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31일 금요일

만약 쟈니 리 밀러가 007 시리즈의 새로운 Q로 캐스팅되었다면?

007 시리즈에서 가장 중요한 캐릭터 중 하나는 Q다. Q는 제임스 본드에게 다양한 무기와 가젯 등을 제공하는 병참 담당으로 거의 모든 제임스 본드 영화에 등장했다. 007 시리즈 1탄 '닥터 노(Dr. No / 1962)'부터 40주년 기념작이던 20탄 '다이 어나더 데이(Die Another Day / 2002)'까지 20편의 007 시리즈에 Q가 등장하지 않은 영화는 8탄 '죽느냐 사느냐(Live and Let Die)' 하나 뿐이다. '죽느냐 사느냐'에서도 Q가 본드(로저 무어)에게 가젯을 제공하지만 Q가 직접 등장하지 않고 미스 머니페니(로이스 맥스웰)를 통해 전달한다.

Q로 가장 유명한 배우는 데스몬드 류웰린(Desmond Llewelyn)이다. 류웰린은 1963년 007 시리즈 2탄 '위기일발/프롬 러시아 위드 러브(From Russia with Love)'부터 1999년 19탄 '더 월드 이스 낫 이너프(The World is not Enough)'까지 17개의 제임스 본드 영화에 Q로 출연했다. 그의 총 출연작 수가 18개가 아닌 17개인 이유는 1973년작 '죽느냐 사느냐'에 출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류웰린이 Q로 출연하는 동안 제임스 본드는 숀 코네리(Sean Connery), 조지 레이전비(George Lazenby), 로저 무어(Roger Moore), 티모시 달튼(Timothy Dalton), 피어스 브로스난(Pierce Brosnan)으로 얼굴이 다섯 차례 바뀌었다. 시대의 흐름과 주연배우의 교체를 겪으면서 Q의 역할과 가젯의 비중 등에 크고 작은 변화가 오기도 했지만 병참 담당 캐릭터 Q는 007 시리즈 1탄부터 20탄까지 매번 빠짐없이 등장했다. 1탄 '닥터 노'에선 병참 담당 캐릭터가 Q라 불리지 않았지만 사실상 Q와 다름없는 인물이며, 8탄 '죽느냐 사느냐'엔 Q가 직접 등장하진 않았으나 머니페니가 Q를 언급하는 씬이 있었으므로 1탄부터 20탄까지 전체에 Q가 등장했다고 해도 완전히 틀렸다고 하기 어렵다.

그런데 다니엘 크레이그(Daniel Craig)로 여섯 번째로 제임스 본드가 교체되면서 Q가 007 시리즈에서 자취를 감췄다. 지난 '죽느냐 사느냐'처럼 007 시리즈의 세계에 여전히 존재하는 캐릭터지만 영화에 등장하지만 않았던 정도가 아니라 존재 여부에 물음표가 붙었다. 크레이그의 첫 번째 제임스 본드 영화 '카지노 로얄(Casino Royale)'과 두  번째 영화 '콴텀 오브 솔래스(Quantum of Solace)'엔 Q가 등장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007 시리즈에 빠짐없이 등장했던 Q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 영화에서 자취를 감췄던 Q가 크레이그의 세 번째 제임스 본드 영화 '스카이폴(Skyfall)'로 돌아왔다.

그런데 '스카이폴'로 돌아온 Q는 과거의 Q와 큰 차이점이 있었다.

과거의 Q는 고령의 데스몬드 류웰린이 오랫동안 Q 역으로 출연한 덕분에 할아버지 캐릭터라는 인상이 강했다. 제임스 본드가 어린 소년이라면 Q는 어린 소년에게 신기한 선물을 가져다주는 산타 클로스와 같은 캐릭터였다.

그러나 '스카이폴'로 돌아온 새로운 Q는 아주 젊었다. 007 제작진은 새로운 Q로 30대 초반의 젊은 영화배우 벤 위샤(Ben Whishaw)를 선택했다.

사실 007 제작진이 이러한 변화를 줄 것으로 예상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데스몬드 류웰린이 007 시리즈를 떠난 이후 그를 대신할 비슷비슷한 이미지의 노인 배우를 캐스팅하는 건 과히 좋은 아이디어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브로스난 시대 말기에 존 클리스(John Cleese)가 류웰린의 뒤를 이어 새로운 Q를 잠시 맡은 바 있지만 류웰린의 기억을 지우며 그만의 개성있는 Q 캐릭터를 창조하는 데 실패하면서 앞으로 큰 변화가 불가피해 보였다. 따라서 제작진이 '스카이폴'에서 Q를 젊은 캐릭터로 변화를 준 건 크게 놀라운 사실은 아니었다.

하지만 '배우 선택'에 물음표가 붙었다.

산타 클로스 이미지던 Q를 젊은 컴퓨터 전문가 캐릭터로 변화를 준 것까지는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지만 벤 위샤는 뜻밖의 초이스였다. Q를 'NERDY-LOOKING-SMARTASS'로 묘사하고자 한 것까진 이해할 수 있지만, 벤 위샤가 '스카이폴'에서 새로운 Q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벤 위샤의 Q는 재치있는 위트와 유머감각이 풍부해 보이지도 않았고 굉장히 똑똑하지만 다소 괴짜인 컴퓨터 박사 타잎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벤 위샤 버전 Q는 그저 평범한 직원 이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Q가 아니라 Q 섹션에서 근무하는 직원 중 하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약 나더러 선택을 하라고 했다면 젊은 Q보다 여성 Q를 택했을 것이다.

만약 젊은 컴퓨터 박사 타잎 쪽으로 간다면?

'닥터 후(Doctor Who)'의 데이빗 테넌트(David Tennant)가 우선 떠오른다. 곧 개봉할 스티븐 호킹(Steven Hawking) 바이오픽 'The Theory of Everything'에 출연한 에디 레드메인(Eddie Redmayne)도 괜찮아 보인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쟈니 리 밀러(Jonny Lee Miller)를 빼놓을 수 없다.

미국 CBS의 범죄 드라마 '엘리먼트리(Elementary)'에 셜록 홈즈 역으로 출연 중인 영국 영화배우 쟈니 리 밀러는 약간 괴짜 기질이 있는 유머러스한 Q 역으로 아주 잘 어울릴 듯 하다.

실제로, 쟈니 리 밀러는 90년대 영화 '해커(Hackers)'에서 컴퓨터 천재 해커 역을 맡은 바 있다.

▲90년대 영화 '해커'에서의 밀러(좌)와 CBS '엘리멘트리'에서의 밀러(우)
 물론 컴퓨터 천재 역에 쟈니 리 밀러보다 훨씬 잘 어울리는 배우들은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쟈니 리 밀러를 007 시리즈의 Q로 원하는 또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쟈니 리 밀러의 외할아버지가 버나드 리(Bernard Lee)라는 사실.

버나드 리는 007 시리즈 1탄부터 11탄까지 11개의 제임스 본드 시리즈에 본드의 상관 M 역으로 출연했던 영국 영화배우다. 버나드 리는 지금까지 007 시리즈 최고의 M으로 불리고 있다.


버나드 리의 딸이 낳은 외손자가 바로 쟈니 리 밀러다.

영국 신문 텔레그래프의 지난 인터뷰 기사에 따르면 쟈니 리 밀러가 여덟 살 때 버나드 리가 세상을 떠난 바람에 외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많지 않다고 한다.

"Miller’s grand­father was Bernard Lee, who played M in 11 of the Bond films, though he describes his memories of him as 'foggy’, as he died when Miller was eight." - Telegraph


그렇다. 쟈니 리 밀러는 007 시리즈 패밀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영화배우다.

쟈니 리 밀러가 007 시리즈 최고의 M으로 불리는 버나드 리의 외손자인 데다 직업이 영화배우라면 기회가 닿는대로 그를 007 시리즈에 출연시키는 게 좋지 않을까?

쟈니 리 밀러는 차기 제임스 본드 후보감은 아니다. M을 맡기엔 아직 나이가 젊으며 현재 훌륭한 영화배우인 랄프 파인즈(Ralph Fiennes)가 새로운 M이 되었으므로 M의 자리는 크게 걱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현재 그에게 가장 적합해 보이는 자리는 Q다.

만약 쟈니 리 밀러가 Q를 맡는다면 개성있고 유머가 풍부한 괴짜 천재 역에 아주 잘 어울릴 듯 하다. CBS의 TV 시리즈 '엘리멘트리'에서 보여준 것처럼 때로는 엉뚱하고 괴짜처럼 보이는 젊은 Q를 연기한다면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의 제임스 본드 시리즈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로 지목되는 유머의 부재도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어 보인다.

이전부터 계속 지적해 온 것이지만, 다니엘 크레이그는 로저 무어가 아니므로 크레이그에 코믹 연기를 억지로 요구할 것이 아니라 그의 주변 캐릭터들이 코믹 릴피프 역할을 맡아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스카이폴'에서 완성된 M의 새로운 오피스 멤버들을 보면 코믹 릴리프 역할을 효과적으로 맡아줄 만한 인물이 눈에 띄지 않는다. 머니페니 역의 나오미 해리스(Naomie Harris)에게 어느 정도 기대를 해봤으나 '스카이폴'에서 그녀가 맡은 머니페니는 유머와는 거리가 먼 여전사 타잎 머니페니였다. 물론 '본드24'에선 다소 달라질 수 있지만 나오미 해리스 버전 머니페니가 총을 들고 시작했기 때문에 그녀에게 코믹 릴리프 역할을 기대할 수 있겠는지 의심스럽다.

화살은 다시 벤 위샤의 Q로 돌아간다.


Q를 젊은 컴퓨터 천재 캐릭터로 설정한다는 아이디어가 썩 맘에 들진 않아도 산타 클로스 할아버지보다는 현실적으로 보인다는 점은 인정한다. 단지 그것 하나 때문에 Q를 젊은 캐릭터로 바꾼 건 아니겠지만, 어찌됐든 변화가 불가피했으므로 이해하고 넘어갈 수는 있다. 그러나 벤 위샤가 21세기 버전 Q를 효과적으로 연기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최근 들어 007 제작진이 연구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007 시리즈를 과거와 달리 색다르게 보이도록 할 수 있는가 하나 뿐이다. 그러므로 할아버지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있던 Q 캐릭터를 '스카이폴'에서 청소년처럼 보이는 젊은 벤 위샤로 교체하면서 원하던 바를 한가지 달성했다고 본다. 007 시리즈 제작진이 원하는 건 어처구니 없게도 이런 식의 변화가 전부다. 하지만 그런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게 문제다. 물론 앞으로 좀 더 지켜볼 일이긴 하지만, 현재로썬 벤 위샤가 기억에 남을 만한 007 시리즈 캐릭터가 될 것으로 기대되지 않는다. 앞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물론 열려있지만 "과거의 할아버지 Q와 다르다"는 한가지를 빼곤 뚜렷한 특징이 없는 M의 오피스 직원 중 하나에 그칠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물론 Q가 비중이 대단히 큰 캐릭터는 아니다. 등장 시간도 짧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본드팬들이 Q에 높은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데스몬드 류웰린의 Q가 오랫동안 본드팬들로부터 사랑받는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잠시 1989년으로 되돌아가보자.

티모시 달튼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제임스 본드 영화 '라이센스 투 킬(Licence to Kill)'은 1989년 개봉했을 당시 "헐리우드의 범죄 영화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는 혹평과 함께 흥행에도 실패했다. 영화 자체는 아주 잘 만든 007 시리즈 중 하나였지만 수십년간 반복되던 007 시리즈의 패턴에서 벗어나 본드(티모시 달튼)가 정보부의 복귀 명령을 무시한채 홀로 복수에 나선다는 색다른 플롯을 시도하면서 비판을 면치 못했던 것이다. 요새 나온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의 제임스 본드 영화에 비하면 '라이센스 투 킬'은 여전히 전통적인 007 포뮬라를 따른 영화처럼 보이지만, 1989년 당시엔 "제임스 본드 영화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비판과 함께 흥행에도 실패했다.

'라이센스 투 킬'을 좋아하는가 싫어하는가의 문제를 떠나서 '라이센스 투 킬'이 전형적인 007 시리즈와 달라 보였던 것만은 사실이다. 달튼의 첫 번째 영화 '리빙 데이라이트(The Living Daylights)'와도 분명히 차이가 났다. 그게 싫었든 좋았든 간에 전형적인 007 시리즈와 거리가 있어 보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아주 낯익은 캐릭터가 하나 나타나자 영화내내 조용하던 객석에서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예상하지 못했던 Q가 나타나자 본드는 위험하니 돌아가라고 한다. 그러나 Q는 "Q 브랜치가 아니었더라면 너는 오래 전에 죽었을 것"이라고 맞받아치며 돌아갈 의사가 없음을 밝히면서 본드를 돕기위해 몰래 가져온 가젯들을 꺼내놓는다.

Q가 등장하자 마자 '라이센스 투 킬'이 많이 달라 보여도 여전히 제임스 본드 영화라는 사실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007 시리즈의 낯익은 캐릭터 Q가 등장하면서 색다른 제임스 본드 영화 '라이센스 투 킬'을 보며 방향을 잃고 다소 혼란스러워 하던 관객들을 다시 007 시리즈 쪽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지금 현재 다니엘 크레이그의 007 시리즈에 이와 같은 역할을 맡을 만한 캐릭터가 있는가?

없다.

얼굴을 보자마자 바로 "아, 007 시리즈구나"라는 생각이 바로 들게 하는 배우나 캐릭터가 없다.

벤 위샤 버전 Q가 그러한 캐릭터로 성장할 수 있을까?

별로 기대되지 않는다.

그러나 쟈니 리 밀러라면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버나드 리의 외손자라는 사실을 본드팬들이 잘 알고 있는 데다 밀러가 코믹한 괴짜 캐릭터 역에도 잘 어울리므로 개성이 강한 색깔있는 Q를 탄생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하지만 당분간은 벤 위샤 버전 Q에 묶여있을 듯 하다. '스카이폴'을 마지막으로 벤 위샤가 007 시리즈를 일찍 떠날 것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벤 위샤가 썩 만족스러운 초이스가 아니더라도 앞으로 차차 나아지기를 기대하는 방법밖에 없는 듯 하다. 물론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만약 007 제작진이 Q를 다른 배우로 교체한다면 환영할 준비가 돼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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