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5일 일요일

007 시리즈의 블루 프린트로 불리는 '골드핑거'를 극장에서 보다!

007 시리즈의 역사를 논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영화 세 편이 있다. 바로 '닥터 노(Dr. No)', '위기일발/프롬 러시아 위드 러브(From Russia With Love)', 그리고 '골드핑거(Goldfinger)'다. 이유는 간단하다. 1962년 1탄 '닥터 노'로 시작한 007 시리즈는 1963년 2탄 '위기일발'로 젠틀맨 에이전트 제임스 본드를 전세계에 확실하게 알렸으며, 1964년 3탄 '골드핑거'에서 007 포뮬라를 완성했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007 시리즈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영화는 '골드핑거'다. 007 시리즈의 블루 프린트로 불릴 정도로 이후에 제작된 거의 모든 007 시리즈의 기초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골드핑거'에서 완성된 007 포뮬라가 지금까지 계속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골드핑거'에서 완성된 007 포뮬라란 무엇일까?

대표적인 것을 몇 가지 예로 들어보기로 하자.

1. 턱시도 = 007 유니폼

'골드핑거'의 프리-타이틀 씬에 본드(숀 코네리)가 검정색 잠수복을 벗고 흰색 턱시도로 갈아입는(?) 유명한 씬이 나온다. 잠수복 안에 흰색 턱시도를 입고 있다가 볼일을 다 마친 뒤 잠수복을 벗어버리고 턱시도 차림의 젠틀맨으로 변신하는 바로 그 씬이다. 뿐만 아니라 본드는 빨간색 카네이션까지 갖고 있었다! 이 씬을 통해 턱시도가 007의 유니폼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줬다. 



2. 보컬 주제곡과 메인 타이틀

007 시리즈 1탄 '닥터 노'엔 보컬 주제곡이 없었다. 2탄 '위기일발'엔 맷 몬로(Matt Monro)가 부른 주제곡이 있었지만 메인 타이틀 씬에 사용되지 않았다. 007 영화를 건 배럴 → 프리 타이틀 → 메인 타이틀 순으로 시작하는 패턴이 정착한 건 2탄 '위기일발'부터지만 메인 타이틀 씬에 가수가 부른 보컬 주제곡이 사용된 것은 3탄 '골드핑거'가 처음이다. '골드핑거' 이후에 제작된 (거의) 모든 007 시리즈가 이 패턴을 따르고 있다.


3. Q의 실험실과 가젯

007의 무기를 담당하는 Q 또는 메이저 부스로이드는 007 시리즈 1탄 '닥터 노'부터 등장했다. 칼이 튀어나오는 특수장치가 되어있는 일명 '007 가방'으로 불리는 가젯도 2탄 '위기일발'에 먼저 등장한 바 있다.

하지만 Q(데스몬드 류웰린)의 실험실이 영화에 등장한 것은 '골드핑거'가 처음이다.

제임스 본드가 Q의 실험실에서 그가 사용할 여러 가지 가젯과 자동차 등에 대한 브리핑을 받는 씬은 거의 모든 007 시리즈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단골 씬 중 하나다. 바로 이 'Q-Lab 씬'이 1964년작 '골드핑거'에서부터 시작한 것이다.



4. 본드카

007 시리즈에서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제임스 본드가 영화에서 사용하는 자동차다. 일명 '본드카'.

그런데 본드가 사용하는 자동차 중에 평범하지 않은 녀석들이 있다. 예를 들자면, 기관총이 달렸다거나 연막을 뿌린다거나 아니면 이젝터 시트(Ejector Seat)를 이용해 옆좌석에 탄 녀석을 자동차 밖으로 던져버리기도 한다.

그렇다. 바로 그 유명한 아스톤 마틴 DB5(Aston Martin DB5)다.

'골드핑거'에 등장한 아스톤 마틴 DB5는 여러 가지 특수 장치들로 개조된 007 시리즈 첫 번째 본드카다. 스페셜 본드카 1호인 것이다. '나를 사랑한 스파이(The Spy Who Loved Me/1977)'에서 잠수정으로 변신하는 로터스 에스프리(Lotus Esprit), '리빙 데이라이트(The Living Daylights/1987)'에서 미사일을 날리는 아스톤 마틴 볼란테(Volante), '다이 어나더 데이(Die Another Day(Die Another Day/2002)'에서 미사일을 날리는 투명 자동차 아스톤 마틴 뱅퀴시(Vanquish) 등등 모두 '골드핑거'의 아스톤 마틴 DB5를 응용한 것으로 보면 된다.


5. 강한 헨치맨

007 시리즈의 볼거리 중 하나는 매우 강한 헨치맨이다. 역대 007 시리즈 헨치맨 중 가장 유명한 캐릭터는 뭐니뭐니 해도 '골드핑거'에 등장한 오드잡(해롤드 사카타)이다. 하와이에서 태어난 일본계 미국인 프로레슬러 해롤드 사카타(Harold Sakata)가 연기한 오드잡은 기합 소리를 빼곤 대사 한 줄 없었지만 돌처럼 강한 몸, 손으로 골프공을 가루로 만들 정도의 괴력, 블레이드를 넣은 챙이 달린 모자를 무기로 사용하는 것으로 너무나도 유명한 캐릭터다. 제임스 본드도 오드잡과의 맨손 격투에선 상대가 되지 않았다. 오드잡은 처절하게 저항하는 본드를 마치 개똥 굴리듯 다뤘다.

오드잡의 성공 이후 괴력의 헨치맨이 거의 빠지지 않고 007 시리즈에 등장했다. 70년대 로저 무어(Roger Moore)의 시대에 등장했던 강철이빨의 거한 죠스(리처드 킬)도 '골드핑거'의 오드잡을 응용한 것으로 보면 된다.


6. Girls! Girls! Girls!

007 시리즈의 대표적인 볼거리 중 하나가 본드걸이다. 그러나 주/조연급 본드걸만 해당하는 게 아니다. 대사가 거의 또는 아예 없는 엑스트라 본드걸들도 빼놓을 수 없다.

007 시리즈엔 영화의 스토리와 거의 또는 전혀 상관없는 엑스트라 본드걸들이 여럿이서 단체로 한꺼번에 등장하는 씬이 거의 빠지지 않고 나오곤 한다. 본드가 수영장 근처에 가면 수영복 차림의 비키니 걸들이 여럿 등장하고, 본드가 파티에 참석하면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러 명의 패션 모델 본드걸들이 돌아다닌다. 이 전통 역시 '골드핑거'에서부터 시작한 것이다.


이와 같이 '골드핑거'는 "007 영화는 이런 것이다"를 확실하게 보여준 영화다. 몇몇 영화 평론가들은 "골드핑거가 제임스 본드 시리즈라는 새로운 쟝르를 탄생시켰다"고도 한다. 섹시하고 스타일리위한 스파이 어드벤쳐 쟝르를 '골드핑거'가 완성시켰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골드핑거' 만큼 007 시리즈에 큰 영향을 준 영화는 없다. 이후에 나온 007 시리즈 거의 모두 '골드핑거'의 영향을 조금씩이나마 받았으며,  '골드핑거 리믹스'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골드핑거'를 거의 그대로 따라한 영화들도 있다. 007 시리즈에서 가장 자주 눈에 띄는 것이 '골드핑거' 패로디 씬이기도 하다.

바로 이 영화가 다시 극장으로 돌아왔다. 007 시리즈 50주년을 맞아 미국 워싱턴 D.C 근교에 위치한 AFI Silver에서 클래식 007 시리즈를 매주 주말마다 상영해주는 덕분이다.

그렇다. 이번 주말은 '골드핑거'의 차례였다.

007 시리즈의 기념비적인 영화 '골드핑거'를 극장에서 볼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어찌 아니 갈 수 있으리오!

지난 주 '위기일발'을 중간 규모의 2관에서 상영했던 AFI Silver는 이번 주엔 '골드핑거'를 규모가 가장 큰 1관에서 상영했다.


워낙 유명한 제임스 본드영화여서 인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왔다. 400명 가량 수용 가능한 1관을 6~70% 정도 채운 듯 했다.

아들 또는 손자를 데리고 온 가족 단위 관객들도 적지 않게 눈에 띄었다. '골드핑거'를 어릴 적 추억 중 하나로 꼽는 사람들이 많은 만큼 '골드핑거'가 극장에서 처음 개봉했던 지난 60년대에 소년이었던 사람들이 아들과 손자를 데리고 '골드핑거'를 함께 보러 온 것이었다. 한 관객은 같이 온 1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 아이를 손으로 가리키면서 "내가 저녀석 나이였을 때 이 영화를 처음 봤다"고 회상했다.

아버지와 함께 온 한 어린 소년은 '골드핑거'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까지 알고 있을 정도로 만만치 않은 본드팬이었다. 10살도 안 된 것 같았는데 007 시리즈에 대한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 꼬마가 알고 있었던 '골드핑거' 영화 대사가 무엇이냐고?

Bond: Do you expect me to talk?
Goldfinger: No, Mr. Bond. I expect you to DIE!!


'골드핑거'를 극장에서 처음 보면서 60년대 당시 숀 코네리(Sean Connery)가 얼마나 쿨-섹시-터프가이였는지, 대사들이 얼마나 위트있고 유머가 넘치는지, 존 배리(John Barry)의 사운드트랙이 얼마나 휼륭한지 등등 참 여러 가지를 느꼈다. '골드핑거'를 보고 있으니 최근에 제작된 007 시리즈가 얼마나 빈 껍데기 뿐인 영화인지 새삼 알 수 있었다.

아마도 '골드핑거'는 90년대에 들어서부터 알 수 없는 영화를 만들고 있는 007 시리즈 제작진이 다시 한 번 봐야할 영화가 아닌가 싶다. 이들은 다니엘 크레이그(Daniel Craig) 시대에 들어서부턴 원작 스타일로 돌아간다면서 액션에만 올인한 흔해빠진 헐리우드 액션영화를 만들고 있다. 007 시리즈가 언제부터 치고 받고 무작정 갈기기만 하는 액션영화였던가? '골드핑거'를 보면 요즘 007 제작진이 영화를 참 못 만든다는 걸 알 수 있다. 올가을 개봉하는 007 시리즈 23탄 '스카이폴(Skyfall)'에선 제작진이 정신을 차렸기를 바라지만, 트레일러를 보아하니 왠지 이번에도 'HERE-WE-GO-AGAIN'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아무튼 그건 그렇고...

이렇게 해서 AFI Silver 덕분에 극장에서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60년대 클래식 제임스 본드 영화 세 편을 극장에서 봤다.

그러나 나의 '60년대 체험'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다음 주는 '썬더볼(Thunberball)'의 차례니까...

개인적인 바램이지만, AFI Silver가 내친 김에 80년대 영화까지 16편의 클래식 제임스 본드 영화를 모두 상영해줬으면 좋겠다. 90년대 이후의 브로스난-크레이그 영화는 다시 볼 게 없으니 생략하고 1989년작 '라이센스 투 킬(Licence to Kill)'까지를 논스톱으로 상영해줬으면 좋겠다. AFI Silver는 80년대 영화와 스파이 영화 스페셜을 동시에 진행 중인데, 이번 기회에 7080년대 007 시리즈도 전부 상영해줬으면... 치사하게 찔금거리지 말고 기회가 온 김에 티모시 달튼(Timothy Dalton) 영화들까지 죽 가자는 거다.


댓글 2개 :

  1. 개인적으로는 FRWL, OHMSS, CR을 최고로 치지만...
    이건 다이하드 팬들 얘기 같구요.

    일반인들이 보기엔 전형적인 포뮬러의 완성은 아무래도 GF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본드의 모든 클리쉐가 완성되었기에, 훌륭한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블루프린트 정말 적절한 표현입니다.

    그럼 막장 본드 무비의의 블루프린트는 TMWGG과 MR가 되는건가요?^^

    답글삭제
  2. 골드핑거서부터 007 시리즈가 본격적으로 시작했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007 시리즈라고 하면 바로 떠올리는 모든 것들이 골드핑거서부터 시작했으니까요.
    FRWL, OHMSS, CR 등이 최고로 꼽히는 이유도 결국은 골드핑거 때문이라고 봅니다.
    골드핑거가 007 시리즈 블루프린트가 되면서 이후 영화들이 거기에 맞춰 실없는 반복을 거듭한 결과니까요.
    반복을 제대로 하면 좋았겠지만 너무 오버하는 바람에 좀 덜한 영화들이 눈에 더 띄게 된 듯 합니다.

    막장 블루프린트는 아무래도 YOLT가 될 듯 합니다. 너무 오버했죠...^^
    문레이커는 YOLT 패키지구요...^^

    답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