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6일 화요일

'007 스펙터': 너무 많은 클래식 007 시리즈 오마쥬 도움 안 된다

007 시리즈 40주년 기념작 '다이 어나더 데이(Die Another Day)'와 50주년 기념작 '스카이폴(Skyfall)'의 공통점은 클래식 007 시리즈의 오마쥬로 가득했다는 점이다. '다이 어나더 데이'와 '스카이폴'은 거의 모든 씬이 과거 클래식 007 시리즈의 장면들을 다시 보는 듯 했을 정도였다. 이는 제작진이 007 시리즈 40주년과 5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팬 서비스 용으로 의도적으로 집어넣은 것이므로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다소 바보스럽게 보일 때도 있었지만 크게 신경에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007 제작진은 2015년 11월 개봉 예정인 007 시리즈 24탄 '스펙터(SPECTRE)'도 그런 식으로 만들 계획인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 소니 픽쳐스 해킹 사건으로 유출된 '007 스펙터' 관련 자료들을 살펴보니 007 제작진이 이번 영화에서도 클래식 007 시리즈 오마쥬로 가득 채울 구상을 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본드팬들을 겨냥한 서비스로 보인다. 다니엘 크레이그(Daniel Craig) 이전의 클래식 007 시리즈를 본 적이 없는 꼬마들이나 007 시리즈에 대한 관심과 지식이 낮은 일반 관객들은 오마쥬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클래식 007 시리즈 오마쥬라는 사실을 한 번에 알아챌 만한 레벨에 오른 본드팬들을 위한 서비스이며, 이렇게 해서 클래식 007 시리즈의 향수를 되살리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하지만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영화를 만드는 것이 현명한 아이디어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다이 어나더 데이'와 '스카이폴'은 각각 007 시리즈 40주년과 50주년을 기념하는 영화였으므로 클래식 007 시리즈 오마쥬가 자주 나오는 것이 크게 신경에 거슬리지 않았다. 그러나 2015년 11월 개봉하는 '007 스펙터'는 특별히 기념할 게 없는 영화다. 50주년은 이미 지났으며 60주년이 오려면 아직 몇 해가 더 남았다.

또한, 2015년은 007 시리즈 역사에서 특별히 기념할 게 없는 해다. 굳이 찾아보자면 숀 코네리(Sean Connery) 주연의 1965년작 '썬더볼(Thunderball)'이 50주년을 맞는 해이고, 로저 무어(Roger Moore) 주연의 1985년작 '뷰투어킬(A View to a Kill)'은 30주년, 피어스 브로스난(Pierce Brosnan) 주연의 1995년작 '골든아이(GoldenEye)'는 20주년을 맞는 해라는 정도가 전부다. 하지만 007 시리즈가 기념일만 찾아다니는 '애니버서리 시리즈'가 아니므로 007 제작진이 모든 '애니버서리'를 챙겨서 영화 제작에 반영할 필요는 없다. 모든 제임스 본드 영화의 기념일을 챙기는 일은 팬들의 몫이지 제작진이 할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007 스펙터'는 클래식 007 시리즈 오마쥬로 가득한 영화가 될 전망이다. '007 스펙터'는 특별히 기념할 게 없는 영화인데도 40주년, 50주년 기념작 못지 않게 클래식 007 시리즈 오마쥬가 많이 포함된 것으로 드러났다.

물론 과거의 007 시리즈 중에도 서로 비슷비슷한 영화들이 많았던 건 사실이다. 007 시리즈가 클래식 제임스 본드 영화를 스스로 패로디 하는 영화 시리즈로 유명한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007 시리즈가 '007 포뮬라'라 불리는 틀에 박힌 세팅에 맞춰 비슷비슷한 영화를 계속 반복해서 제작한다는 의미지 모든 007 시리즈가 '다이 어나더 데이'나 '스카이폴'처럼 대놓고 클래식 007 시리즈를 연상케 하는 오마쥬 씬으로 가득하다는 게 아니다. 그런 씬이 가끔 눈에 띄는 영화도 있긴 하지만, '다이 어나더 데이', '스카이폴'처럼 노골적으로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클래식 007 시리즈 오마쥬로 채워진 영화는 없다. '다이 어나더 데이'와 '스카이폴'은 각각 40주년과 50주년 기념작인 만큼 클래식 007 시리즈 오마쥬가 대량으로 포함된 '예외'의 경우지 모든 제임스 본드 영화가 다 그런 게 아니다.

그러나 2015년 11월 개봉 예정인 007 시리즈 24탄 '007 스펙터'의 스크립트 내용을 훑어보니 007 시리즈 50주년 기념작이었던 '스카이폴'과 별반 차이가 나지 않아 보일 정도로 클래식 007 시리즈 오마쥬가 자주 눈에 띄었다.

《스포일러 경고》

소니 픽쳐스 해킹으로 드러난 '007 스펙터'의 줄거리와 캐릭터 등 메이저급 스포일러가 나오므로 2015년 11월 개봉할 때까지 스포일러 없이 기다리고 싶은 사람들은 여기까지만 읽고 돌아가도록. 


《스포일러 경고》

소니 픽쳐스 해킹으로 드러난 '007 스펙터'의 줄거리와 캐릭터 등 메이저급 스포일러가 나오므로 2015년 11월 개봉할 때까지 스포일러 없이 기다리고 싶은 사람들은 여기까지만 읽고 돌아가도록. 

※ 파이널 완성 버전 스크립트에선 약간 다르게 변화를 줬거나 해당 씬이 완전히 생략됐을 가능성 등이 열려있으므로 완성된 영화와 100% 일치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우선 먼저 밝혀둔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2015년 개봉 50주년이 되는 '썬더볼'의 오마쥬였다. '007 스펙터'의 멕시코 시티 씬에 나오는 '죽음의 날(Day of the Death)'이라 불리는 행사 씬은 '썬더볼'에 나온 정카누 퍼레이드(Junkanoo Parade)와 겹쳐졌다.

▲'썬더볼'의 정카누 퍼레이드 씬
'007 스펙터'에 등장하는 '흰색 수트에 검은 색 마스크를 한 사나이'는 '썬더볼'의 메인 악당이었던 에밀리오 라고(아돌포 첼리)를 연상시켰다. '007 스펙터'에 등장하는 흰색 수트의 사나이는 이탈리아인인 것으로 알려졌는데, '썬더볼'에서 에밀리오 라고 역을 맡았던 영화배우 아돌포 첼리(Adolfo Celi)도 이탈리안이었다. 또한, 흰색 수트의 사나이가 범죄조직 스펙터(SPECTRE)를 상징하는 반지를 낀 것으로 나오는데, '썬더볼'의 에밀리오 라고 역시 흰색 수트에 스펙터 반지를 착용한 바 있다. 흰색 수트의 사나이가 착용한 검정색 마스크는 '썬더볼'의 에밀리오 라고가 착용한 검정색 안대를 연상케 한다.

▲'썬더볼'의 에밀리오 라고. 흰색 수트와 검정색 안대, 스펙터 반지가 모두 보인다.
이 정도까진 크게 문제될 게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건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는 것.

멕시코 시티 씬에서만 '썬더볼' 뿐만 아니라 '카지노 로얄(Casino Royale)', '스카이폴(Skyfall)' 등 여러 다른 제임스 본드 영화들을 연상케 하는 씬들이 등장했다. 50주년을 맞이한 '썬더볼'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썬더볼' 오마쥬 몇 가지를 집어넣은 것까지는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007 스펙터'도 지난 '스카이폴'처럼 클래식 007 시리즈 오마쥬를 짜깁기 하는 식으로 만들려는 007 제작진의 의도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대충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경비행기의 날개가 절단되는 씬은 로저 무어 주연의 1973년 영화 '죽느냐 사느냐(Live and Let Die)'를 연상케 했고, 본드의 집을 찾아온 머니페니가 본드의 애인(?)을 만나는 씬도 '죽느냐 사느냐'와 비슷했다.

▲'죽느냐 사느냐'의 경비행기 씬

▲'죽느냐 사느냐'의 본드의 집 씬

납치된 본드걸이 자동차의 뒷 유리창을 통해 뒤따라오는 본드를 바라보는 씬은 피어스 브로스난 주연의 1995년 영화 '골든아이'의 탱크 추격 씬을 떠올리게 했으며, 열차에서 벌어지는 씬은 로저 무어 주연의 1977년작 '나를 사랑한 스파이(The Spy Who Loved Me)'와 비슷했다.

▲'골든아이'의 탱크 추격 씬

▲'나를 사랑한 스파이'의 열차 씬

본드가 스펙터의 모임에 참석하는 씬은 다니엘 크레이그의 2008년 영화 '콴텀 오브 솔래스(Quantum of Solace)'의 오스트리아 오픈 에어 시어터 씬을 연상시켰으며, 본드가 프란츠 오버하우서(크리스토프 발츠)를 만나 식사를 하는 씬은 1962년작 '닥터 노(Dr. No)'와 1974년작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The Man with the Golden Gun)'를 섞어놓은 듯 했다.

▲'콴텀 오브 솔래스'의 오페라 씬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의 식사 씬

또한, 런던 씬 등 영국을 배경으로 한 씬은 '어게인 스카이폴'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스카이폴'과 비슷한 데가 많았으며, '007 스펙터' 스크립트 초안엔 '스카이폴'과 '유어 아이스 온리(For Your Eyes Only)'의 한 장면을 거의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씬들도 있었으나 이는 나중에 빠진 것으로 전해졌다.

이밖에도 꼼꼼하게 찾아보면 '여왕폐하의 007(On Her Majesty's Secret Service)'에 나왔던 "WE HAVE ALL THE TIME IN THE WORLD"라는 대사가 다시 나오는 점, 본드걸들이 지난 007 시리즈에 등장했던 본드걸들과 상당히 비슷한 캐릭터라는 점 등 클래식 007 시리즈 오마쥬를 추가로 더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정도라면 '007 스펙터'에 클래식 007 시리즈 오마쥬가 얼마나 자주 나오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007 제작진이 왜 '스펙터'를 이런 식으로 만들기로 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최근에 제작된 007 시리즈에 불만이 많은 하드코어 본드팬들을 낯익은 클래식 007 시리즈 오마쥬로 달래보려는 의도가 깔린 듯 하지만, 왠지 괜찮은 아이디어가 아닌 듯 하다. 낯익은 클래식 007 시리즈 오마쥬로 '007 스펙터'가 보다 더 클래식 007 시리즈 쪽에 가까워진 것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착시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드코어 본드팬들이 이런 술수에 쉽게 넘어갈 것으로 기대하면 오산이다. 지난 '스카이폴'에 이어 이번 '스펙터'의 줄거리도 전형적인 제임스 본드 스타일과 거리가 먼 인상을 주고 있는데, 여기서 느껴지는 괴리감을 낯익은 클래식 007 시리즈 오마쥬 씬으로 무마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면 이것 또한 오산이다. 정상 궤도로 복귀한 것처럼 보이는 제임스 본드 영화를 만드는 게 목표라면 스토리부터 시작해서 영화 전체를 보다 007 시리즈답게 보이도록 만들 생각을 해야지 클래식 오마쥬 서비스로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물론 007 제작진이 이번 '스펙터'를 클래식 007 시리즈 쪽으로 보다 더 가깝게 접근한 영화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런 흔적들이 여러 곳에서 눈에 띈 것은 사실이다. 아마도 이번 '007 스펙터'가 다니엘 크레이그 주연의 제임스 본드 영화 중에서 가장 007 시리즈답게 보이는 영화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크레이그의 최고의 제임스 본드 영화가 '카지노 로얄'이라는 점엔 변함이 없을 것으로 보이지만, 스토리 등을 따지지 않고 객관적으로 봤을 때 클래식 007 시리즈 쪽으로 가장 가까이 다가간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 영화는 '007 스펙터'가 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하지만 클래식 007 시리즈 오마쥬 퍼레이드는 굉장히 불필요해 보인다. '스카이폴'은 50주년 기념작이었으므로 오마쥬 퍼레이드가 문제될 게 없었지만 '007 스펙터'까지 '스카이폴'에서 하던대로 똑같이 오마쥬 퍼레이드로 밀고 가기로 했다는 건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다른 영화사가 제작한 제임스 본드 아류작이라면 007 시리즈 오마쥬로 범벅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지만, 오피셜 007 시리즈를 제작하는 007 제작진이 그런 식으로 오피셜 제임스 본드 영화를 제작한다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 이러니까 오피셜 007 시리즈를 만드는 007 제작진이 제임스 본드 아류작을 만들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오피셜 007 시리즈를 제작하는 007 제작진이라면 제대로된 제임스 본드 영화를 만들어야지 다른 영화사에서 제작하는 제임스 본드 아류작처럼 오마쥬 투성이의 패로디 영화를 만들면 더욱 이상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이렇다 보니 "오피셜 제임스 본드 영화를 제작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지금의 007 제작진에 있는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오피셜 007 제작진이 오피셜 제임스 본드 영화를 마치 제임스 본드 패로디 아류작처럼 만들고 있으니 말이다. 지난 '스카이폴'이 그랬는데 이번 '스펙터'에서도 마찬가지로 똑같은 문제점이 반복되는 듯 하다.

위에서도 지적한 바 있지만, 이러한 문제점을 낯익은 클래식 007 시리즈 오마쥬 씬으로 무마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아주 큰 착각을 한 것이다. "줄거리부터 제임스 본드 시리즈답지 않았지만 낯익은 클래식 007 시리즈 오마쥬 덕분에 분위기가 살아났다"고 할 본드팬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반대로 "007 제작진이 아직도 50주년 기념 파티 무드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는 비판을 받기 딱 알맞다.

스토리부터 시작해서 불만스러운 점이 상당히 많기 때문에 '007 스펙터'에 많은 기대를 하지 않지만, 되도록이면 불필요한 클래식 007 시리즈 오마쥬 씬들을 크게 줄이거나 아예 완전히 생략해버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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