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 24일 화요일

英 텔레그래프 "제임스 본드는 글로벌화의 희생자"

007 시리즈에 Q로 출연했던 영국 영화배우 존 클리스(John Cleese)가 최신 007 시리즈를 비판하면서 '본드 아이덴티티' 논란이 다시 시작됐다.

존 클리스는 라디오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007 시리즈가 제이슨 본(Jason Bourne) 시리즈를 따라하려 해서 007 시리즈를 떠나게 됐다면서, 현재의 제임스 본드 영화는 액션을 좋아하는 아시아 지역을 의식해 액션 씬을 불필요하게 길게 만드는 대신 영국식 유머와 조크를 없앴다고 비판했다.

영국 언론인 팀 스탠리(Tim Stanley)도 클리스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는 듯 했다.

팀 스탠리는 그의 텔레그래프 블로그에 "제임스 본드는 글러벌화의 희생자"라고 적었다.

"James Bond is victim of globalisation." - Tim Stanley


그 이유는 간단했다: 제임스 본드는 영국인들에게 긍지를 심어 주는 영국적인 캐릭터였는데 요새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스탠리는 007 제작진이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다른 방향으로 가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는 007 제작진이 비영어권 국가에 다가가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지만, 제이슨 본 시리즈가 큰 돈을 벌어들이는 것을 지켜보면서 시대 유행을 따르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고 적었다. 유니버설이 제이슨 본 시리즈로 짭짤한 재미를 보자 007 제작진도 "나도 한 번 해보자"며 따라한 것으로 보인다는 얘기다.

그러나 스탠리는 007 시리즈를 제이슨 본 시리즈처럼 만드는 것이 제대로 될 수 없기 때문에 재앙적이라고 했다. 왜냐, 007 시리즈는 본 시리즈처럼 실제로 벌어지는 국제 정치 문제처럼 불쾌한 현실을 실감나게 보여주지 않고 여전히 너무 스펙터클하고 바보스럽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분위기가 우중충하고 액션이 거칠어지는 등 얼핏 보기엔 본 시리즈와 비슷해졌지만 여전히 세계와 스토리가 우스꽝스러웠다는 얘기다. 진지하게 볼 만한 묵직한 스파이 스릴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분위기가 어두워지는 바람에 제임스 본드의 익살스러움마저 사라졌다면서, 저속적이고 영국적인 이미지가 사라진 다니엘 크레이그(Daniel Craig)의 제임스 본드는 평범한 여느 액션 히어로와 다를 게 없다고 썼다. '본드 아이덴티티'를 잃었다는 얘기다.

그러면서 스탠리는 다니엘 크레이그의 뒤를 이을 차기 제임스 본드 역을 미국인 배우가 맡을 것을 의심치 않는다고 말했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시대에서 여기까지 왔으니 다음 번엔 제임스 본드도 미국인으로 바뀌지 않겠냐는 것이다.

스탠리는 다음 번 미국인 제임스 본드는 수퍼 바디에 맨키니를 입고 돌아다닐 것이라고 예상했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가 근육을 잔뜩 키우고 수영복 차림으로 돌아다니기 좋아하는 점을 비꼰 것이다.

"Doubtless the next man to play the part will be American, and he’ll take on the world with a super fit body squeezed into a half thong mankini." - Tim Stanley

스탠리가 말한 'Half thong mankini'가 어떻게 생긴 건가 링크를 따라갔더니...



하지만 여성 프로듀서 바바라 브로콜리(Barbara Broccoli)는 빤스만 걸친 핸썸한 남자 배우가 돌아다니는 걸 보는 재미에 007 시리즈를 제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본드팬들은 제임스 본드보다 본드걸에 더 관심이 많지만, 다니엘 크레이그의 시대에 와선 영화에 등장한 가장 섹시한 캐릭터가 본드걸이 아닌 제임스 본드가 되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스카이폴(Skyfall)'부터 007 시리즈 스크린플레이를 맡은 스크린라이터가 게이이므로 제임스 본드가 영화에서 저런 차림으로 등장하지 말란 법이 없어 보인다. '스카이폴'에서 본드걸의 비중이 크게 줄고 그 대신 쓸데 없는 본드와 실바의 게이 씬이 등장한 것만 보더라도 007 시리즈가 어디로 가는지 보인다.

아무튼, 팀 스탠리의 주장에 일리가 있어 보인다. 제임스 본드는 단지 'Globalization' 뿐만 아니라 'Political Correctness' 등 여러 가지로 인해 정체가 불분명한 캐릭터가 됐다. 과거엔 '제임스 본드'라고 하면 다른 액션 히어로들과 차별화되는 독특한 개성이 있는 캐릭터로 보였으나, 요즘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는 이름만 제임스 본드일 뿐인 정체불명의 캐릭터로 보이는 게 사실이기도 하다. 007 제작진은 표절시비 등으로 법정싸움을 할 때에만 제임스 본드와 007 시리즈의 특징을 목에 핏줄 세우며 강조하지만, 정작 제임스 본드 영화를 제작할 때엔 다른 헐리우드 인기 영화들을 베끼면서 007 시리즈 영화처럼 보이지 않게 만들려 노력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제임스 본드를 맡은 영화배우가 교체될 때마다 007 제작진이 약간씩 변화를 줘왔다는 점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에 와서 유독 이질감이 크게 드는 이유는 007 제작진이 이번에 너무 많이 나갔기 때문이다. 007 제작진이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로 무엇을 하려는지는 알 것 같은데, 그들이 제대로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험상궂은 표정의 제임스 본드가 주먹질을 하며 뛰어다닌다고 리얼한 스파이 영화가 되는 것이  아니다. 싱글거리면서 비현실적인 가젯을 이용해 위기를 빠져나가던 과거의 제임스 본드와 비교한다면 사실적으로 변했다고 해야겠지만, 그렇다고 '리얼한 스파이 영화'가 된 것은 아니다. '리얼한 스파이 영화'를 만들려면 당연히 그에 어울리는 스토리가 필요하다. 스토리 없인 시늉만 낼 수 있을 뿐 그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이 문제는 여기서 이미 여러 차례 지적했던 것인데, 팀 스탠리도 어설프게 제이슨 본 시리즈 흉내만 내는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 영화가 '재앙적'이라고 했다. 흉내낼 것이면 똑바로 하라는 얘기다.

이미 누차 강조했지만, '카지노 로얄(Casino Royale)'은 여기서 제외된다. 물론 '카지노 로얄'도 리얼한 스파이 스토리와는 거리가 있지만, 이언 플레밍(Ian Fleming)의 원작소설을 기초로 한 만큼 '본드 아이덴티티'를 훼손시킨 영화로 볼 수 없다. 유머가 줄고 가젯이 사라졌으며 과거보다 거칠고 격렬해지는 변화가 있었지만, 이 정도는 다니엘 크레이그로 교체된 새로운 제임스 본드 세계에 예견되었던 변화였으므로 이것까지 문제삼을 수는 없다.

문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콴텀 오브 솔래스(Quantum of Solace)'와 미국 코믹북 수퍼히어로를 베낀 '스카이폴'이다. 007 제작진은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잘 모르거나 관심이 없었던 전세계 영화관객들을 007 시리즈로 끌어모으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듯 한데, 지금은 그들의 입맛에 맞춰주면서 재미를 좀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제임스 본드는 이러이러한 캐릭터다"라고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는 개성과 특징을 계속 잃어가면서 언제까지 버틸 수 있겠는지 의심스럽다.

그렇다고 '본드24'에서 상당한 변화를 기대하지 않는다. 이제 와서 크게 달라질 수도 없다. 존 클리스가 유머가 부족하다는 점을 비판했지만, 다니엘 크레이그를 중심으로 꾸려진 주요 고정 출연진을 보면 거의 전부가 굳은 표정의 진지한 얼굴들이라서 유머를 집어넣을 데가 마땅치 않아 보인다. 그래도 억지로 넣을 수는 있겠지만, 되레 어색해 보일 수 있다. 007 시리즈에서 웃음을 선사하던 캐릭터는 전통적으로 할아버지 캐릭터 Q였는데, '스카이폴'에서 Q가 너무 젊어지는 바람에 엉거주춤해졌다. 젊어지는 김에 차라리 Q를 여자 캐릭터로 설정했더라면 코믹한 씬을 집어넣기가 좀 더 수월했을 듯 하지만 지금의 벤 위샤(Ben Whishaw)로는 아직 미래가 잘 보이지 않는다. 스토리 부분은 좀 더 신경쓸 필요가 있어 보이지만, 007 시리즈가 전통적으로 줄거리가 강한 영화 시리즈가 아니므로 이번에도 별 신경을 쓰지 않을 듯 하다. "이번 영화도 리얼하고 격렬하고 어쩌고..." 하다가도 스토리가 부실하다고 하면 생긋 웃으면서 "그래도 여전히 007 시리즈잖아...^^" 하고 넘어가면 그만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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