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 15일 화요일

'J 에드거', 게이 스토리 빼곤 눈에 띄는 게 없었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를 돌아다니다 보면 'J Edgar Hoover'라는 이름이 붙은 건물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FBI(Federal Bureau of Investigation) HQ다. FBI HQ 건물에 그의 이름이 걸린 이유는 존 에드거 후버가 거의 50년간 FBI 국장을 역임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후버는 FBI의 전신인 Bureau of Investigation에서부터 FBI 창설 이후 72년 사망할 때까지 국장 직을 맡았던 한마디로 FBI의 역사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물론 많은 논란의 중앙에 섰던 인물이기도 하다. 지문검사 등 과학수사의 기초를 닦았으며, 미국 내 공산주의자, 갱스터 등을 비롯한 위험인물들을 제거하는 데 많은 공을 세웠지만, 도-감청 등 불법적인 행위 등으로 비난받기도 했다. 많은 공을 세웠음과 동시에 많은 오점도 남긴 인물이지만 여덟 명의 미국 대통령을 거치며 70세 정년퇴임까지 '면제'받으면서 거의 50년간 FBI 국장을 지낸 인물인 만큼 거물인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을 뿐만 아니라 비밀도 많았던 양반이라 그를 싫어하냐 좋아하냐를 떠나 대단히 흥미로운 인물이라는 점은 누구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존 에드거 후버가 사망한 지 거의 40년이 지난 2011년 11월 그의 전기영화가 미국에서 개봉했다. 레오나도 디카프리오(Leonardo DiCaprio) 주연의 'J 에드거'가 바로 그것이다. 감독은 클린트 이스트우드(Clint Eastwood)가 맡았는데 뜻밖에도 스크린플레이는 '밀크(Milk)'의 스크립트를 썼던 게이 작가 더스틴 랜스 블랙(Dustin Lance Black)이 맡았다.

80대에 접어든 보수 성향의 이스트우드가 30대 후반의 게이 스크린라이터와 존 에드거 후버 영화를 함께 만들었다고?

여기서 'J 에드거'가 어떤 영화인지 바로 냄새가 났다. 후버의 분신과 다름없었던 클라이드 톨슨(Clyde Tolson)과의 동성애 문제를 다루려 한다는 의도가 빤히 보였다. 게이 의혹을 받았던 후버의 생애를 그린 영화를 게이 정치인에 대한 영화 '밀크'로 아카데미상을 받은 게이 작가와 함께 만들었다면 보나마나 뻔한 얘기로 보였다. 그렇다고 후버와 톨슨의 관계만을 파헤친 영화는 아니겠지만 결국엔 게이 문제로 시선을 끌려는 게 뻔해 보였다.

▲에드거 후버(레오나도 디카프리오)와 클라이드 톨슨(아미 해머)
과연 그랬을까?

물론이다.

'J 에드거'도 후버의 업적과 과오, 역사적 사건 등 전기영화로써 갖춰야 할 것들을 모두 갖추긴 했다.  지나칠 정도로 노골적인 후버와 톨슨의 게이 씬도 많지 않았다. 그러나 절대적인 권력을 누렸던 후버의 업적과 과오 부분 등 나머지 파트는 그저 건조하기만 했고, 눈에 자꾸 띄는 것은 사실상 후버와 톨슨의 '아리송한 러브스토리'가 전부였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 머릿 속에 가장 오래 남은 것도 그것이었다. 물론 게이설이 후버 전기영화를 만들면서 지나칠 수 없는 부분이었을 수는 있지만 'J 에드거'는 가장 남는 것이 후버와 톨슨의 러브스토리가 된 조금 이상한 전기영화가 됐다. 후버와 톨슨의 게이 스토리를 빼곤 특별하게 눈에 띄는 게 없었다. 예상했던 대로 다른 것들은 뒤로 밀리고 게이 파트가 가장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영화가 된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흥미진진했을까?

그렇지 않았다.

'J 에드거'가 좋은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와 함께 처음부터 끝까지 크게 흠잡을 데는 없는 영화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밋밋하고 감동과 여운도 거의 없었다. 넘어갈 때는 부드럽고 깔끔했지만 특별한 맛과 향이 없었다.

또한 새로울 것도, 놀라울 것도 없었다. 존 에드거 후버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인물인 데다, 그가 톨슨과의 게이설에 휘말렸다는 점도 알 만한 사람들은 이미 다 아는 얘기였기 때문이다.

그렇다. 게이 이야기도 잘 알려진 이야기다. 이미 수많은 책에서 후버와 톨슨의 관계를 다뤘으며, 이들이 게이였을 것이라고 기록한 전기들도 있을 뿐만 아니라 게이설은 근거가 부족한 루머들일 뿐이라며 이를 부정한 전기들도 있다. 게다가 후버와 톨슨이 실제로 게이였는지 아니었는지는 대단한 관심사도 아니다. 이들이 살아있었을 당시인 4~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어떨지 몰라도 지금 이 문제에 큰 관심을 보일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설령 이들이 실제로 게이였다고 해도 게이커플이 흔해 빠진 요즘 세상엔 '그러거나 말거나'일 뿐이지 대수로운 얘기가 아니다.

그런데도 이스트우드 감독은 게이 스크린라이터까지 기용하면서 후버 전기영화를 게이영화처럼 보이도록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많은 사람들이 후버의 게이설보다 불법 도-감청, 그가 보관했던 극비서류 등에 보다 큰 관심을 갖고 있을 것이므로 그쪽에 포커스를 맞춘 영화가 되었더라면 더욱 흥미진진했을 것 같지만, 이스트우드는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J 에드거'를 러브스토리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80대에 접어든 나도 요즘 사회문제인 동성애를 다룬 영화를 만들 줄 안다"는 것을 억지로라도 보여주려 한 것인지, 이스트우드는 많은 사람들이 후버 전기영화에서 보고싶어 하는 부분들은 형식적으로 넘어가고 흥미가 덜 가는 게이 얘기로 시선을 끌고자 했다. 바로 이것이 'J 에드거'가 흥미진진하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다.

그래도 출연진의 연기는 좋았다. 에드거 후버 역을 맡은 레오나도 디카프리오는 각종 영화제에서 주연상 후보에 오를 것이 분명해 보이는 훌륭한 연기를 보여줬다. 영화를 보기 이전엔 아직도 소년 얼굴을 한 디카프리오를 존 에드거 후버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것 같다는 걱정이 앞섰던 게 사실이지만, 생각보다 후버 역에 잘 어울려 보였다.

하지만 디카프리오의 목소리가 분위기를 깼던 것은 사실이다. 영화가 노인 분장을 한 디카프리오가 과거를 회상하면서 현재와 과거를 수시로 오가는 식으로 전개되었는데, 디카프리오의 목소리가 6~70대 노인의 것으로 들리지 않아 적지 않게 어색했다. 그의 노인 분장은 그런대로 그럴 듯 해 보였으며 연기 또한 훌륭했지만 문제는 음성이었다. 노인은 커녕 마치 10내 소년의 목소리처럼 들리는 그의 나레이션이 영화의 분위기를 흐렸다. 대화 파트에선 디카프리오의 노인 목소리 흉내가 덜 어색했지만 나레이션 파트는 영 아니었다.

더욱 신경에 거슬린 것은 클라이드 톨슨 역을 맡은 아미 해머(Armie Hammer)의 노인 분장이었다. 디카프리오 분장은 제법 리얼해 보였던 반면 클라이드 톨슨의 노인 분장은 처음 보는 순간 '캐리비언의 해적(Pirates of  the Caribbean)' 시리즈 캐릭터 데이비 존스(Davy Jones)를 보는 듯 했다. 처음엔 디카프리오의 노인 분장을 보면서 제법 잘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후에 나타난 노인 버전 클라이드 톨슨의 모습을 본 순간 생각이 싹 바뀔 정도였다.

▲노인 분장을 한 디카프리오(왼쪽)와 해머(오른쪽)
노인 분장은 썩 맘에 들지 않았지만 'J 에드거'는 '그 때 그 시절' 분위기를 비교적 잘 살린 시대물이었다.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마치 6~70년대 기록 영상을 보는 듯한 다소 침침해 보이는 영상이었다. 굳이 그렇게 만들 필요가 있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밝고 깔끔하고 선명한 화질의 최신 영화와는 또다른 맛이 있었다. 이런 식으로 시대물 분위기를 낼 필요는 없을 것 같긴 했어도 나쁘진 않아 보였다.

하지만 영화 자체는 썩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럭저럭 볼 만은 했지만 지극히도 평범한 수준 이상은 아닌 영화였다. 존 에드거 후버가 매우 흥미로운 인물인 만큼 그의 전기영화를 만들기로 한 것은 좋은 아이디어였으나 후버 전기영화로는 만족스럽지 않은 영화였다.

요샌 게이 주제의 영화가 주목을 받고 영화제에서 상도 많이 받은 만큼 클린트 이스트우드도 게이 영화로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은 게이 스크린라이터와 함께 '게이 밴드왜곤'에 올라탄 듯 한데, 과연 이 영화로 많은 상을 받을 수 있을 지 의심스럽다. 상을 받으려고 만든 티가 나는 영화이긴 하지만 실제로 많은 상을 받을 만큼 잘 된 영화는 아닌 것 같다.

그 중에서 수상 가능성이 가장 높은 건 디카프리오가 아닐까 한다. 요즘엔 동성애 씬, 노출 씬 등 쉽지 않은 씬을 촬영하며 연기투혼을 보인 배우들이 종종 연기상을 받곤 하므로 이번엔 게이 연기를 한 디카프리오가 받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불과 몇 년 전엔 미국의 게이 정치인 하비 밀크(Harvey Milk) 바이오픽 '밀크'에서 하비 밀크 역을 맡았던 숀 펜(Sean Penn)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바 있으므로 디카프리오도 '게이 후버'로 노려볼 만 하다. 이런 것을 노리고 만든 영화라는 티가 나는 영화이므로 결과가 그렇게 나오더라도 나쁠 건 없으리라...

댓글 8개 :

  1. 아아... 동림할배 요새 작품이 자꾸 왔다갔다 하시는구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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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이 아저씨의 최근 영화들이 다 별로였던 것 같습니다.
    이번엔 후버라는 유명한 인물과 게이 스토리라는 카드를 꺼냈지만 여전히 별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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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노인 분장...
    증말.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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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퍼블릭 에너미에 나오는 그 국장님 영화인가 보군요..
    디카프리오씨가 어떻게 연기했을지 궁금해 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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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KEN:
    디카프리오까진 넘어갈 수 있었는데 해머의 분장은 정말 보기가 아니 좋았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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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뻘쭘곰:
    퍼블릭 에너미에 나왔던 그 후버 맞습니다.
    디카프리오는 이번에도 똘똘하게 잘 하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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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흠.. 저도 지금 보고 있는데 생각보다 잘 만들었다고 생각되네요.. 나이들어도 주름과 외모는 변하지만 목소리는 정정한 사람들 생각보다 많답니다. 톨슨은 키크고 마른사람이 늙었을때 모습이고 에드거는 작고 단단한 사람이 늙은 모습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뭐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데비존스에 비교할 정도는 아니신듯...
    게이라는 부분이 많이 부각된것은 사실이네요 실로 두사람이 그 오랜시간을 함께한대서 나온 루머?가 아닌가 싶은데... 마지막으로 자료화면으로 나오는 흑백화면들은 영화를 조금더 사실적으로 만들어줘서 개인적으로는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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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전 톨슨이 처음 등장하는 순간 얼굴 분장이 매우 어색하게 보였습니다.
    후버까지는 오케이였는데 톨슨은 가짜 티가 팍 나더라구요.
    목소리는... 디카프리오가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원래 실제 나이보다 어려보이고 목소리도 소년의 것인데 노인 흉내를 냈으니 어색했던 것 같습니다.
    게이 파트는 사실여부를 떠나서 왜 거기에 포인트를 맞췄는지 모르겠습니다.
    제 생각엔 여러모로 영화가 좀 이상하게 된 것 같았습니다.
    캐스팅도 좋았고 연기도 다 좋았는데 어딘가 상당히 어색해 보였습니다.
    저는 금년에 아카데미가 이 영화를 외면한 것이 이해가 가는 편입니다.
    왠지 그렇게 될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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