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3일 목요일

테리 헤이스의 소설 '아이 앰 필그림', 영화로 성공할 수 있을까?

MGM이 곧 새로운 스파이 스릴러 영화를 제작할 예정이다. MGM은 영국 스크린라이터, 테리 헤이스(Terry Hayes)의 데뷔 소설, '아이 앰 필그림(I am Pilgrim)'을 기초로 한 영화 제작을 준비 중에 있다. MGM은 2014년 7월 '아이 앰 필그림'의 영화 제작권을 획득했다고 발표했으며, 2015년 9월엔 영국 영화감독 매튜 본(Matthew Vaughan)이 연출을 맡는다고 발표했다. 각색은 테리 헤이스가 직접 맡는 것으로 전해졌다.

그렇다면 '아이 앰 필그림'이 어떤 소설인가 살펴보기로 하자.

'아이 앰 필그림'의 줄거리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미국 극비 정보조직의 엘리트 요원으로 활동하다 은퇴했던 주인공이 미국을 겨냥한 생물학 테러를 준비 중인 사우디 출신 테러리스트를 추적한다는 내용이다. '필그림'이란 새로운 암호명을 사용하게 된 주인공은 살인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파견된 FBI 에이전트로 신분을 위장해 터키에 입국한 뒤 '사라센'이라 불리는 중동 테러리스트를 추적한다.

'아이 앰 필그림'이 터키의 항구도시, 보드럼(Bodrum)을 주 무대로 삼았으므로 영화로 옮겨진다면 경치는 볼 만할 듯 하다. 세계적인 관광명소를 찾아다니던 007 시리즈를 연상케 할 만할 것으로 보인다. 멋진 미녀들도 여럿 등장한다. '아이 앰 필그림'엔 모델, 배우 수준의 미모를 갖춘 미국인 여성 2명과 매력적인 중동 출신 여형사가 등장한다.


여기까진 좋았다. 그러나 아주 맘에 드는 소설은 아니었다.

'아이 앰 필그림'은 700 페이지에 달하는 짧지 않은 소설이었다. 그러나 전개가 매우 느렸다. 전체 700 페이지 중 절반을 주인공의 과거 이야기, 주인공 친구의 과거 이야기, 테러리스트의 과거 이야기 등 등장 캐릭터의 과거 이야기에 할애했기 때문이다. 물론 등장 캐릭터를 세밀하게 묘사한 것까진 좋았다. 그런대로 읽을 만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등장 캐릭터들의 배경 이야기를 읽으면서 "도대체 지금 무엇을 읽는 건가?"라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필그림'이란 암호명을 사용하는 특수요원이 테러리스트가 꾸미는 음모를 저지한다는 스릴러 소설인 줄 알았는데 9/11 테러, 소련-아프간 전쟁 등 등장 캐릭터들의 과거 이야기가 끝날 줄 모르고 계속됐기 때문이다. 소설의 중반에 이르러서야 메인 캐릭터가 테러리스트를 추적하는 작전에 본격적으로 착수할 정도로 서두가 너무 길었다.

등장 캐릭터들의 과거 이야기가 끝나고 테러리스트 추적 작전이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부터 약간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그러나 '살인사건 미스터리'라는 또다른 장애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 앰 필그림'은 테러리스트를 추적하는 메인 플롯과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서브 플롯을 오가면서 전개되었다. 그 이유는 '필그림'이란 암호명을 사용하는 주인공이 터키에서 발생한 미국인 살인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파견된 FBI 에이전트로 신분을 위장하고 터키에 입국한다는 설정 때문이었다. '필그림'의 본 미션은 '사라센'이라 불리는 중동 테러리스트를 찾아내는 것이었지만 표면상으론 살인사건 수사를 위해 터키에 온 것으로 설정한 바람에 본 미션과 전혀 상관없는 살인사건 파트를 마지막까지 싫든 좋든 계속 달고 가는 수밖에 없게 돼버렸다. 테러리스트를 추적하는 본 미션에만 집중할 수 없고 살인사건 파트와 수시로 오락가락하도록 산만하게 만든 것이다.

살인사건 파트도 그럭저럭 읽을 만했다. 하지만 본 미션과 전혀 상관없는 살인사건 미스터리 파트를 굳이 집어넣을 필요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살인사건 미스터리를 쓰고 싶으면 미스터리 책을 따로 쓰면 될 일이지, 테러리스트를 추적하는 스파이 스릴러 소설에 살인사건 파트를 끼워넣을 필요는 없었다. 살인사건 미스터리와 테러리스트 추적 스파이 스릴러라는 두 권의 책을 억지로 하나로 합쳐놓은 것 같았다. 이 바람에 내용이 산만해지고 진행이 더뎌졌을 뿐 살인사건 파트로 얻은 게 거의 없었다.

이처럼 캐릭터 과거사, 살인사건 미스터리, 테러리스트 추적 등 세 파트로 나눠진 소설을 어떻게 영화로 옮겨야 할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캐릭터 과거사와 살인사건 미스터리 파트는 거의 모두 잘라내거나 가능한한 간략하게 축소시키고 테러리스트 관련 파트만으로 만드는 방법이 가장 좋을 것 같다. 이 모든 내용을 런타임 2시간 남짓한 영화에 모두 담기 어려울 것 같아서다. '필그림'이 터키에 도착한 이후에도 과거의 일을 회상하는 플래시백 파트가 또 나오는데, 이런 것도 거의 모두 걷어내고 현재와 과거를 오락가락하지 않도록 하는 게 좋을 듯 하다. 잘못하단 영화 내내 현재와 과거, 살인사건과 테러리스트 추적을 오락가락만 하다 끝날 수도 있을 것 같아서다.

'아이 앰 필그림'의 또 하나의 문제는 독창성이 크게 부족하다는 점이다.

'아이 앰 필그림'은 제임스 본드, 제이슨 본, 배트맨, '미션 임파서블(Mission Impossible)', FOX의 TV 시리즈 '24', CBS의 TV 시리즈 '퍼슨 오브 인터레스트(Person of Interest)', ABC의 TV 시리즈 '캐슬(Castle)', 로버트 리텔(Robert Littell)의 소설, 톰 클랜시(Tom Clancy)의 테크노 스릴러 소설, 댄 브라운(Dan Brown)의 소설 '인페르노(Inferno)', 다니엘 실바(Daniel Silva)의 스파이 스릴러 소설 등 여러 다른 액션 스릴러물과 비슷한 점이 상당히 많았다. 테러리즘을 다룬 스파이 스릴러 소설이 비슷비슷할 수밖에 없는 건 사실이지만, '아이앰 필그림'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비슷한 쟝르의 다른 소설, 영화, TV 시리즈 등이 바로 바로 떠오를 정도였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필그림'이 정보부를 떠난 전직 요원 출신이란 점은 TV 시리즈 '퍼슨 오브 인터레스트'의 존 리스(짐 카비젤)와 겹쳐졌고, 주인공이 본명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항상 가명을 사용한다는 점은 로버트 리텔의 소설 '레전드'를 연상케 했다. '필그림'이 고아였다는 점은 제임스 본드와 닮았고, 고아가 됐으나 부유한 가정에서 생활했다는 점은 브루스 웨인과 비슷했다. '필그림'의 여러 가지 뒷처리를 해주는 나이 많은 변호사는 배트맨 시리즈의 알프레드를 연상시켰고, '필그림'의 작전을 도와주는 해커는 '미션 임파서블' 팀을 떠올리게 했다. 음주 문제가 있는 의사에게 치료를 받는 파트는 '본 아이덴티티(The Bourne Identity)'에서 본을 치료해준 의사가 생각났으며, 테러리스트가 생물학 테러를 계획한다는 점은 댄 브라운의 '인페르노'와 비슷했다. 또한, 주인공이 집필한 범죄 수사 관련 책을 참고한 살인사건이 뉴욕에서 발생한다는 점은 TV 시리즈 '캐슬'을 연상시켰고, 중동 테러리즘을 다룬다는 점과 가공의 미국 대통령이 등장한다는 점은 TV 시리즈 '24'와 톰 클랜시 스타일의 테크노 스릴러 소설과 비슷했다. 가공의 미국 대통령이 등장하면 현실감이 떨어져서 그러한 테크노 스릴러를 좋아하지 않는데, '아이 앰 필그림'은 이것도 따라했다.

이쯤 됐으면 '아이 앰 필그림'을 쓴 작가가 다른 소설, 영화, TV 시리즈 등을 눈에 띌 정도로 상당히 많이 참고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다 보니 소설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것을 이미 다른 데서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플롯과 캐릭터 모두 신선해 보이지 않았고, 여러 다른 작품들에서 빌려온 아이디어들을 조각조각 끼워맞춘 것처럼 보였다.

이런 덕분에 작가가 구상한 것이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이 가능했다. 어느 캐릭터가 언제 왜 등장했으며, 그 캐릭터가 결국 어떤 역할을 맡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눈치로 쉽게 맞출 수 있었다. 해당 캐릭터가 등장하는 상황, 스토리의 흐름 등 전반적인 구성이 낯익었기 때문에 줄거리가 어느 쪽으로 어떻게 흘러갈지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이 바람에 '반전'이나 '서프라이즈'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낯익은 틀에 맞춰 낯익은 줄거리를 풀어가는 게 전부였다. '아이 앰 필그림'은 전반적으로 너무 평범하고 맹탕이었다.

그래도 많은 생각을 하지 않고 읽기엔 아주 나쁘진 않았다. 시간이 가는 줄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페이지를 넘기면서 재밌게 읽었다고는 하기 어렵지만, 여러 가지 따지지 않고 아무 생각 없이 읽기엔 과히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 앰 필그림'이 기대했던 바와는 거리가 먼 소설이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고독한 스파이가 고독한 테러리스트를 잡기 위해 벌이는 쫓고 쫓기는 숨막히는 추격전을 그린 어두운 스릴러를 기대했으나 '아이 앰 필그림'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특징이 뚜렷하지 않은 미지근한 스릴러였다.

그렇다면 '아이 앰 필그림'이 영화로도 성공할 수 있을까?

현재로썬 별로 기대가 되지 않는다. 비슷한 쟝르의 다른 소설, 영화, TV 시리즈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흔한 내용이라서 익사이팅한 스파이 스릴러 영화가 나올 것 같다는 기대감이 생기지 않는다. 비슷비슷하게 흉내낸 또 하나의 비슷비슷한 영화가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테리 헤이스가 비록 루키 소설가이긴 해도 스크린라이터로써는 베테랑인 만큼 기대 이상의 좋은 결과가 나올 수도 있겠지만, 제임스 본드 시리즈나 제이슨 본 시리즈에 견줄 만한 '물건급' 스파이 스릴러 영화가 나오긴 어려워 보인다. 연출을 맡은 매튜 본이 지난 2010년 공개된 영화 '데트(The Debt)'에서 과거와 현재를 수시로 오가는 스파이 스릴러 영화를 연출한 바 있으므로, 과거와 현재, 살인사건과 테러리스트 추적을 수시로 오가는 '아이 앰 필그림'을 영화로 잘 옮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매튜 본의 2010년 영화 '데트'도 과거와 현재를 오락가락하지 말고 60년대 과거 이야기만 다뤘더라면 더욱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남는 영화였다. 따라서 이런 아쉬움 역시 '아이 앰 필그림'에서 반복될 수 있다.

아직 출연진에 대한 정보는 알려지지 않았다.

마음대로 출연진을 찍어보자면, NYPD 브래들리 역으로는 영국 영화배우 이드리스 엘바(Idris Elba)가 괜찮을 것 같고, 터키 여형사 쿠말리 역으론 FX의 스파이 시리즈 '아메리칸(The Americans)'에 출연 중인 아넷 마헨드루(Annet Mahendru)가 잘 어울릴 듯 하다.


'필그림' 역은?

어떻게 보면 이런 역할은 이것저것 따질 것 없이 그냥 톰 크루즈(Tom Cruise)에게 맡기는 게 가장 안전할 수도 있다.

휴 잭맨(Hugh Jackman)에게 맡기는 것도 괜찮을 듯 하다. '필그림'이 어린아이와 꾸벅거리는 인사를 하며 장난치기도 하는 캐릭터이므로 너무 진지하거나 따분해 보이는 배우는 적합하지 않을 수 있다. 휴 잭맨은 액션과 유머 연기가 모두 가능한 배우이므로 '필그림' 역에 잘 어울릴 듯 하다.


MGM의 '아이 앰 필그림' 영화 프로젝트가 앞으로 어떻게 진행되는지 지켜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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