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일 일요일

70년대 최고의 007 영화 '나를 사랑한 스파이'를 극장에서 보다!

숀 코네리(Sean Connery)가 1967년작 '두 번 산다(You Only Live Twice)'를 끝으로 007 시리즈를 떠나자 007 제작진은 1969년작 '여왕폐하의 007(On Her Majesty's Secret Service)'에서 조지 레이전비(George Lazenby)라는 신인에게 제임스 본드 역을 맡겼다. 그러나 레이전비가 '여왕폐하의 007'을 끝으로 007 시리즈를 떠나자 코네리를 1971년작 '다이아몬드는 영원히(Diamonds are Forever)'로 다시 불러왔다. 그러나 코네리마저 이번엔 진짜로 007 시리즈를 떠났다. 그러자 007 제작진은 또다시 새로운 제임스 본드 헌트에 나섰다.

연기 경험이 없었던 레이전비에게 제임스 본드 역을 맡겼다 좋지 않은 경험을 했던 007 제작진은 이번엔 베테랑 배우를 찾아 나섰다. 유나이티드 아티스트(United Artists) 영화사 측은 널리 알려진 미국인 액션배우를 캐스팅하길 원했으며, 실제로 로버트 와그너(Robert Wagner), 클린트 이스트우드(Clint Eastwood) 등 몇몇 미국 배우가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그러나 제임스 본드 역은 역시 영국 배우의 몫이었다.

여러 차례 제임스 본드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스케쥴 등의 문제로 기회를 잡지 못했던 영국 영화배우 로저 무어(Roger Moore)가 드디어 '살인면허'를 발부받았다.


그러나 로저 무어도 스타트가 순탄치 않았다. 숀 코네리의 흔적을 지우고 로저 무어만의 제임스 본드 캐릭터를 재탄생시킨다는 것이 쉬운 미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로저무어의 007 데뷔는 그런대로 무난한 편이었다. 하지만 무어의 첫 번째 제임스 본드 영화였던 1973년작 '죽느냐 사느냐(Live and Let Die)'는 그가 제임스 본드로 발탁되기 이전에 이미 스크립트가 완성되었기 때문에 무어의 개성이 뚜렷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로저 무어 맞춤형'이 아니었던 것이다.

문제는  두 번째 영화인 1974년작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The Man with the Golden Gun)'였다. 007 제작진은 무어의 두 번째 영화에서도 '로저 무어 맞춤형' 제임스 본드 스크립트를 준비하지 못한 것. 로저 무어의 스타일을 의식한 듯 유머를 늘리긴 했지만 제임스 본드 스타일 유머가 아닌 B급 코메디 영화 유머였으며, 영화 자체도 딱 그 수준이었다. 영화 관객들도 무어의 두 번째 영화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에 미지근한 반응을 보였고, 007 시리즈의 미래는 어둡게만 보였다.

설상가상으로, 007 시리즈 공동 프로듀서였던 해리 살츠맨(Harry Saltzman)이 개인적인 재정 문제 등으로 인해 007 시리즈를 떠났다. 프로듀서 알버트 R. 브로콜리(Albert R. Broccoli)와 함께 007 시리즈 1탄부터 9탄까지 함께 했던 파트너 해리 살츠맨이 그가 소유했던 몫인 50%의 007 시리즈를 유나이티드 아티스트 영화사에 넘기고 007 시리즈를 떠난 것이다.

그러나 007 시리즈는 끝나지 않았다. 알버트 R. 브로콜리 혼자서 007 시리즈를 계속 이어가기로 한 것이다.

물론 제임스 본드는 변함없이 로저 무어...

007 제작진은 10탄 '나를 사랑한 스파이(The Spy Who Loved Me)'의 연출을 007 베테랑 가이 해밀튼(Guy Hamilton) 감독에 맡기려 했다. 60년대에 '골드핑거(Goldfinger)'로 명성을 날렸던 해밀튼 감독이 70년대에 들어선 미지근한 제임스 본드 영화를 연달아 내놓았지만 그래도 007 제작진은 007 시리즈를 어느 정도 이해하는 해밀튼에 한 번 더 맏기길 희망했다. 그러나 해밀튼이 '수퍼맨(Superman)' 연출을 맡게 된 것으로 알려지자 007 제작진은 또다른 007 베테랑 루이스 길버트(Louis Gilbert)에게 다이얼을 돌렸다.

(참고: 1978년작 '수퍼맨'의 연출은 리처드 도너(Richard Donner)가 맡았으나 도너로 최종 결정나기 전엔 가이 해밀튼이 맡는 것으로 알려졌었다.)

루이스 길버트는 일본의 화산으로 우주선이 들락거리던 1967년작 '두 번 산다'를 연출했던 영화감독이다.

'나를 사랑한 스파이'의 스토리도 '두 번 산다'의 패턴을 따라갔다. '두 번 산다'에선 스펙터(SPECTRE)가 미국과 소련의 우주선을 납치했다면 '나를 사랑한 스파이'에선 스펙터를 연상시키는 범죄조직이 영국과 소련의 핵잠수함을 납치한다. 납치 방식도 거의 똑같다. '두 번 산다'에선 스펙터의 우주선의 앞부분이 해치처럼 열리면서 다른 우주선을 집어삼키듯 납치했다면 '나를 사랑한 스파이'에선 거대한 유조선의 앞부분이 열리면서 핵잠수함들을 집어삼킨다.

(참고: '나를 사랑한 스파이'에 블로펠드와 스펙터가 등장하지 못한 것은 이들에 대한 소유권을 갖고 있었던 케빈 맥클로리(Kevin McClory) 측이 사용을 불허했기 때문이다. 이 바람에 007 제작진은 스펙터를 사용하지 못하고 그들과 비슷한 또다른 범죄집단을 등장시켰다.)

'두 번 산다'에서 일본의 화산에 숨겨진 비밀기지가 히트였다면 '나를 사랑한 스파이'엔 악당 칼 스트롬버그(커트 여겐스)의 해저기지 '아틀란티스(Atlantis)'와 거대한 유조선 '리파루스(Liparus)'가 있었다.


여기에 '본드카'가 007 시리즈로 돌아왔다. '골드핑거'의 아스톤 마틴 DB5 이후 이렇다 할 '본드카'가 007 시리즈에 등장하지 않다가 아주 오랜만에 온갖 무기와 장치들로 가득한 '본드카'가 돌아온 것이다.

그렇다. 너무나도 유명한 로터스 에스프리(Lotus Esprit)다. 물에 들어가더니 잠수정으로 변신하던 바로 그 차다.


또한 '여왕폐하의 007' 이후 처음으로 스키 체이스 씬도 007 시리즈로 돌아왔다. 프리-타이틀 씬에서 소련 에이전트들에게 쫓기던 제임스 본드가 스키를 탄 채 절벽에서 뛰어내리면서 영국 국기 유니온잭 무늬의 낙하산이 펼쳐지는 씬은 클래식 중 클래식으로 꼽힌다.

(참고: 런던 올림픽 개막식에서 영국 여왕과 제임스 본드가 유니온잭 낙하산을 타고 내린 것도 '나를 사랑한 스파이'의 낙하산 점프 씬 영향을 받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나를 사랑한 스파이'엔 007 시리즈 역대 가장 유명한 헨치맨 중 하나인 죠스(리처드 킬)까지 등장한다. 죠스는 제임스 본드와의 싸움에선 매번 패하면서도 죽음이라는 것을 절대 모르는 강철이빨을 한 거구의 사나이다. 죠스는 '골드핑거'에서 모자를 집어던지던 한국인 보디가드 오드잡(해롤드 사카타)과 함께 007 시리즈의 가장 유명한 헨치맨 1, 2위를 다투는 캐릭터다.


하지만 죠스는 본드에 계속 당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따라오는 코믹 릴리프 임무를 띈 캐릭터이지 '골드핑거'의 오드잡처럼 차갑고 진지한 킬러는 아니다. 

바로 그것이 숀 코네리 시절과 로저 무어 시절의 차이다.

그렇다. 세 번째 영화 '나를 사랑한 스파이'에 와서야 로저 무어의 스타일에 맞춘 영화가 나왔다. 로저 무어의 제임스 본드는 매우 세련되고 부드럽고 유머가 풍부한 캐릭터였고, 여기에 맞춰 화려한 액션 씬과 가젯, 섹시한 본드걸들과 멋진 풍경의 로케이션, 잠수정으로 변신하는 수퍼 '본드카' 등이 어우러지면서 어마어마한 히트작이 완성됐다.

'나를 사랑한 스파이'는 로저 무어의 최고의 제임스 본드 영화로 꼽히는 작품이다.

이와 동시에 '나를 사랑한 스파이'는 70년대에 제작된 007 시리즈 다섯 편 중 가장 잘 된 최고의 작품이다. 전체 007 시리즈에서 순위를 매기면 또다른 얘기가 되겠지만, 70년대 시리즈 중에선 '나를 사랑한 스파이'가 단연 최고다.

물론 문제점도 많이 눈에 띈다. 스케일이 커지고 화려해진 것은 좋지만 제임스 본드 영화가 아니라 코믹북 수퍼히어로 영화에 보다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로저 무어의 본드는 코네리의 본드와 달리 부드러운 면과 거친 면을 모두 갖춘 캐릭터가 아니라 부드러운 쪽으로 지나치게 쏠리면서 피지컬하고 격렬한 모습을 잃었으며, 싱긋 웃으면서 적들을 손쉽게 해치우는 싱거운 캐릭터가 됐다. 여기에 일반인이라면 죽었을 법한 상황에서도 먼지를 툴툴 털면서 다시 일어나는 지나치게 과장된 헨치맨 죠스도 007 시리즈 캐릭터로써는 너무 지나쳐 보였다. 한마디로 '나를 사랑한 스파이'는 이언 플레밍(Ian Fleming)의 원작소설들을 읽은 사람들의 눈엔 터무니 없어 보이는 제임스 본드 영화였다.

하지만 여기서 한가지 잊으면 안 되는 게 있다 - 바로 이런 게 007 시리즈라는 점이다. 이런 스타일이 싫든 좋든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숀 코네리 시절에도 그랬고, 로저 무어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로저 무어 시대로 접어들면서 좀 더 가볍고 너무 오버하기 시작한 게 전부일 뿐 큰 틀에서 보면 차이가 거의 없다. 시리즈 도중에 간간히 원작에 충실한 진지한 톤의 영화들도 있었지만, 이들은 대부분 주연배우가 교체될 즈음에 맞춰 분위기 전환 용으로 시도한 것이지 007 시리즈는 원래 그쪽이 아니라 '나를 사랑한 스파이' 쪽이라고 해야 맞다. 그러므로 '나를 사랑한 스파이'가 너무 지나쳤다면 지나쳤을 수 있어도 아주 잘못된 007 영화는 아니다.

또 한가지 중요한 게 있다 - 당시엔 이런 007 영화가 반드시 필요했다는 점이다.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로 미지근해졌던 제임스 본드의 인기를 되살리는 데 '나를 사랑한 스파이'와 같은 화려한 영화가 왔다였기 때문이다. 그 때 그 상황에 따분하고 진지한 스타일의 제임스 본드 영화를 내놨다면 007 시리즈는 거기서 끝났을 것이다. 당시 제임스 본드는 비아그라가 절실했고, '나를 사랑한 스파이'가 그 역할을 제대로 해냈다.  007 시리즈가 큰 고비를 맞았을 때 제임스 본드를 화려하게 되살려놓았으니까.

바로 이 영화가 미국 워싱턴 D.C 근교에 위치한 메릴랜드 주 실버 스프링의 AFI Silver에서 상영됐다. 007 시리즈 50주년 기념으로 클래식 007 시리즈를 상영 중인 AFI Silver의 아홉 번째이자 마지막 제임스 본드 영화는 올해로 35주년을 맞은 '나를 사랑한 스파이'였다.


'나를 사랑한 스파이'는 이번에 AFI Silver가 상영한 클래식 007 시리즈 중 유일한 로저 무어 주연의 영화다.

하지만 역시 오늘도 관람객 수는 많지 않았다. 지난 주 '다이아몬드는 영원히(Diamonds are Forever)' 때보다 빈자리가 더 늘었다. AFI Silver가 60년대 제임스 본드 클래식을 상영할 때엔 사람들이 제법 많이 왔었는데 70년대로 넘어가자 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나를 사랑한 스파이'는 AFI Silver에서 가장 규모가 큰 1관에서 상영했는데, 오늘은 극장의 절반도 차지 않은 것 같았다.

역시 007 시리즈는 60년대였나 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80년대 영화들도 상영해달라는 요구를 하기가 참 뭣해졌다. AFI Silver는 70년대의 베스트 중 하나로 '나를 사랑한 스파이'를 선택해서 상영한 것인데도 반응이 미지근했는데 80년대 제임스 본드 영화들을 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찾아올지 의심스러웠다. 물론 나처럼 어렸을 적에 80년대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보면서 자란 사람들은 옛 추억 삼아 올지 모르지만...

아무튼 이렇게 해서 AFI Silver의 클래식 제임스 본드 시리즈 상영도 막을 내렸다. 결국 AFI Silver에서 상영한 아홉 편의 클래식 제임스 본드 영화들을 모두 다 가서 봤다. 티켓 값만 해도 100달러가 넘는다. 하지만 돈이 아깝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비디오로, DVD로, 블루레이로, 심지어는 아이폰으로 수도 없이 여러 차례 본 영화들이지만 여러 사람들과 함께 극장에서 빅스크린으로 보는 맛은 역시 달랐다. 게다가 60~70년대 클래식 제임스 본드 영화들은 극장에서 본 적이 없었으므로 더더욱 느낌이 새로웠다.

이렇게 끝나니까 좀 섭섭하기도 하다. 그러니까 내친 김에 80년대 클래식도 좀 상영해줘!!



댓글 2개 :

  1. 70년대 로저 무어 본드 영화의 전형을 확립했단 점에서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커비 브로콜리가 고심 끝에 제작한 작품이라는게 확실하구요.
    정말 로저 무어 다운 본드 영화라고 봅니다.
    개인적으로는 '유어 아이스 온리'가 더 매력적이지만, 로저 무어 스타일에서는 '나를 사랑한 스파이'가 최선의 영화 같습니다.
    거기에 본드 주제가 역사상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멋진 주제곡과 얼마전에 타계한 마빈 햄리시의 스코어.
    이국적인 첫 아프리카 배경.
    그리고 멋진 가젯(로터스 에스프리)과 강렬한 이미지를 심어주는 헨치맨^^
    훌륭한 세트.
    거기에 한없이 나긋나긋 가벼운 본드까지...
    이 정도면 가히 로저 무어 영화의 블루프린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겁니다.

    극히 70년대적인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그 시절에는 정말 이렇게 만드는게 최선이었을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면 모든 것이 한없이 가볍던 디스코 시대였잖아요...^^
    '카지노 로얄'이 2000년대에 최선의 본드로 나와주었던 것처럼, 망해가는 007 시리즈를 살린 영화라고 하면 될까요?

    오늘 모처럼 다시 책장에서 꺼내서 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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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요새로 치면 아이언맨과 같은 패밀리-프렌들리 수퍼히어로 영화였죠...^^
    저도 70년대 제임스 본드 영화는 별로 안 좋아하는 편이지만,
    그래도 나를 사랑한 스파이는 대단했다고 생각합니다.
    로저 무어의 골드핑거라고 생각합니다. 007 포뮬라에 충실하게 만든 영화였죠.
    너무 지나치게 만화책 얘기처럼 된 게 여전히 맘에 들지 않지만,
    남녀노소 모두 무난하게 즐길 수 있는 패밀리-프렌들리 어드벤쳐물론 아주 훌륭했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에도 로터스 에스프리와 죠스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니...
    칼리 사이먼이 부른 주제곡도 물론이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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