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1월 29일 토요일

제임스 본드 스페셜 (10) - 유머

많은 사람들은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 영화에서는 유머를 찾아보기 힘들다고 한다. 이전 배우들의 영화에선 유머가 풍부했는데 크레이그의 본드는 너무 거칠고 딱딱하다는 것이다.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다니엘 크레이그가 연기한 제임스 본드 캐릭터가 유머감각이 부족해 보이는 건조한 캐릭터인 것은 맞기 때문이다. 언제나 미소를 띈 표정이었던 로저 무어(Roger Moore)의 제임스 본드에 익숙한 사람들은 조크는 고사하고 미소도 짓지 않는 다니엘 크레이그의 '터미네이터 본드'가 어색했는 지도 모른다.


▲다니엘 크레이그 IS 제임스 본드

그렇다면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 영화는 계속해서 유머와는 담을 쌓을 생각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NO'다.

'콴텀 오브 솔래스(Quantum of Solace)'가 전편 '카지노 로얄(Casino Royale)'과 몇 분 사이를 두고 줄거리가 이어지는 바람에 제임스 본드의 성격을 바꿀 수 없었을 뿐이지 007 제작진이 유머를 소홀하게 다룬 건 아니다. 실제로, 007 제작진은 '콴텀 오브 솔래스'를 전편보다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눈에 띌 정도로 딱 부러지는 유머는 여전히 없었지만 '카지노 로얄'보다 유머가 는 것만은 사실이다.

또한, '콴텀 오브 솔래스'에는 '골드핑거(Goldfinger)'의 'Pussy Galore'처럼 코믹한 이름을 가진 여자 캐릭터도 나온다. 젬마 아터튼이(Gemma Arterton)이 연기한 에이전트 필즈(Fields)다. 에이전트 필즈는 본드에게 끝까지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주지 않고 "그냥 필즈로 부르라"고만 하는데, 그녀의 전체 이름은 'Strawberry Fields'다.

물론, 'Pussy Galore' 만큼 화끈한(?) 이름은 아니었지만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는 명백하다.

(참고: 에이전트 필즈의 전체 이름은 엔드 크레딧에만 나온다.)


▲"Bond, James Bond" & "Fields, Strawberry Fields!!"

다니엘 크레이그가 전편에 비해 제임스 본드 연기에 여유가 생겼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크레이그가 무겁고 진지한 제임스 본드를 연기한 것은 변함없었지만 '카지노 로얄'에서 처럼 경직된 모습은 아니었다. '콴텀 오브 솔래스'가 그의 두 번째 제임스 본드 영화였기 때문인지 여유있어 보였다.

2편의 제임스 본드 영화에 출연한 다니엘 크레이그는 그만의 제임스 본드 캐릭터를 조금씩 만들어가는 중이다. 그러므로, 머지않아 그의 캐릭터에 어울리는 유머도 찾게 될 것이다. 지금은 유머가 매말랐다는 소리를 듣지만 크레이그가 제임스 본드 연기에 익숙해 질수록 조크와 유머가 자연스럽게 늘어날 것이므로 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콴텀 오브 솔래스'에서도 변화를 확인할 수 있었으니 '본드23'에선 유머가 더욱 풍부해질 것으로 기대된다.

그렇다고 로저 무어의 제임스 본드 영화처럼 되기를 기대하는 건 아니다. 로저 무어의 제임스 본드 캐릭터를 좋아하는 팬들도 있지만 그렇다고 다니엘 크레이그가 로저 무어를 흉내내길 기대해선 안된다. 크레이그에게는 냉소적이면서도 사카스틱한 유머가 어울리지 로저 무어의 익살꾼 스타일은 전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니엘 크레이그에겐 어떠한 제임스 본드가 어울릴까?

크레이그는 숀 코네리 스타일의 제임스 본드 캐릭터에 잘 어울린다. 하드할 때는 킬러 저리가라 할 정도이다가도 부드러워질 때는 한량없이 소프트해지는 코네리의 본드가 크레이그와 매치되기 때문이다.


▲숀 코네리

툭하면 피범벅이 되는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를 어떻게 숀 코네리와 비교할 수 있냐고?

로저 무어는 지나치게 소프트했고, 티모시 달튼은 지나치게 하드했으며, 피어스 브로스난은 뚜렷한 개성이 없었다면 숀 코네리는 하드한 킬러와 소프트한 젠틀맨 에이전트의 모습을 모두 지닌 제임스 본드였다. 숀 코네리가 최고의 제임스 본드로 불리는 가장 큰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다니엘 크레이그는?

'카지노 로얄'에서는 유머와는 거리가 먼 제임스 본드가 되는 것처럼 보였다. 티모시 달튼처럼 지나치게 하드한 제임스 본드가 되는 게 아니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콴텀 오브 솔래스'에서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줬다. 영화의 분위기가 무겁고 칙칙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 영화에도 유머를 섞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숀 코네리처럼 하드할 때는 거칠고 소프트할 때는 마냥 부드러운 '두 얼굴의 제임스 본드'의 가능성을 크레이그에게서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유머를 보태는 게 좋을까?

실없는 조크를 스크립트에 포함시킬 생각을 하기 전에 머니페니와 Q를 복귀시키는 게 급선무다.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가 능글맞은 익살꾼과는 거리가 있는 만큼 오피스에서 머니페니, Q와 코믹한 대화를 주고받는 것에서 부터 천천히 시작하는 게 순서다. 머니페니와 Q에 적격인 배우를 찾는 게 쉽지만은 않겠지만 이들이 007 시리즈로 돌아오기만 해도 딱딱했던 분위기를 많이 누그러뜨릴 수 있을 것이다.


▲M의 오피스

하지만, 영화 자체를 코메디 어드벤쳐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건 피해야 한다. 제임스 본드가 어느정도 유들유들해지는 건 문제될 게 없지만 액션씬까지 우스꽝스러워지는 건 곤란하다는 것이다.

로저 무어의 007 영화는 그가 연기한 제임스 본드 캐릭터보다 영화 자체에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로저 무어도 "너무 심했다"고 인정한 바 있는 강철이빨의 죠스(Jaws)와 같은 말도 안되는 캐릭터가 나온 것부터 시작해서 액션씬까지 스릴과 서스펜스가 사라지고 남은 건 유머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유머가 도를 넘었던 것.

이렇게 되면 누가 제임스 본드이든 상관없이 영화가 아주 우스꽝스럽게 된다. '골드핑거'의 아스톤 마틴 DB5나 '리빙 데이라이트'의 아스톤 마틴 볼란테가 나오는 '전통적인 본드카 액션씬' 정도는 크게 문제될 게 없어도 나머지 액션씬까지 전부 코믹하게 만들면 제임스 본드 영화가 아니라 코메디 영화처럼 보이게 된다. 유머가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너무 지나치면 코믹한 게 아니라 유치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 영화가 '콴텀 오브 솔래스'에서 곧바로 '나를 사랑한 스파이(The Spy Who Loved Me)'처럼 바뀌진 않겠지만 과도한 유머는 금물이다.


▲로저 무어

다 좋다. 그런데, '본드23'가 달라지긴 하는 거냐고?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YES'다.

'본드23'는 '카지노 로얄', '콴텀 오브 솔래스'와 분위기가 다를 것으로 알려졌다. 다니엘 크레이그도 '격렬한 제임스 본드 영화는 콴텀 오브 솔래스가 마지막'이라고 한 만큼 다음 번 제임스 본드 영화(본드23)부터는 유머가 풍부해지고 많이 부드러워질 것으로 보인다. 크레이그가 Q와 가젯의 복귀에 긍정적인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이것도 숀 코네리와 비슷해 보인다. 코네리의 첫 번째 007 영화 '닥터노(Dr. No)'와 두 번째 영화 '위기일발(From Russia With Love)'까지는 진지하고 사실적이었지만 세 번째 영화 '골드핑거(Goldfinger)'부터 아스톤 마틴 DB5가 등장하는 등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던 것 처럼 크레이그의 세 번째 제임스 본드 영화도 이전 두 영화와 차이가 날 것 같기 때문이다. '본드23'가 '다니엘 크레이그의 골드핑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007 시리즈가 원작으로 회귀한 것을 기뻐했던 본드팬들이 실망하지 않겠냐고?

플레밍의 원작으로 돌아가는 것은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플레밍의 원작 없이 원작 분위기를 살린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콴텀 오브 솔래스'가 입증했다. 거칠고 우중충한 분위기만으로 '원작 스타일'이라고 우기는 것에도 한계가 드러난 것 같았다.

물론, 플레밍의 원작을 다시 리메이크한다면 또다른 얘기가 된다. 그러나, 007 제작진은 원작 리메이크를 '최후의 선택'으로 남겨두려는 지도 모른다.

따라서, 앞으론 '원작으로의 회귀'보다 '숀 코네리 시절로의 회귀'를 노릴 것으로 보인다. 피지컬한 부분은 이미 충분히 보여줬고 앞으로도 변함없을 테니 여기에 약간의 위트와 유머, 가젯 등을 섞는 쪽으로 가지 않을까 한다.

격렬한 제임스 본드로 2편의 영화를 만들었으니 약간의 변화를 줄 때가 된 것 같기도 하다.

개인적인 취향은 잠시 밀어두고 생각해 보자: 매번 같은 스타일을 반복하면 질릴 것 같지 않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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