없는 평범한 스릴러 였다.
그렇다면 곧 발매될 제프리 디버의 제임스 본드 소설 'Carte Blanche'는 어떤 소설이 될까?
일단 제임스 본드를 비롯한 캐릭터들은 모두 흥미진진할 듯 하다. 하지만 400 페이지가 넘는 것으로 알려진 게 약간 걸린다. 긴 소설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길다고 무조건 좋은 게 아니라서다. 디버의 '가든 오브 비스트'를 읽고 나니 더더욱 그러한 생각이 든다. 이언 플레밍이 남긴 제임스 본드 소설들 모두 300 페이지 미만이었다.
현재까지 알려진 'Carte Blanche' 정보에 의하면 '암살자', '짧은 시간' 등 '가든 오브 비스트'와 겹치는 부분이 상당히 많을 것으로 보인다. 주인공과 시대 배경만 바꾼 사실상의 '가든 오브 비스트 2'가 될 수도 있을 듯 하다. '가든 오브 비스트'로 이언 플레밍 상을 받았으니 그 탬플릿을 'Carte Blanche'에서 그대로 사용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가든 오브 비스트'의 장점 뿐만 아니라 단점들까지 고스란히 'Carte Blanche'로 옮겨갔을 수도 있다.
그래도 디버는 바로 이전 제임스 본드 작가 세바스챤 펄크스(Sebastian Faulks)와는 달리 스릴러 작가인 만큼 'Carte Blanche'는 펄크스의 '데블 메이 케어(Devil May Care)'보다는 나은 작품이 될 것으로 기대해도 될 것 같다.
여기서 궁금한 점은, 과연 '얼마나' 나을 것이냐는 것이다.
제프리 디버의 'Carte Blanche'는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오는 5월, 북미지역에서 6월에 발매된다. 그 때가 되면 알게 되겠지?
가든 오브 비스트가 사실 기대를 좀 떨어뜨리긴 했어도, 재미가 없진 않았다고 하니 뚜껑을 열어봐야 하겠네요. ㅎㅎㅎ
답글삭제하루만에 그렇게 많은 일이 좀 말도 안된다고 봐야죠? ㅋㅋ
400페이지 이상 ㅎㅎㅎ
본드 팬인 오공님은 무쟈게 발매가 기다려지겠습니다. ^^
이번에 새로 나오는 소설은 리부팅 성격도 있는 것 같아서 더욱 기대가 됩니다.
답글삭제가든 오브 비스트가 디버를 007 소설가로 만든 작품인 만큼,
두 소설이 약간 비슷할 수도 있겠다 싶거든요.
과연 어떠할지 참 기대됩니다...^^
아~ 저는 디버가 차기 본드 소설을 쓴다기에 링컨 라임과 제임스 본드는 도저히 매치가 안된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런 이유가 있었군요.
답글삭제국내 번역판을 찾아보니 역시 나오지 않았군요.
"까르트 블랑쉬" 정말 기다려집니다.^^
국내 출판업계에서는 본드는 정말 소개가 안되어있습니다.
현존하는 번역판이 "카지노 로얄"인데 이것도 오역 투성이구요. 찰리 힉슨의 영본드 한편이 있구요.
제발 이번에는 "까르트 블랑쉬"도 나와주고 기존의 이언 플레밍 작품도 정식 라이센스로 찰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옛날보다 더 구하기 힘들어진 모양이군요.
답글삭제카지노 로얄, 문레이커, 닥터노, 프롬 러시아... 정도는 한글판으로 있었는데...
존 가드너의 것도 몇 권 한글판으로 나왔었구요.
어지간한 책들은 대부분 한글판으로 나오는 줄 알았는데 007은 예외인 모양이군요.
그래도 영본드는 뜻밖인데요...^^
얼마 전에 보니 치티치티 뱅뱅도 속편이 나온다고 하더군요.
까르트 블랑쉬는 가든 오브 비스트와 비슷한 데가 상당히 많을 것 같은데요,
단점들까지도 그대로 옮겨가는 게 아니냔 걱정이 좀 생깁니다.
저도 한번 읽어보고 싶어서 인터넷에 검색해 봤던니 없네요..^^;;
답글삭제어떤분이신지 잘 몰랐는데 본콜렉터 쓰신분...!!!
007 백지 위임장..!! 기대되네요..^^
본 콜렉터의 제프리 디버가 이번엔 제임스 본드 소설을 발표합니다.
답글삭제바로 이전 007 소설 데블 메이 케어가 기대에 못 미쳤기 때문에 더욱 기대가 됩니다.
디버가 창조한 21세기 본드의 세계가 어떠할 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